합천 해인사 입구에 최치원 선생님 친필..! |─────행복한 마마

 

최치원 선생님 친필..!

최치원(崔致遠)에 대하여
857년(문성왕 19)∼미상. 신라 말기의 학자·문장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 경주 사량부(沙梁部, 혹은 本彼部) 출신.
1. 가계 및 유년시절
견일(肩逸)의 아들이다.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가문 출신이다.

특히, 최씨가문 가운데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3최(崔)’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품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였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 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격려하였다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뒷날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던 점과 아울러 신흥가문출신의 기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2. 당나라에서의 시작(詩作) 활동
당나라에 유학한 지 7년 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는데, 그때 지은 작품이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雜詩賦》 30수 1권 등이다.

그뒤 876년(헌강왕 2) 당나라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

이때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을 추려 모은 것이 《중산복궤집 中山覆簣集》 1부(部) 5권이다.

그뒤 887년 겨울 표수현위를 사직하고 일시 경제적 곤란을 받게 되었으나, 양양(襄陽) 이위(李蔚)의 문객(門客)이 되었고, 곧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그러나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칠 때 고변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그뒤 4년간 고변의 군막(軍幕)에서 표(表)·장(狀)·서계(書啓)·격문(檄文) 등을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차되었으며, 겸하여 포상으로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으며, 이어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고변종사관으로 있을 때, 공사간에 지은 글이 표·장·격(檄)·서(書)·위곡(委曲)·거첩(擧牒)·제문(祭文)·소계장(疏啓狀)·잡서(雜書)·시 등 1만여수에 달하였는데, 귀국 후 정선하여 《계원필경 桂苑筆耕》 20권을 이루게 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 討黃巢檄〉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3. 귀국후의 활동
88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동안 고운(顧雲)·나은(羅隱)당나라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어 그의 글재주는 더욱 빛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당서 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그의 저서명이 수록되게 되었는데,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 권22 잡문(雜文)의 〈당서에 최치원전을 세우지 않은 데 대한 논의[唐書不立崔致遠傳議]〉에서 《당서》 열전(列傳)에 최치원의 전기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중국인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29세로 신라에 돌아오자, 헌강왕에 의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문명을 떨쳐 귀국한 다음해에 왕명으로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등의 명문을 남겼고,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하여 국왕에게 진헌하였다.
4. 시국관
그러나 당시의 신라사회는 이미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지방에서 호족세력이 대두하면서 중앙정부는 주(州)·군(郡)의 공부(貢賦)도 제대로 거두지 못하여 국가의 창고가 비고, 재정이 궁핍한 실정이었다.

889년(진성여왕 3)에는 마침내 주·군의 공부를 독촉하자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하여 전국적인 내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최치원은 895년 전국적인 내란의 와중에서 사찰을 지키다가 전몰한 승병들을 위하여 만든 해인사(海印寺) 경내의 한 공양탑(供養塔)의 기문(記文)에서 “당토(唐土)에서 벌어진 병(兵)·흉(凶)두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는 멈추었고, 동쪽 신라로 옮겨져와서 그 험악한 중에도 더욱 험악하여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져 있었다.”고 당시의 처참한 상태를 적었다.

당나라에서 직접 황소의 반란을 체험한 바 있는 그에게는 고국에서 벌어지고 있던 전쟁과 재앙이 당나라의 그것이 파급, 연장된 것으로 느껴졌던 모양으로, 당대 제일의 국제통(國際通)다운 시대감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5. 사회개혁 활동
귀국한 뒤 처음에는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당나라에서 배운 경륜을 펴보려 하였으나,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원하여 890년에 대산군(大山郡: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천령군(天嶺郡: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부성군(富城郡: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부성군 태수로 있던 893년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의 횡행으로 가지 못하고, 그뒤에 다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일이 있다.

894년에는 시무책(時務策) 10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10여년 동안 중앙의 관직과 지방관직을 역임하면서, 중앙 진골귀족의 부패와 지방세력의 반란 등의 사회모순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결과 그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무책은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져서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으나 그의 정치적인 개혁안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모순을 외면하고 있던 진골귀족들에게 그 개혁안이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아니되어 실정을 거듭하던 진성여왕이 즉위한 지 11년 만에 정치문란의 책임을 지고 효공왕에게 선양(禪讓)하기에 이르렀다.
6. 은거생활
최치원은 퇴위하고자 하는 진성여왕과 그뒤를 이어 새로이 즉위한 효공왕을 위하여 각각 대리 작성한 상표문(上表文)에서 신라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을 박진감나게 묘사하였다.

이에 이르자 최치원은 신라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세 장년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소요자방(逍遙自放)하다가 마침내 은거를 결심하였다.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즐겨 찾은 곳은 경주남산(南山), 강주(剛州: 지금의 義城)빙산(氷山), 합천(陜川)의 청량사(淸凉寺), 지리산의 쌍계사(雙磎寺), 합포현(合浦縣: 지금의 昌原)의 별서(別墅) 등이었다고 하는데, 이밖에도 동래(東萊)의 해운대(海雲臺)를 비롯하여 그의 발자취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만년에는 모형(母兄)인 승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가 지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의하면 908년(효공왕 12)말까지 생존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뒤의 행적은 전연 알 수 없으나, 물외인(物外人)으로 산수간에서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며 혹은 신선이 되었다는 속설도 전해오고 있으나, 자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새로운 주장도 있다.
7. 고려건국을 즈음한 태도
최치원전에 의하면 고려 왕건(王建)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그 가운데 “계림은 시들어가는 누런 잎이고, 개경의 곡령은 푸른 솔(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어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새로 일어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이 실제 왕건에게 서신을 보낸 사실이 있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그가 송악(松岳) 지방에서 새로 대두하고 있던 왕건세력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은거하고 있던 해인사에는 희랑(希朗)관혜(觀惠) 등 두 사람의 화엄종장(華嚴宗匠)이 있어서 서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여 대립하고 있었다.

즉, 희랑은 왕건을 지지하는 데 비하여, 관혜견훤(甄萱)의 지지를 표방하고 있었다. 그때에 최치원희랑과 교분을 가지고 그를 위하여 시 6수를 지어준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로 보아 최치원희랑을 통해서도 왕건의 소식을 듣고 있었고, 나아가 고려의 흥기에 기대를 걸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역사의 중심무대가 경주에서 송악 지방으로 옮겨지고 또 그 주인공도 경주의 진골귀족이 몰락하는 대신에 지방의 호족세력이 새로 대두하고 있던 역사적 현실을 직접 눈으로 내다보면서 살다간 사람이었다.

비록 그 어느 편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사회적인 전환과정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이미 잔존세력에 불과하던 신라인으로 남아서 은거생활로 일생을 마치고 말았으나, 역사적 현실에 대한 고민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문인(門人)들이 대거 고려정권에 참가하여 새로운 성격의 지배층을 형성함으로써 신흥고려의 새로운 정치질서·사회질서의 수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8. 학문적 입장
한편, 최치원이 살던 시대는 사회적 전환기일 뿐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정신계의 변화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는 정신계의 변화면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자신을 ‘부유(腐儒)’·‘유문말학(儒門末學)’ 등으로 표현하였던 것으로 보아 학문의 기본적 입장은 유학(儒學)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유학을 단순히 불교의 부수적인 것으로 이해하거나, 왕자(王者)의 권위수식에만 이용하던 단계를 지나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내세우면서, 골품제도라는 신라사회의 족적 편제방법(族的編制方法)을 부정하는 방향으로까지 발전시켰던 것이다.

유교에 있어서의 선구적 업적은 뒷날 최승로(崔承老)로 이어져 고려국가의 정치이념으로 확립을 보기에 이르렀다.
9. 역사인식
그는 유교사관(儒敎史觀)에 입각해서 역사를 정리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연표형식으로 정리한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이다. 《제왕연대력》에서는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이사금(尼師今)·마립간(麻立干) 등 신라왕의 고유한 명칭은 모두 야비하여 족히 칭할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하면서 왕(王)으로 바꾸었는데, 그것은 유교사관에 입각해서 신라문화를 이해하려는 역사인식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러한 최치원의 유교사관은 유교에 대한 이해가 보다 깊어지는 김부식(金富軾)의 그것에 비해서 냉정한 면이 결여된 것이었고, 따라서 그만큼 모방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제왕연대력》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아 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가야를 포함하여 삼국의 연표와 통일신라, 그리고 중국의 연표가 들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불허북국거상표 謝不許北國居上表〉나 〈상태사시중장 上太師侍中狀〉 등에서 나타난 발해인에 대한 강한 적개심으로 보아 발해사(渤海史)는 제외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상태사시중장〉에서는 마한고구려, 변한백제, 진한신라로 발전한 것으로 인식하고, 또한 발해고구려의 후예들이 건국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로 보아 그가 인식한 한국고대사체계는 삼한―삼국―통일신라와 발해로 이어져오는 것이었고, 나아가 그 자신의 시대에 와서 통일신라 자체도 이미 붕괴되고 있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10. 한문학·불교업적
그리고 유교에 있어서의 선구적인 역할과 아울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문학사(漢文學史)에 있어서의 업적이다.

그의 한문학은 중국문학의 차용(借用)을 통해서 형성되었는데, 신라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성립된 향가문학(鄕歌文學)과 대립되는 새로운 문학장르를 개척한 것이었다.

그리고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다. 《동문선》《계원필경》에 상당수의 시문이 수록되어 전하고 있는데 평이근아(平易近雅)하여 당시 만당시풍(晩唐詩風)과 구별되었다.

최치원은 그 자신 유학자로 자처하면서도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승려들과 교유하고, 불교관계의 글들을 많이 남기고 있었다. 불교 가운데서도 특히 종래의 학문불교·체제불교인 화엄종의 한계와 모순에 대해서 비판하는 성격을 가진 선종(禪宗)의 대두를 주목하고 있었다.

지증(智證)·낭혜(朗慧)·진감(眞鑑) 등 선승들의 탑비문(塔碑文)을 찬술하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특히 〈지증대사비문 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선종사(新羅禪宗史)를 간명하게 기술한 것으로 유명한데, 신라의 불교사를 세 시기로 구분하여 이해한 것은 말대사관(末代史觀)에 입각한 것으로서 주목된다.

그러나 불교 가운데서 주목한 것은 선종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종래의 지배적 불교인 화엄종이었다. 화엄종관계의 글을 많이 남기고 있어서 오늘날 확인되는 것만도 20여종에 이르고 있으며, 특히 화엄종 사찰인 해인사에 은거한 뒤부터는 해인사관계의 글을 많이 남겼다. 화엄종관계의 글 가운데는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부석존자전 浮石尊者傳》·《석순응전 釋順應傳》·《석이정전 釋利貞傳》 등이 있었던 것이 확인되는바, 이로 보아 신라화엄종사(新羅華嚴宗史)의 주류를 의상(義湘)신림(神琳)순응(順應)이정(利貞)희랑으로 이어지는 계통으로 이해하지 않았는가 한다.

그리고 화엄학 이외에도 유식학자(唯識學者)인 원측(圓測)태현(太賢)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 화엄학과 함께 신라불교의 양대 조류를 이루었던 유식학(唯識學)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주목된다.
11. 도교·노장·풍수지리연구
유교와 불교 이외에 기타 사상으로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도교(道敎)와 노장사상(老莊思想)·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었다. 당나라에 있을 때 도교의 신자였던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도교에 관한 글을 남기고 있었던 것을 보아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계원필경》 권15에 수록된 〈재사 齋詞〉에서 그의 도교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귀국한 뒤 정치개혁을 주장하다가 진골귀족의 배척을 받아 관직을 떠난 뒤에는 현실적인 불운을

노장적(老莊的)인 분위기 속에서 자족하려고 하는 면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현실도피적인 행동이 뒷날 도교의 인물로까지 잘못 전하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찬술한 〈대숭복사비문〉에 의하면 예언적인 도참신앙(圖讖信仰)과 결부되어 국토재계획안적인 성격을 가지고 사회적 전환의 추진력이 되고 있었던 풍수지리설에도 상당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사회에 대한 인식이나 역사적인 위치가 선승(禪僧)이자 풍수지리설의 대가였던 도선(道詵)과 비슷한 점은 주목할만한 것이다. 이처럼 유학자라고 자처하면서 유교 이외에 불교나 노장사상, 그리고 심지어는 풍수지리설까지도 아무 모순 없이 복합하여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유교와 불교의 조화에 노력한 면이 〈난랑비서문 鸞郞碑序文〉을 비롯한 그의 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12. 평가
그런데 이러한 사상적인 복합화가 중앙의 진골귀족들의 독점적인 지배체제와 그들의 고대적인 사유방식에 반발하던 6두품출신의 최치원에 의하여 추진되었다는 사실은 신라고대문화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사상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말년에 와서의 소극적이며 은둔적인 생활은 시대적인 제약성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신라고려초의 사회적인 전환기에서 중세적 지성의 선구자로 머물다 간 아쉬움을 남겼다.

1020년(현종 11) 현종에 의하여 내사령(內史令)에 추증, 다음해에 문창후(文昌候)에 추시(追諡)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永平)의 고운영당(孤雲影堂), 대구 해안현(解顔縣)의 계림사(桂林祠) 등에 제향되었다.
13. 저술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계원필경》 20권, 《금체시》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100수 1권, 《잡시부》 30수 1권, 《중산복궤집》 1부 5권, 《사륙집 四六集》 1권, 문집 30권 등이 있었고, 사서(史書)로는 《제왕연대력》이 있었으며, 불교에 관계되는 저술로는 《부석존자전》 1권, 《법장화상전》 1권과 《석이정전》·《석순응전》·《사산비명 四山碑銘》 등이 있었으나 오늘날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법장화상전》·《사상비명》뿐이고, 그 외는 《《동문선》》에 시문 약간, 사기(寺記) 등에 기(記)·원문(願文)·찬(讚) 등 그 편린만이 전할 뿐이다.

글씨도 잘 썼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것으로는 쌍계사의 〈진감선사비문〉이 유명하다.

그리고 많은 설화가 전해오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조선시대 김집(金集)《신독재전집 愼獨齋全集》에 실린 〈최문헌전 崔文獻傳〉이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增東國輿地勝覽
新編諸宗敎藏總錄
華嚴寺事蹟
佛國寺古今歷代記
東文選
崔文昌候全集(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1972)
국역 孤雲先生文集 上·下(孤雲先生文集編纂會, 1972·1973)
韓國佛敎撰述文獻總錄(東國大學校佛敎文化硏究所, 1976)
崔文昌候全集 解題(李基白, 崔文昌候全集, 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1972)
崔孤雲의 文化的 地位(崔益翰, 春秋 2―6, 1941)
孤雲 崔致遠의 思想硏究(金福順, 史叢 24, 1980)
孤雲 崔致遠의 社會改革思想(崔根泳, 韓國思想 18, 1981)
崔致遠硏究(崔敬淑, 釜山史學 5, 1981)
崔致遠의 歷史敍述(趙仁成, 歷史學報 94·95合輯, 1982)
新羅統一期 및 高麗初期의 儒敎的 政治理念(李基白, 大東文化硏究 6·7合輯, 1970)
新羅骨品體制下의 儒敎的 政治理念(李基白, 新羅時代의 國家佛敎와 儒敎, 한국연구원, 1978)
韓國古代政治의 性格과 中世政治思想의 成立過程(金哲埈, 東方學志 10, 1969;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南北國時代와 崔致遠(李佑成, 創作과 批評 38, 1975;韓國의 歷史像, 창작과 비평사, 1982)
新羅下代禪宗九山派의 成立(崔柄憲, 韓國史硏究 7, 1972)
新羅下代 賓貢及第者의 出現과 羅唐文人의 交驩(李基東, 全海宗博士華甲記念史學論叢, 1979;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한국연구원, 1980)
羅末의 戰亂과 緇軍(李弘稙, 史叢 12·13合輯, 1968;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1973)
新羅六頭品硏究(李基白, 省谷論叢 2, 1971;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桂苑筆耕集(徐首生, 韓國의 名著, 1969)
東國文宗崔孤雲文學(徐首生, 語文學 1·2)
최고운의 사상과 문학(양광석, 한국문학론, 일월서각, 1981)

[이미지]

[공지사항] [최와 경주최씨]에 관한 인터넷 정보 검색 찿기에 포함될 내용| ☜ 경주최씨 게시판 ☞

http://cafe.daum.net/householdchoi/IP5/1826 (전 주소에서 옮긴이--도천 최평열)

 

최와 경주최씨]에 관한 인터넷 정보 검색 찿기에

필히 포함되어야 할 핵심단어와 내용 검토안


[1] 최

최 [崔]
 
한국의 성씨.요약

한민족 5천년 역사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삼한시대 삼한갑족인 최씨는 한국사의 주체세력 가문으로 위대한 역사와 훌륭한 전통을 세운 기원전 BC 삼한 6부 대부족장 문열왕 최소벌도리공의 후예이다 삼한시대이후 3천년의 명예와 영광으로 삼한,신라,통일신라,고려,조선의 각 시대별로 숱한 명신•학자• 문인•충신• 관료을 배출한 유구한 역사의 한민족 원류 성씨이며 한민족 최고의 전통적 명문거족이다

한국 최씨의 원시조는 기원전 BC 삼한진한시대 / 신라사로의 서라벌 6촌(村) 6부(部) 중의 하나인
돌산고허촌,사량부(突山高墟村,沙梁郡)의 6부 대부족장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

'소벌’의 뜻은  신라의 옛 칭호인 ‘서라벌(徐羅伐)’을 약칭한 ‘서벌(徐伐)’로 생각되며, 한편 도리는 집단의 뜻을 가진 ‘돌’•‘두레’의 사음(寫音)으로 짐작된다.소벌도리와 소벌공 호칭은 4글자/3글자로 된 이름이며 姓이 아니다 소벌도리-최소벌도리공/알평-이알평공/지백호-정지백호공=같은 이름이고 姓이 아니다

법흥왕 3년 서기 516년에 사량부(沙梁部) 대인(大人) 에서 충선공(忠宣公)으로 시호(諡號)되었고,
658년(무열왕 3)에 문열왕(文烈王)에 추봉되었다
 
《삼국유사》에 보면 문열왕(文烈王) 최소벌도리공(崔蘇伐都利公)을 포함 6부(六部) 촌장들은
모두 천강인(天降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6部에 6姓 (李•崔•孫•鄭•裵•薛)을 각각 사성(賜姓)한 것이 32년(신라 유리왕 9)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소벌도리(蘇伐都利)공은 경주 남산기슭 나정에서 혁거세를 발견하여
13세 까지 양육시켜 6부족회의 합의로 왕으로 추대하고 기원전 BC 삼한시대 6부 대부족장 세력으로
신라 건국을 주도한 신라개국 주체세력이며 개국원훈(開國元勳)이다.

신라개국과 왕추대의 은공으로 개국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32년(유리왕 9)에 6부로 개편시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이 사량부(沙梁部)로 개칭되면서 [최]씨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다.
 
본관은 문헌에 대략 380여 본이 기록되어 왔으나 거의가 지명이고 시조가 분명히 밝혀져 있는
본관은 [60여본] ~ [45여본]인데. 신라시대부터 시대별 본관 생성,통,폐합 추이는
고려조 기준으로  380개 – 326개 - 127개 - 60개 – 45개 변화추이이다
 
현존 신라시대이후 계속된 분파 통폐합 본관중 중시조가 승계되는 분파는 45여 본인데
주요한 본관은 경주(慶州)•계림(鷄林)•전주(全州)•동주(東州:철원)•강화(江華)•영천(永川)•탐진(耽津:康津)
•수원(水原)•영흥(永興)•수성(隋城)•해주(海州)•삭녕(朔寧)•강릉(江陵)•화순(和順)•우봉(牛峰:金川)•충주(忠州) 등이다.
 
오늘날 많은 최씨의 관향(貫鄕) 분파는 삼한시대 경주태동 삼한경주최씨 원시조 최소벌도리공과
중시조 문창후 최치원 상하대 중심축(中心軸)를 연결하는 삼한경주최씨 상계도와 분파도를 연원으로 하고 있다.
 
한국최씨의 동조동근(同祖同根) 선대 세계(世系) 및 분파 연원은 최근 300여년간 45여본관 각가문별로
수십차례 수정 보완체계화한 경주최씨상계세보(慶州崔氏上系世譜)》와 《가문별최씨상계세보(家門別崔氏上系世譜)에 상세히 기록 보존하고 있는  각 가문 세계도와 분파도에서 그 본류를 파악할 수 있다.
 
원시조 최소벌도리공의 24세손인 최치원의 전대(前代)에서 분파한 관향으로 개성•삭녕•동주 최씨와 전주최씨의 일파가 있고, 최치원의 장손(長孫)인 승로(承老)의 후손에서 함양(咸陽)•청주(淸州)•영흥•충주•용강•수원•부안(扶安)•강릉•강화•화순•통천(通川)•양주(楊州)•원주(原州) 최씨 등이 분파되었으며,
이 밖에 해주•진주(晉州)•탐진 최씨가 최치원의 지손(支孫)에서 분파된 것으로 고증되어 있다.
 
1877년 [130여년전] 발견된《선의계 추록》《아동최씨고(我東崔氏考)》의 오류나 미진한 부분들을 수정 보완한 각 가문의 상계,분파 내용 《한국 최씨 가문별 상계도, 분파도(韓國 崔氏 家門別 上係圖, 分派圖 )》와 정통 경주 원본《경주최씨상계세보(慶州崔氏上系世譜)》의 상계도,분파도 내용을 참조하여
각 가문이 통합수정,보완정정하여 보유하고 있는《한국 최씨 가문 상계도와 분파도(韓國 崔氏 家門 上係圖와 分派圖 )》를 종합하면
 
기원전 BC 삼한,신라이래 모든 최씨는《삼한 6부대부족장》《신라개국주체》《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사량부(沙梁郡) 》의  삼한시대 6부 대부족장 최소벌도리공(崔蘇伐都利公)과 《신라 대표 지성 / 대유학자》《신라 3천재;최치원,최언위,최승우》《한문학의 시조》 중시조 문창후 최치원 상하대를 중심축《中心軸》으로 하는 삼한,신라 최씨가문의 후예가 된다는 데에는 이론이 없다.
 
삼한경주최씨가문은 한국최씨가문의 대종가(大宗家)이며,기원전 BC, 삼한6부 대부족장 최소벌도리공 후예의 대종(大宗)이다 [신라대표지성 엘리트가문] [신라 3최]의  종형(宗兄)이며  한문학의 종주(宗主)인 신라 3천재 문창후 최치원 선조는 한민족 최고의 한문학의 조종(祖宗)으로서 절세의 명문장가로 알려져 있으며, 한시문집으로 《계원필경(桂苑筆耕)》(20권) 등의 명저를 남겼다.

삼한 6부 대부족장 후예이며 신라개국 주체 세력인 삼한경주최씨가문 엘리트들은 당시 세계초강국 중국 당(唐)나라에 수십명이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특히 최치원,최언위,최승우 [신라3최]를 비롯한 최씨가문 수백여명의 천재엘리트들은 당시 세계초강국 중국에 까지 천재성과 우수성을 알리고
[신라 최고 대표 지성인 가문]으로서 신라의 명예를 세계에 드높였다.

고려 왕건의 고려건국에 많은 인재가 공헌하며하며 고려 최고  5대 권문세족, 문벌귀족에 들어 갔으며[신라3천재] 최치원계를 비롯한 최승우계,최언위계,최량계,최승로계 등이 고려 500년 최고 명문 가문 의 위상과 명예를 떨쳤다. 

성종 때의 승로(承老:수문하시중), 현종 때의 항(沆:평장사), 충숙왕 때의 해(瀣), 명종 때의 여해(汝諧),
최 충,최충헌,최 영,등등 수백명의 천재엘리트들이 고려 500년을 최고 명문거족으로 활약하며
고려말기에는 중국,한반도 380여군데에 집성촌을 이룰 정도로 번성 번창하였다.
 
한민족 5천년 역사의 원류인 삼한 경주 최씨 가문에 대한 고려 ,조선의 6왕들의 전교내용과 예우를 보면 한민족 역사 3천년 삼한시대이래 한국 최고의 전통 명문 천재 엘리트 가문의 위상을 알수 있다

1]통일신라의 앞날을 개탄했던  문창후 최치원 선조는 고려 태조 왕건의 고려건국을 [계림은 누른잎과 같고, 송도는 푸른 소나무와 같다.]고 말하여 신흥국가 틀로 융성하리라는 예시(豫示)를 왕건(王建)에게 보냈으며,

2]문창후 최치원의 자손들과 문하생들도 고려 개국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출사하여 벼슬을 지냈으므로 고려 현종(顯宗)은 [최치원이 고려 창업에 은밀한 공이 있다]하며 내사령(內史令)에 증직하고
문창후(文昌侯)로 증시(贈諡)하였다

3]조선의 인조(仁祖) / 명종(明宗) / 선조(宣祖) 3 왕은 [문창후 최치원은 우리 동방의이학시조(理學始祖)이니 그의 자손은 귀천이나 적서를 막론하고 비록 먼시골에 사는 사람까지라도 군역(軍役)에 동원하지 말라]고 전교(傳敎)하였고.

4]정종은 “태강(서원을 도퇴시킴. 즉 파면)의 예에 넣지 말고 이를 위반하는 수령은 처벌하라”고 전교하였다.
 
삼한경주최씨가문 외손(外孫)인 태조 이성계의 이씨조선 500년 왕가 왕손과 신사임당과 이율곡 가문,조선 영의정 대학자 이항복가문,조선 개국공신 영의정 정도전 가문 등등의 명가 명손들은 삼한경주최씨가문의 외가쪽 후손및 친,인척 혈통이고
 
최무선,최익현,최제우,최시형,10대진사 12만석 경주최부자등의
조선실록 500여명의 기라성같은 명가명손 인물들이 대를 이어 나오고 있다.
 
삼한,신라,통일신라.고려,조선,근현대의 5000년 한민족사에 삼국사기,삼국유사,삼국사절요,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실록등등 모든 한국역사 실록에 기록으로 전하는 삼한경주최씨가문의 역사는 한국최고의 명문거족으로
 
한민족 5천년 위대한 역사에서 한민족의 운명과 한민족 국가의 존립을 같이 해온 한민족사(韓民族史) 자체이며 단군이래 살아온 배달민족의 살아있는 정신과 발자취의 源流이다
 
삼한경주최씨가문의 대종가인 경주최씨의 세계(世系)는 원시조 소벌도리와 중시조 문창후 최치원 상하대의 시조로 연결되는 26파로 나뉘어지며,
 
그 중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광정공파(匡靖公派)•정랑공파(正郞公派)•사성공파(司成公派)
•화숙공파(和淑公派)•충렬공파(忠烈公派) 등 6대파가 주축을 이룬다.
 
19세기경부터는 중국,러시아,한반도 약 160여군데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으며 남한 2백2십만명,
북한포함 3백 5십여만명,전 세계 4~5백여만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민족 5천년 역사를 살아온 삼한시대 경주태동 한국최씨는 삼한/ 신라/ 통일신라/ 고려 /조선/근,현대의 최고 명문거족 전통을 이어 나오면서 원시조 기준 2,100여년 동안 127여본의 79여세(世)[77~81여세(世)]의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 보면 총 20만 4154가구에 인구 119만 2662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4위였으며, 1985년도 조사에서도 가구수 45만 4696가구, 191만 3322명으로 전국 274성 중 역시 제4위였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216만 9704명, 가구수 67만 6773가구, 286성 중 제4위로 전체인구의 4.7%를 차지한다.

<정통 역사서=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원/네이버백과/엔사이버백과/
두산백과사전 /브래타니커백과/ 경주최씨중앙종친회/정통역사서(삼국사기,삼국유사,중고 교과서)등
최근 업데이타 자료 참고 발췌>
<정통 성보학서=한국인의 족보(삼안)/한국인의 족보(일신각)/한국인의 성보(민중서관)/성씨의고향(중앙일보)]/ 서울대출판부, 조선일보 성씨와 족보등 최근 업데이타 자료 참고 발췌>
 
※ 고딕체는 요약시 꼭 들어가야 하는 KEY-WORD가 포함된 문장이니
   KEY-WORD를 꼭 넣어서 문장을 줄여야 합니다
 

[2] 경주최씨 (慶州崔氏)

경주최씨 (慶州崔氏)
       
삼한진한시대 신라경주에서 태동한 경주최씨(慶州崔氏) 원조는 삼한시대 진한(辰韓) 사로(斯盧) 6촌의 하나인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沙梁郡)의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로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경주 남산기슭 나정에서 혁거세를 발견하여 13세 까지 양육시켜 6부족회의 합의로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 건국을 주도한 신라 건국주체 원훈세력이다.
 
신라개국과 왕추대의 은공으로 개국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돌산고허촌 사량부 (突山高墟村 沙梁郡)  대인(大人)이 되었다 서기 516년(법흥왕 3)에 충선공(忠宣公)으로 시호(諡號)되었고, 658년(무열왕 3)에 문열왕(文烈王)에 추봉되었다.서기 32년(유리왕 9)에 6부로 개편시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이 사량부(沙梁部)로 개칭되면서 최씨라는 성을 하사 받았다.
 
《삼국유사》에 보면 6부(部) 촌장들은 모두 천강인(天降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6촌/6부에 6성(李•崔•孫•鄭•裵•薛)을 각각 사성(賜姓)한 것이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소벌도리를 소벌공(蘇伐公)이라 하였으며 나정 곁에서 혁거세를 발견한 것이 소벌공, 곧 소벌도리였다고 하며, 그는 혁거세를 집에 데리고 와서 13여세가 될 때까지 양육하여. 소벌도리 등 5촌장 이른바 원시 신라를 지배하던. 6부 대부족장들이 모여서 왕 [혁거세] 와 왕비 [알령]을 선정 추대하여 신라를 개국하였다,
 
오늘날 많은 한국 최씨의 관향(貫鄕)과 분파는 원시조 최소벌도리공을 원시조로 하고 문창후 최치원을 중시조로 연결하는 중심축(中心軸) 삼한 경주최씨 대종(大宗)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창성 2천1백년 동조동근(同祖同根)의 세월과 남한 2천 2백여만명 삼한최씨(三韓崔氏) 명문거족(名門巨族)의 전모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60여가문이 그 선대 세계(世系) 및 분파 연원을 《경주최씨상계세보(慶州崔氏上系世譜)》를 통해
정통세보를 체계화하고 최근까지 가문별로 수십차례 수정 보완하여 가문별로 정통족보로 완성하여
보유,계승하고 있는《가문별최씨상계세보(家門別崔氏上系世譜) 》를 통해 상계와 분파를 연원할 수 있다.
 
삼한 신라 6부 대부족장 소벌도리 후예이며 한국최씨가문의 대종(大宗)인 경주최씨는
신라의 천재 석학 문창후 최치원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그는 한문학의 조종(祖宗)으로서 절세의 명문으로 알려져 있고,

한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신라이래1200년간 20여개의 영정이 그려진 위인이며
孤雲 崔致遠先生을 모신 국내,외 30여개 書院·.影堂.·祠宇 와 전국 72여개 유적지에서
매년 국가 종묘사직 주관의 향사가 올려져 오며 추앙받아온 한민족 최초의 [한문학의 宗主]이다
구한시문집으로 《계원필경(桂苑筆耕)》(20권) 등의 명저를 남겼다.
 
경주최씨는 삼한 대부족장 가문,신라 대표지성 가문으로 명성을 떨쳤고,
신라 대표지성 [신라 3최] [신라 3천재] 치원•승우(承祐)•언위(彦撝) 등 3인이
똑같이 당(唐)나라에 유학,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와 문명(文名)을 날려 '일대삼최(一代三崔)'라 불렸고
삼한경주최씨가문의 30여명의 최씨 천재엘리트들이 신라,통일신라의 유학자/대학자/관료/문장가로서 활약하였다
 
고려 성종 때의 승로(承老:수문하시중), 현종 때의 항(沆:평장사), 충숙왕 때의 해(瀣), 명종 때의 여해(汝諧) 등 을 포함하여 통일신라, 고려 초기에 300여명의 최씨 천재엘리트들이 각 분야의 문벌귀족 권문세족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신라말 고려초 신라 대표지성 가문의 천재엘리트 600여명 최씨 천재엘리트들의 활약으로 고려건국주체 5대 문벌귀족 권문세족[경주최씨/해주최씨/수원최씨 등]으로 고려 500년간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태조왕건 23년 940년 신왕조 지배세력 중추적 역활을 한 삼한경주최씨 후예 12 가문은-
1) 경상도/ 경주 崔氏 / 최치원계 2) 경상도/ 경주 崔氏 / 최언위계 3) 경상도/경주 崔氏/최승우계 4) 경상도/경주 崔氏/최   량계 5) 경상도/경주 崔氏/최승로계6) 황해도/해주 崔氏  7) 경기도/수원 崔氏  8) 경기도/철원 崔氏  9) 경기도/양천 崔氏(김포)  10) 충청도/충주 崔氏 11) 강원도/강릉 崔氏 12) 전라도/영암 崔氏 -- 등이다
 
삼한,신라•고려시대에 최고의 명망을 높이고 권세를 누렸던 삼한시대이래 명가명손 최씨들은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삼한 전통 엘리트 명문가의 체통을 지키면서 당파분쟁,정치반정을 멀리하고 학문과 지성의 정통 명문의 위상을 지키며 상신 7명, 대제학(大提學) 4명, 문과급제자 437명을 배출하였고 이조 중앙정치에서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는 문과 이과중 이공계통에서는 전주이씨 가문과 함께 조선 최고의 많은 합격자를 배출하여 삼한,신라,고려이래 [신라 대표 지성인 가문]답게 신라 3천재 천재엘리트 후손의 명예와 전통을 이어 나같다

경주최씨의 세계(世系)는 최치원을 시조로 26파로 나뉘는데,
그 중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광정공파(匡靖公派)•정랑공파(正郞公派)•사성공파(司成公派)•화숙공파(和淑公派)•충렬공파(忠烈公派) 등 6대파가 주축을 이룬다.
 
이들 6파 가운데서 역사적 인물을 보면, 사성공(司成公) 눌(汭)의 후손인 제우(濟愚)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동학(東學)의 창시자로 유명하며, 동학의 제2대 교주가 된 시형(時亨)은 종수(宗秀)의 아들이다.
그리고 한말의 거유(巨儒)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단식으로 일생을 마친 익현(益鉉)이 있다
.
경주시 교동(校洞)에는 '경주최부자'로 이름난 준(浚)의 집이 있는데 이 경주 최부잣집은 12대 만석(萬石), 10대 진사(進士)'로 유명하다. 애국독립운동선도/언론문화창달사업/민족교육계몽사업등에
名家의 모든 재산을 국가와 민족의 독립과 안녕을 위한 대의명분으로 아낌없이 희사함으로서
한민족 Noblesse oblige 정신의 밀알로 귀감이 되었다

삼한진한 6부 대부족장 최소벌도리공 원시조 기준으로  BC100년~ 2,100여년동안
한민족 5천년 역사에서 79여세(世)[77~81여세(世)]의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다.
 
한국성씨 286성 중 제4위로 전체인구의 4.7%를 차지하고 2000년 국세조사에서
인구수는 216만 9704명이고, 가구수는 67만 6773가구이다.
 
한국최씨[127본]의 본관별 가구수와 인구수는 - 경주 강릉 탐진 수성 삭녕 화순 초계 영천
강화 낭주 충주 월성 해주 수원 동주 전주 흥해등 - 17개 본관이 63만(93%)가구수에
2백만명(93%)인구수 이다

<정통 역사서=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원/네이버백과/엔사이버백과/
두산백과사전 /브래타니커백과/ 경주최씨중앙종친회/정통역사서(삼국사기,삼국유사,중고 교과서)등
최근 업데이타 자료 참고 발췌>
<정통 성보학서=한국인의 족보(삼안)/한국인의 족보(일신각)/한국인의 성보(민중서관)/성씨의고향(중앙일보)]/ 서울대출판부, 조선일보 성씨와 족보등 최근 업데이타 자료 참고 발췌>
 
※ 고딕체는 요약시 꼭 들어가야 하는 KEY-WORD가 포함된 문장이니
   KEY-WORD를 꼭 넣어서 문장을 줄여야 합니다

※ [최와 경주 최씨]를 동시에 기록할 때는 중복되는 절은 생략해도 됩니다
   KEY-WORD를 꼭 넣어서 문장을 줄여야 합니다

 

 

 ==========================================================================

 

다음 / 위키백과 - 유해정보 / 유언비어 살포 수정 삭제 방법

 

대표적인 허위내용 살포 사례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436628

 

다음 위키백과는 아무나 글을 올려 백과사전을 만드는 것이라 하나 고의적 악의적 허위 정보를 도배를 해놓을시 <정책과 규칙> <관리자의 일방적 방해 ><평범한 자료 저작권 침해 방해><다음/위키백과의 최(성씨)에 관한 광범위한 거짖정보 살포>등등의 이유로 인터넷 유언비어 살포 정정 삭제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선의의 사용자가 불리한 것이 많으니 유의하시고 꼭 허위정보를 삭제 정정 하려는 사회정의차원에서 의지와 끈기를 발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다음 권리침해 유해정보 신고센타

 

1)다음 초기화면 우측 맨아래에 고객센타 클릭 http://www.daum.net/ -
2)좌측 맨위의 신고하기 클릭 http://cs.daum.net/?t__nil_footer=cs -
3)상단청색라인[신고하기] 클릭 https://cs.daum.net/redbell/top.html -
  권리침해신고[명예훼손] / 유해정보신고에 항의글 올리고 삭제요청

※상단 청색라인 우측 [내문의 내역] 클릭하여 [신고및 처리]결과 계속 확인

 

※ 다음 위키백과 유해정보 / 유언비어 살포 정정 삭제 절차

 

1)다음 전체 검색에서 [최씨]를 치고 클릭-
2)최(성씨)클릭-원문보기 클릭
3)위키백과에서 로그인 계정만들기에서 계정을 만들고
http://ko.wikipedia.org/wiki/%EC%B5%9C_(%EC%84%B1%EC%94%A8)
4) 최와 경주최씨 편집으로 자료를 토론하여 수정 삭제합니다

[공지사항] 최[崔] & 경주최씨 (慶州崔氏) 정전(正展)| ☜ 경주최씨 게시판 ☞

http://cafe.daum.net/householdchoi/IP5/1827(전 주소에서 옮긴이- 도천 최평열)

 

최[崔] & 경주최씨 (慶州崔氏) 정전(正展)

 

=================================================================

 

 


최[崔]

 


삼한시대/신라사로의 6촌(村) 6부(部) 중의 하나인 돌산고허촌,사량부(突山高墟村,沙梁郡)의 대부족장 소벌도리(蘇伐都利)는 최씨의 원조로서《삼국사기》와《삼국유사》의 기록과 같이 6部/6姓 (李•崔•孫•鄭•裵•薛)과 같이 천강인(天降人)으로 경주 남산기슭 나정에서 혁거세를 발견하여 13세 까지 양육시켜 6부족회의 합의로 왕으로 추대한 신라 개국원훈(開國元勳)이다. 《경주 양산재 》에서는 매년 가을 신라시대 6부 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삼한 6부 대부족장들의 개국원훈에 감은하는 제사 [양산재 신라대제]를 봉행한다 최소벌공은 법흥왕 3년 서기 516년에 사량부(沙梁部) 대인(大人) 에서 충선공(忠宣公)으로 시호(諡號)되었고, 658년(무열왕 3)에 문열왕(文烈王)에 추봉되었다 BC 삼한,신라 기원 최씨들은 문열왕 최소벌도리공(崔蘇伐都利公)과《한문학의 시조》 문창후 최치원 상하대를 중심축《中心軸》으로 하는 삼한,신라 최씨가문의 후예이다. 한국최씨의 대종인 경주최씨가문은 [신라3최] 최치원,최언위,최승우 천재엘리트들을 필두로 당시 세계초강국 중국에 유학하여 천재성과 우수성을 알리고 [신라 최고 대표 지성인 가문]으로서 신라의 명예를 세계에 드높였다.고려건국의 주체세력으로 고려 최고 5대 권문세족, 문벌귀족으로 활동했고 고려 ,조선의 6왕들의 최씨가문 예우에 대한 전교내용을 보면 한민족 삼한역사이래 최고의 정통 명문 엘리트 가문임을 알수 있다 조선실록 명가인물과 근,현대 위인들을 포함 삼한시대이후 근,현대까지 각 시대별로 숱한 •지도자 •명신•학자• 문인•충신• 관료들을 배출한 45여본 127여파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한민족 원류 성씨이며 원시조 기준 2,100여년 동안 79여세(世) 대종(大宗)을 이루고 286성중 4위로 남한인구 2백2십만/전체인구 4.7%를 차지하는 한민족 최고의 전통적 명문거족이다.

 


===================================================================


 

경주최씨 (慶州崔氏)

 


삼한진한시대 신라경주에서 태동한 경주최씨(慶州崔氏) 원조는《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진한(辰韓) 사로(斯盧) 6촌의 하나인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沙梁郡)의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삼국유사》의 천강인(天降人)인 최소벌공은 신라개국과 왕추대의 은공으로 개국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다, 신라 6부 대부족장최소벌도리공을 원조로 하는 경주최씨 대종(大宗)은 한문학 종주 문창후 최치원[신라1대3최]을 중심축(中心軸)으로 하여 신라대표 지성가문으로 명성을 떨쳤고 고려5대 문벌귀족으로 최치원계 최언위계 최승우계 최승로계 최 량계등이 신라•고려시대의 명문 전통을 이어며 최고의 명망과 권세를 누렸다 조선실록의 명가명손들과 근,현대 천재엘리트가문 최씨들은 삼한 정통 엘리트 명문가의 체통을 지키면서 당파분쟁, 정치반정을 멀리하고 학문과 득도의 인본(人本)에 충실하며 상신 7명, 대제학(大提學) 4명, 문과급제자 437명을 배출하는데 기여하였고 문과,이과 과거중 중앙정치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이공계통에서는 전주이씨 가문과 함께 조선 최고의 많은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근,현대에도 명가 최씨 천재엘리트들이 눈부신 활약을 하였으며 그중경주 교동(校洞)의 '경주최부자'는 12대 만석(萬石), 10대 진사(進士)'로 유명한데 애국독립운동선도/언론문화창달사업/민족교육계몽사업등에 名家의 모든 재산을 국가와 민족의 독립과 안녕을 위한 대의명분으로 아낌없이 희사함으로서 한민족 Noblesse oblige 정신의 밀알로 귀감이 되었다 6대파 중심 26개파로 BC100여년부터 2,100여년동안 한민족 역사에서 79여세(世)의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다. 삼한시대 최씨의 본관별 가구수와 인구수는-경주 수원 강릉 탐진 강화 삭녕 월성 초계 영천 낭주 해주 화순 충주 수성 동주 전주 흥해등-17개 본관이 63만(93%)가구에 2백만명(93%)이다 한민족 원류 삼한시대 기원 정통 삼한갑족이다


========================================================

 
 ※다음 / 위키백과 - 유해정보 / 유언비어 살포

 

대표적인 허위내용 살포 사례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436628

 

다음 위키백과는 아무나 글을 올려 백과사전을 만드는 것이라 하나
고의적 악의적 허위 정보를 도배를 해놓을시 <정책과 규칙> <관리자의 일방적 방해 >
<평범한 자료 저작권 침해 방해><다음/위키백과의 최(성씨)에 관한 광범위한 거짖정보 살포>
등등의 이유로 인터넷 유언비어 살포 정정 삭제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선의의 사용자가 불리한 것이 많으니 유의하시고 꼭 허위정보를 삭제 정정 하려는
사회정의차원에서 의지와 끈기를 발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다음 권리침해 유해정보 신고센타

 

1)다음 초기화면 우측 맨아래에 고객센타 클릭 http://www.daum.net/ -
2)좌측 맨위의 신고하기 클릭 http://cs.daum.net/?t__nil_footer=cs -
3)상단청색라인[신고하기] 클릭 https://cs.daum.net/redbell/top.html -
  권리침해신고[명예훼손] / 유해정보신고에 항의글 올리고 삭제요청
※상단 청색라인 우측 [내문의 내역] 클릭하여 [신고및 처리]결과 계속 확인

 

※ 다음 위키백과 유해정보 / 유언비어 살포 정정 삭제 절차

 

1)다음 전체 검색에서 [최씨]를 치고 클릭-
2)최(성씨)클릭-원문보기 클릭
3)위키백과에서 로그인 계정만들기에서 계정을 만들고
http://ko.wikipedia.org/wiki/%EC%B5%9C_(%EC%84%B1%EC%94%A8)
4) 최와 경주최씨 편집으로 자료를 토론하여 수정 삭제합니다

[공지사항] 다음과 위키백과의 [최와 경주최씨] 허위정보 유언비어 살포 방치 방관 행위| ☜ 경주최씨 게시판 ☞

 

http://cafe.daum.net/householdchoi/IP5/1825(전 주소에서 옮긴이---도천 최평열)

 

[1] 다음과 위키백과사전에 2010년 5월 최근에 계획적으로 일반인 불순 적색 분자

[전주최씨 최아계 최00]가 올려놓은 100% 거짖의 황당한 허위내용과 허위주장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436628#.EA.B2.BD.EC.A3.BC_.EC.B5.9C.EC.94.A8

 

[최(崔)씨]

최(崔)씨는 한국 성씨 순위 4위 216만명이다. 한국의 최씨는 신라계, 중국 귀화계, 호족계로 나뉜다. 경주 최씨는 중시조 최치원은 857년에 신라에서 태어났다. 중국 귀화계 충주 최씨의 시조 최우(최승)은, 847년에 신라에 동래한 인물이다. 호족계는 신라-고려 전환기에 창본되었고, 일부 본관은 고려 태조가 사성하여 최씨가 되었다는 연원이 있다. 고려 태조는 각 지역의 호족들에게 한식 성씨 사용을 장려하였다. 낭주, 해주 최씨는 호족계로 인식되는 성본으로, 고려 태조가 성, 또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연원이 있다.

최(崔)씨는 중국 성씨 순위 58위 400만명이다. 중국에는 여러 최씨가 존재하는데, 한국에 알려진 최씨는 산동성에 위치한 청하 최씨가 있다. 충주 최씨는 청하 최씨에 연원을 두는 성본이며, 고려와 조선 시대에 전주 최씨을 청하 최씨라는 별칭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청하 최씨는 중국 한나라 시대 부터 존재하였던 성본으로, 후한 때 최염이 조조을 반대하다가, 자결 명령을 받았다. 청하 최씨는 북위 때 선비족 8성에 대응하는 한족 4성에 하나였는데, 최호가 북위 선비족 조상들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을 국사에 기록한 일로, 숙청되면서 시련을 겪었다. 최우(최승)는 당나라 병마사로 내임하여 반란을 토평하고 신라에 정착하였다.

 

[경주 최씨]

경주 최씨의 연원은, 삼국사기 신라 개국 설화에 따르면, 돌산고허촌 촌장인 소벌도리이다. 고대 신라 이후 경주 최씨의 시조는 신라 후기의 학자 최치원(崔致遠, 857~?)이다. 고대 신라에서는 한식 성씨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나라와 인적 교류가 활발하였던 7세기 중엽 이후에, 한식 성씨 가운데 최씨을 성으로 정하였다고 이해되며, 이후 신라-고려 전환기에 경주 최씨로 창성되었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경주 최씨의 세거지와 분파는 한국 최씨 성본 가운데 가장 많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에는 대부분 경주로 합본하였다. 2000년 인구 통계에 따르면, 경주 최씨의 인구수는 한국 최씨의 절반 정도을 차치한다.

상기 줄친부분은 정통기록(정통역사서/정통성보학서) 에 한줄도 없는 완전 사기조작 허위주장입니다 [최와 경주최씨] 관련기록을 적색 불순분자[전주최씨 최아계 최00]가 수년간 계획적으로 축소,왜곡하고 한국 최씨 종친들이 이간 분열하도록 선동하는 유언비어를 살포하여 왔으나 설마하고 체면과 체통을 지키는 사이 허위 적색 허위 정보로 도배를 하게 되었읍니다 한국 삼한최씨 대종가 경주최씨가문 종친회및 족보발행관련인들은 지금까지는 수수방관 방치하였으나 지금부터라도 인터넷 정보통신시대에 유해정보 패륜 행위에 의해 가문의 명예와 전통에 엄청난 피해를 볼수있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최소한 종친회 사이트에 기록된 [최와 경주최씨] 관련기록 정보까지라도 바로 정정 삭제될수 있도록 정식공문으로 수정요청을 하고 향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대책 수립과 다양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3] 다음과 위키백과의 허위정보 유언비어 살포

아래 내용은 다음과 위키백과의 유언비어 살포에 대해 담당자에게 유감을 표했으나 적색불순분자가 최씨 관련 허위내용을 인터넷에 마음데로 실어 놓아도 수정을 하려면 다음과 위키백과의 복잡하고 어려운 정책과 규정에 따라야만 정정 삭제가 가능하다 하여 1차적으로 토론란에 정정 삭제 토론을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종친 여러분들은 이런 해괴한 사태를 직시하고 다음과 위키백과의 허위정보 유언비어 살포에 엄중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

 

[다음/위키백과 허위 유해정보 명예훼손 처리 담당]

 

000씨

친절히 다른 방법까지 설명해 주셔서 고맙읍니다

인터넷 일반인으로서 정책과 규정등등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지만

아래와 같이 최선의 노력으로

허위내용과 허위주장을 정정삭제하려하니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다음 위키의 윤리적 도덕적 기업경영에

기대도 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 아 래 ===============

 

※ 한국 최씨의 정통성씨정보[정통역사서/정통성보학서]외의

근거없는 허위주장에 대해 정정 요청합니다

 

※ 다음 위키 백과의 최씨관련 17건는 거의가 허위 백과 내용으로

편집이 불가능하여 토론에 올립니다

 

※ 하단 정통성씨정보[정통역사서/정통성보학서]사이트내용 참고하여

정정 요청합니다

 

1] 최씨에 한국최씨와 중국최씨가 있고 신라,중국,호족계 3개최씨가 있다는

유언비어는 2010년 5월부터 아무런 근거와 사료가 없이 허위 주장하는 말입니다

-- 한국의 최씨는 삼한시대 신라경주 태동 경주최씨가 역사상 유일하며,

왕이 사성한 성씨 2개의 이주성씨 충주최씨/수성최씨가 있습니다

 

2] 고대 신라에서는 한식 성씨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나라와 인적 교류가 활발하였던 7세기 중엽 이후에, 한식 성씨 가운데 최씨을 성으로 정하였다고 이해되며, 이후 신라-고려 전환기에 경주 최씨로 창성되었다

-- 2010 5월 다음 위키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음해성 허위 내용입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삼한시대부터 경주최씨 역사가 BC57이전 삼한 소벌도리부족원-

AC32(신라 유리왕 9) 돌산고허촌崔氏-사량부崔氏-신라왕경崔氏 역사로 기록되어 있읍니다

《삼국유사》에 보면 6부(部) 촌장들은 모두 천강인(天降人)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 6촌/6부에

6성(李•崔•孫•鄭•裵•薛)을 각각 사성(賜姓)한 것이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의 일로 기록되어 있읍니다.

현재 경주 남산기슭에는 육촌 6부구역/선도산/ 돌산고허촌/ 형산/알령교/ 고허산성/상서장/등의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의 지명과 사적이 그대로 남아 있읍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고려사 등에

원삼국[고조선,부여,삼한] 삼국[고구려,백제,신라] 삼한 신라시대 역사와 정통 역사서 정통성보학서

중고 교과서 내용되로 삼한,신라시대이래 경주 최씨들의 역사 기록들이 삼한시대-사로-돌산고허촌-

사량부-신라인-통일신라인 최씨들의 역사로 1000년 동안 전해 오고 있습니다.

 

3] 전주최씨3파는 중국 산동성에서 온 신원불상 시기불상 중국인이 조상이고

고려 조선때 청하최씨라는 별칭이 있었다 라고 하는데 정통역사서 어디에도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2010년 5월 다음 위키에서 최근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허위 주장입니다

 

4] 중국의 청하최씨/한국의 청하최씨라는 본관은 중국과 한국 정통성씨정보[정통역사서/정통성보학서] 어디에도 없습니다

2010년 5월 다음 위키 백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허위 내용입니다

 

5] 충주최씨도 한국의 원래 시조[고위관료;최승]외의

여러 중국최씨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읍니다 충주최씨들도 인용하지 않는 미확인 중국 여러 최씨 선조를 가짜로 청하최씨 종친이라고 연결하고 있습니다 2010년 5월부터 아무런 근거와 사료가 없이 허위 주장하는 말입니다

 

6] 신라말 낭주최씨와 고려 해주 최씨는 조상의 근원이 신원불상 시대불상인 호족계열이라고 분류하고 기록에 전혀 없는 왕이 성을 사성했다고 허위주장하는데 전혀 근거없는 주장으로 2010년 최근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허위 주장입니다

 

7] "고려 조선조에 전주최씨를 청하최씨라고도 불렀다 한다" - 전혀 근거없는 사기입니다

 

8] 정통역사서나 정통성보학서에 없는 주장으로 일관 하며 확실한 인용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설이 있다’ ‘~연원이 있다’ ‘~라고 전한다’ 라는 문장은 증거가 없는 허위사실을 궁색하게 변명하기 위하여 적당하게 책임을 회피하는 위장 어귀로 백과사전에서는 부적합한 용어입니다 근거를 가지고 전체 오류를 정정하여 주시길 요청합니다

 

※정통역사서나 정통성보학에 근거한 공신력있는 참고사이트 내용을 별첨하니

잘못된 주장을 확인하여 정정 삭제해 주시길 요청합니다

 

참고 1]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역사인물종합검색시스템

-경주최씨/낭주최씨/해주최씨

http://koreandb.nate.com/history/namebon/name?firstname=c

http://koreandb.nate.com/history/namebon/detail?sn=536

http://koreandb.nate.com/history/namebon/detail?sn=541

http://koreandb.nate.com/history/namebon/detail?sn=563

 

참고 2] 네이버백과-최/경주최씨/해주최씨

http://100.naver.com/100.nhn?docid=147691

http://100.naver.com/100.nhn?docid=147691

http://100.naver.com/100.nhn?docid=774390

 

참고 3] 경주최씨중앙종친회- 최씨/경주최씨

[http://www.choichiwon.com/?_page=13]

http://www.choichiwon.com/?_page=23

http://www.choichiwon.com/?_page=22

 

참고 4] 네이버-최/경주최씨

http://100.naver.com/100.nhn?docid=147691

http://100.naver.com/100.nhn?docid=774387

 

참고 5] 브래테니카 -최/경주최씨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0c3154a

 

참고 6] 기타 최씨관련자료집 1

정통 역사서=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원/네이버백과/엔사이버백과/두산백과사전 /브래타니커백과/ 경주최씨중앙종친회/정통역사서(삼국사기,삼국유사,중고 교과서)등 참고

 

참고 7] 기타 최씨관련자료집 2

정통 성보학서= 한국인의 족보(삼안)/한국인의 족보(일신각)/한국인의 성보(민중서관)/성씨의고향(중앙일보)/ 서울대출판사,조선일보=성씨와 족보 등 참고

 

감사합니다

 

 

[2]정보지식시대의 인터넷상 종친회자료 관리의 시스템화 필요성-문제점과 대책

 

1] 현재 인터넷 유해정보 문제점

 

1.한국학,국가학술,공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역사인물종합정보시스템]과

인터넷포탈[다음/네이버]과 그 안의 백과사전, 일반인이 만들고 가장 많은 거짖이

유포되는 [다음-위키백과]등에 거짖자료와 허위주장이 유언비어로 광범위하게

무한정 살포되고 있는데 대부분 종친회는 무관심으로 일관 방치한다

 

2.최와 경주최씨에 대한 기술이 대부분 이미지가 훼손되어 왜곡 축소되고 있으며

허위사실 기재와 허위 주장 내용도 장기간 방치되고 있다. 더욱이 가짜 중국최씨를 만들어

한국최씨와 이간 분열시키려는 반골 적색분자의 수년간 동안 자행한 집요한 음해와 험집내기 허위주장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화근이 내재되어 있다

 

3.종친회는 종친자료와 함께 인터넷 정보 기록도 관리해야 하나

현실적으로 인원과 학술자료와 인터넷 운용기술미비등으로

인터넷 허위정보 살포를 적발 정정 또는 삭제 시키는 시스템이 거의 없다

 

4.종친회가 자신의 본관 선조와 가문에 대해 허위정보를 유포하여 선조를 욕 보이고

후손을 폄하하는 패륜행위을 저지르는 범법자들에게 비현실적으로 무관심하고

비합리적으로 언쟁을 회피하여 화근를 키우는 경향이 있다

 

5.종친회 명의 정식공문으로 거짖정보유포 회사나 기관에 오류수정과 정정삭제 사과문 게제를 요구함은 어렵지 않는 일이나 종친회 사무실의 직원들도 심각한 상황이 남무해도

아무도 조치를 하지 않고 침묵으로 묻어두고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2] 정보 관리를 위한 합리적 방안

 

1.종친회에 공식기구로 [인터넷정보지식위원회]를 만들어

학술정보연구/ 정보기록관리/ 홍보공보강화/ 유해정보삭제/ 명예훼손법적조치

등의 인터넷 종친회 정보관리의 기본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2.최와 경주최씨 검색시 화면에 나타나는 모든 허위 오류 자료는 년중으로 수정 삭제 감독되어야 하며 명가명손의 이미지제고에 위협이 될시 전담 변호사가 법적조치를 할수 있는 시스템과 조직을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3.먼저 경주 최씨 종친회 소속 사이트[10여개] 자료가 기본내용을 충실히 정리하여

인테넷정보검색에 기술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 다음 단계로 한국학정부기관과 인터넷포탈.토론성 백과사전이나 묻고$답하기등의 외부 인터넷 정보기술을 정비하는게 바른 순서와 절차이다 따라서 바로 학술회의를 만들어 최와 경주최씨의 핵심 기본 단어와 내용 인물이 들어 가도록 정비하여 정전을 만들고 중요한 자료들을 추가 보완하여야 한다

 

4. [인터넷정보지식위원회]는 정기이사회시 인터넷정보지식위원회의 종친회 정보관리에 대해서 정기보고를 하며 수년간 최와 경주최씨 45개 타본관을 이간 분열 왜곡 음해하는 적색 불순분자에 대해서는 향후 최와 경주최씨 명예와 체통을 위해 상응한 법적조치로 엄벌 하여 또 다른 유언비어 살포 재발을 방지 하여야 한다

 

5.5년여전부터 [최와 경주최씨] 관련기록을 적색 불순분자 [전주최씨 최아계 최00]가 수년간 계획적으로 사이트에 침입, 월권으로 마음되로 축소,왜곡하고 한국최씨/중국최씨/청하최씨등의 허위조작으로 가문의 명예를 훼손하고 한국 최씨 종친들이 이간 분열하도록 편가르기 선동하는 악성 유언비어를 살포하여 왔으나 이제는 유언비어를 초기부터 퇴치하는 방법과 대책을 수립 이런 불상사에 대비하여야 한다

 

6.최와 경주최씨의 삼한시대,신라,통일신라.고려초기에 관한 자료는 한국최씨중 유일화게 대종에서 전담하여 학술정보화 해야 하고 인터넷 정보기록화 하여야 함으로 고운학술문화연구회가 주관하여 [한국최씨가문 정전]책자를 년보로 발행 업그레이드하는 장기적인 안목도 필요하다

 

[3] 다음 / 위키백과 - 유해정보 / 유언비어 살포

 

대표적인 허위내용 살포 사례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436628

 

다음 위키백과는 아무나 글을 올려 백과사전을 만드는 것이라 하나 고의적 악의적 허위 정보를 도배를 해놓을시 <정책과 규칙> <관리자의 일방적 방해 ><평범한 자료 저작권 침해 방해><다음/위키백과의 최(성씨)에 관한 광범위한 거짖정보 살포>등등의 이유로 인터넷 유언비어 살포 정정 삭제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선의의 사용자가 불리한 것이 많으니 유의하시고 꼭 허위정보를 삭제 정정 하려는 사회정의차원에서 의지와 끈기를 발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다음 권리침해 유해정보 신고센타

 

1)다음 초기화면 우측 맨아래에 고객센타 클릭 http://www.daum.net/ -
2)좌측 맨위의 신고하기 클릭 http://cs.daum.net/?t__nil_footer=cs -
3)상단청색라인[신고하기] 클릭 https://cs.daum.net/redbell/top.html -
  권리침해신고[명예훼손] / 유해정보신고에 항의글 올리고 삭제요청

※상단 청색라인 우측 [내문의 내역] 클릭하여 [신고및 처리]결과 계속 확인

 

※ 다음 위키백과 유해정보 / 유언비어 살포 정정 삭제 절차

 

1)다음 전체 검색에서 [최씨]를 치고 클릭-
2)최(성씨)클릭-원문보기 클릭
3)위키백과에서 로그인 계정만들기에서 계정을 만들고
http://ko.wikipedia.org/wiki/%EC%B5%9C_(%EC%84%B1%EC%94%A8)
4) 최와 경주최씨 편집으로 자료를 토론하여 수정 삭제합니다

  • 표준규격에 대하여 2
    오늘날 공업국가라 불이워지는 국가치고 표준규격이 없는 나라는 거의 없다. 이와같은 표준화사업을 맡고 있는 당표준국에서는 1962년도에 300종의 규격을 제정공포하였다. 이 중에서 전기부분이 58종이다. 이... 학술지논문 | 대한전기학회 | 최평열
  • 표준규격에 대하여
    학술지논문 | 대한전기학회 | 최평열
 
 
학사당 전경에 대하여~
 
자료소개
신라시대의 학자 고운(孤雲)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곳.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 홍류동 계곡에 소재함. 홍류동 계곡에는 최치원이 글과 바둑을 즐겼다는 농산정,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문창후유적비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음.
 
농산정 전경에 대하여~
 

선덕여왕 조연 중에 알천랑에 대해 궁금합니다.

씨엠과 나는 | 2009-07-29 00:57 | 조회 17884 | 답변 6

Daum 카페 해외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 (http://cafe.daum.net/bsntour)에서 등록된 질문입니다.

실제 인물이었는지 허구의 인물은 아닌지

김 유신과 앞으로의 드라마 전개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궁금하군요

그리고 알천량의 실제이름은 나이는 모두 알려주셔요


  • 유연ㅋㅋ님 09.08.10

    알천이 진짜 유명한 사람은 맞나봐요. 경주에 가면 알천구장이라고 경기장이있던데... 댓글
이 질문에 답변하시면 지식머니 5, 채택시엔 30 을 더 드립니다.
답변하기
질문자, 네티즌 채택

옹잠 솔방울 | 답변 2 | 채택률 100%

활동분야 : 해당 분야가 없습니다.
본인소개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알천공(閼川公 : 577년 진지왕2년~686년 신문왕6년)은 진주소씨 시조다.

 

  결론부터 말하면 실존인물입니다. 드라마에서는 김유신(金臾信)공과 비슷한 동년배로 말을 뜨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김유신공 보다는 18살이 연상이고 훗날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金春秋)공 보다는 27살이 연상입니다. 소경(蘇慶)공과 소알천(蘇閼川)공은 동일인으로 577년 5월 6일에 태어나 686년 10월 12일109세에 작고하였고,  적제(赤帝) 축융(祝融)인 복해(復解)공으로부터 157세손이며, 득성시조 소풍(蘇豊=蘇昆吾)공으로부터 97세손, 후진한을 세운 소백손(蘇伯孫)공의 29세손, 박혁거세를 양육하여 신라를 건국하여 초대왕으로 세운 소벌(蘇伐)공(소벌도리공)의 25세손이 되는 것입니다.

선덕여왕시대와 진덕여왕시대에 대장군과  이찬,  각간 상대등과 화백회의 의장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특히 진덕여왕 승하시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김춘추(태종무열왕)를 왕으로 추대한 분으로 진주소씨(晉州蘇氏)의 시조(始祖)가 됩니다.

이에 태종무열왕은 알천공(경공)이 자신을 왕위에 추대한 공로로 알천공의 24대조인 소벌공을 문열왕(文烈王)으로 추봉하였습니다.

진주소씨 족보인 대동보에 그 증빙문헌이 기록되었고,  알천(閼川)이란 이름은 경(慶)공의 처음 이름입니다.

알천공의 아들인 노흔(老欣)공이 나이가 들도록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있어  걱정이었는데, 알천공의 나이 84세가 되던 해인 661년 알천공의 손자 소복서(蘇福瑞)가 태어나므로 후손이 끊길 뻔했다가 문중의 대를 잇게 되는 경사를 맞으므로써 경사로울 경(慶)자를 써서 소알천(蘇閼川)에서 소경(蘇慶)으로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알천공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진주소씨대동보(족보)에서 발췌하여 아래와 같이 올리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사진은 족보에 기록된 사본과 진주시 상대동 선학산에 있는 알천공 묘소)


 






신라국 각간 상대등(新羅國 角干 上大等) 알천공(閼川公 = 慶公) 유사(遺事)

 

공(公)의 휘(諱)는 경(慶)이요, 초휘(初諱)는 알천(閼川)이고, 진주소씨 시조(晉州蘇氏 始祖) 이다. 공(公)은 단기 2910년(서기 577년) 정유(丁酉) 5월 6일 신라국 제25대 진지왕(眞智王) 2년에 아찬(阿飡) 휘 휴곤(休昆:初諱는 武殷)의 다섯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차남은 조부령(調部令)인 태호(太乎)공이고 삼남은 신라 고승 원광법사(圓光法師)로부터 화랑도와 신라인의 중심사상이 된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받고 부친을 따라 백제 침공을 막다가 아막성(阿莫城)에서 친구 추항(箒項)과 같이 전사한 내마(奈麻) 귀산(貴山)공이고, 사남은 창부령(倉部令)인 외사부(外斯夫)공이며, 오남은 문우(文于)공이다.

공(公)은 태어나면서 부터 풍채(風采)가 당당하고 영특하여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았고 국선(國仙)이 된 후에 더욱 낭도(郎徒)들을 잘 인솔하고 성원을 받았으며 무예와 지식을 닦으면서 성장 후 군사에 편입되어 전장에 나아가 싸우면서 승진하였다.

알천(閼川)공의 청장년 시기는 실로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삼국이 영토 확장을 꾀하여 변방은 항시 전쟁의 연속이었고, 특히 백제 무왕(武王) 재위 41년과 의자왕(義慈王) 재위 20년간은 끊임없이 신라를 괴롭혔고 고구려 또한 변방 침공이 잦았다.

 

신라에서는 알천(閼川)장군, 용춘(龍春)장군, 필탄(弼呑)장군 등 많은 장군들에게 외침(外侵)이 있을 때 마다 군사를 주어 해당 성주(城主)와 더불어 싸우게 하였다. 2969년(서기 636년) 5월 선덕여왕(善德女王) 5년에 백제대군이 독산성(獨山城)을 침공할 때 알천(閼川)장군이 이끄는 신라군은 백제군을 맞아 크게 승리하였고, 백제군은 우소(于召)장군이 포로가 되는 등 많은 손실을 입고 패퇴(敗退)하였다.

선덕여왕(善德女王)은 이같이 충성스럽고 치밀하며 합리적이고 과감한 공(公)을 대장군(大將軍)으로 보(補)하고 각 전장을 통솔토록 하였으며, 한편 2971년(서기 638년) 고구려병이 칠중성(七重城:積城)을 침공할 때는 공(公)이 친히 장병을 이끌고 나아가 고구려병을 물리쳤다. 같은 시기에 선덕여왕(善德女王)은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서 개구리 소리가 요란하자 이를 듣고 백제군이 침공하기 위하여 매복하고 있음을 판단하고 알천(閼川)장군으로 하여금 여근곡(女根谷:五峰山 富山下 溪谷)에 가서 숨어 있는 백제군을 토벌하라고 명하여 공(公)은 이를 섬멸한 후 후속부대까지 패퇴시키고 돌아와 알천장군은 선덕여왕에게 어떻게 그리 자세히 알고 계셨는가? 고 물으니 왕은 여근곡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여 주니 이 대담(對談)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그 후 공(公)은 각간(角干)직과 이찬(伊飡) 벼슬에 올라 내정에 적극 참여 하였으며 2980년(서기 647년) 정미(丁未) 2월에는 신라 최고관직(新羅 最高官職)인 상대등(上大等)에 오르고 귀족회의(貴族會議:和白) 의장이 되니 당시 회백회의 임원은 임종공(林宗公), 술천공(述川公), 호림공(虎林公), 염장공(廉長公), 유신공(庾信公)이었다.

2987년(서기 654년)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8년)이 승하(昇遐)하자 조정 군신들은 모두 공(公)에게 왕위(王位)에 올라 섭정(攝政)하여 줄 것을 간청(懇請)하였으나 공(公)은 이를 완곡(婉曲)히 물리치고 “신(臣)은 이미 늙었으며 또한 덕행이 일컬을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춘추(春秋)공은 국세(國勢)의 덕망(德望)이 숭중(崇重)하고 제세(濟世)의 영걸(英傑)이다”라고 춘추공을 추천하여 왕위를 권하였으나 사양하다가 알천공(閼川公)의 강력한 권유(勸誘)에 의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곧 후에 삼국(三國)을 통일(統一)한 신라 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다.

그 후 무열왕(武烈王)은 2989년(서기 656년)에 알천공(閼川公)의 국가에 대한 공로(功勞)가 가상(嘉賞)하고 자신(自身)을 왕위에 오르도록 한 감사의 뜻을 모아 공(公)의 24대 조(祖)인 소벌공(蘇伐公)을 문열왕(文烈王)으로 추봉하였다. 이때 공(公)은 연로(年老)하여 관직을 뒤로하고 가족과 더불어 여생을 보낼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공(公)은 아달라이사금(阿達羅抳師今)의 14세손이고 상대등 총지국사장(上大等 摠知國事長) 선(宣)의 딸인 영아부인 박씨(玲阿夫人 朴氏)와 혼인하여 자식 한명을 두었으니 이가 곧 이벌공(諱 利伐, 호는 山史, 改諱:老欣)이고 이벌공은 예부령(禮部令) 경태(京太)의 딸인 이우부인 석씨(利雨夫人 昔氏)와 혼인하였으나 늙도록 후사가 없어 서로가 개탄(慨歎)하고 있을 때 하루는 공(公)의 꿈에 소벌공(蘇伐公)이 나타나 현몽(現夢)하기를 “그대가 도사곡(塗斯谷)으로 이거(移居) 하면 가히 구치자(九豸者:九將軍)를 얻으리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아부인 박씨와 자부(子婦) 이우부인 석씨도 이상동몽(異狀同夢)이었으니 이는 필시 조상(祖上)의 계시(啓示)라 생각하고 2991년(서기 658년) 무오(戊午)년 가을 청강(菁江:南江)에 이르러 사방을 살펴보니 꿈의 계시대로 감나무 가지가 아홉 개이고 그 감나무(九柿木) 밑 그릇에 새겨진 글자가 “이곳은 구치자가 날 곳이요 후세에 반드시 20여명의 장수와 재상이 나올 땅이다”라는 내용을 보고 공(公)은 그곳에 집을 지어 2993년(서기660년) 3월 3일에 이사하고 이곳을 도사곡(塗斯谷)이라 이름 하였다. 이사 후 손자 복서(福瑞)공을 얻으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집안의 경사를 맞게 되어 공(公)은 휘를 경사경(慶)자로 개휘하였고 공(公)의 독자(獨子) 이벌(利伐)은 노년에 얻은 기쁨으로 역시 휘를 노흔(老欣)으로 개휘하였다.

그 후 노흔공은 차남(次男) 복상(福祥)공과 삼남(三男) 복정(福廷)공 등 삼형제를 두었고 후일 이곳을 도사곡에서 소경의 휘를 따서 소경동(蘇慶洞)이라고 하였다가 다시 벼슬 이름을 따서 상대동(上大洞)으로 바꾸었으니 이곳이 진주시 상대동이다.

그 후 손자인 3세 휘 복서(福瑞)공은 국선(國仙)을 거쳐 청주총관(菁州摠管)이 되고, 4세 휘 억자(億子)공은 한주총관(漢州摠管), 5세 휘 후준(後俊)공은 상주총관(尙州摠管), 6세 휘 검백(劍白)공은 웅주도독(熊州都督)이 되었고, 7세 휘 상영(尙榮)공은 청주도독(菁州都督), 8세 휘 목(穆)공도 청주도독(菁州都督), 9세 휘 은(恩)공은 웅주도독(熊州都督), 10세 휘 송(淞)공은 강주도독(康州都督), 11세 휘 격달(格達)공은 하동태수(河東太守)를 거쳐 고려국(高麗國)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공(公)이 도사곡으로 이사한 후 9대 9장군이 대대로 나왔으니 이는 구시목(九柿木)의 은덕으로 기리고 있다. 공(公)은 손자 삼형제(三兄弟)와 더불어 화락(和樂)한 노년을 보내다가 3019년(서기 686년) 10월 12일 조용히 유명(幽明)을 달리 하니 수(壽)는 109세(百九歲)이다.

 

묘지(墓地)는 진주시 상대동 선학산록(仙鶴山麓)에 있고 대각간(大角干) 김인문(金仁問)이 비문(碑文)을 썼으나 보존되지 못하고 유실(遺失)되어 4310년(서기 1977년) 전국 종친회에서 재건비(再建碑)하고 예장석(禮葬石)과 조경(造景)을 하였으며 4322년(서기 1989년) 월훈석(月暈石)등으로 묘소를 개수 조경하였다.

진주소씨는 상계(上系)가 확실하여 시조(始祖) 경(慶)공으로부터 24대조가 신라국(新羅國) 창건(創建)시 초대왕인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양육한 소벌공(蘇伐公)이고, 28대조가 후진한(後辰韓) 주인 백손공(伯孫公:辰公)이며, 그 이상 상상계(上上系)로 96대조가 태하공(太夏公:豊公)에 이르는 상상계원류계도(上上系源流圖)를 가진 오래된 토성(土姓)중의 하나이다.

2009-07-29 22:38 | 출처 : 진주소씨 족보를 참고문헌으로 본인 작성

질문자 한마디

(씨엠과 나는님)
우와, 정말 최고의 답변입니다.
질문자 채택

해피스마일짱 | 소개 | 답변

전문분야 : 연예인,방송인 (1위) | TV,라디오 (1위) | 답변 3990 | 채택률 90%
본인소개 : 하루하루를 즐거운 맘으로 보내고자하는 낙천주의자이지만.... 사소한...

선덕여왕에서 신라10화랑 비천지도의 수장 알천랑 역으로 출연중인 탤런트는 이승효랍니다.

이승효는 2006년 드라마 시티(형님 사랑에 빠지다)로 연기자 데뷔를 했으며 출연작으로는 대조영과 최강칠우..

등이 있답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으며, 2009년 현재 동 예술대학원 공연영상학부에 재학중인 이승효는 1980년생이

라고 합니다.

알천은 허구가 아니라 실존인물이라고 합니다.

 

서기637년 7월에 알천(閼川)을 대장군에 봉함.
알천 대장군은 진주소씨의 시조인 소경(蘇慶)이다.

김춘추가 왕으로 추대될 무렵 알천이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김춘추에게 양보하여 김춘추가 왕이 되었다라고 기록

된다.

그래서 알천이 진골(부모 중 한쪽이 왕족)이 되는 신분을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소씨는 후삼한의 진한의 우두머리였던 소벌도리의 무리이다.

진한6부 중에서 유리왕 때 최씨로 사성받은 부족이다.

후대에 최치원이 이름을 떨치면서 경주최시의 중시조가 된다.

김춘추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알천공은 진주로 낙향하여 살게 된다.


질문자 한마디

(씨엠과 나는님)
성실한 답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몽땅공주님 09.08.19

    중앙대학교가 아니라 충주대학교 컴퓨터공학과롤 졸업하고 중앙대 대학원으로 진학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댓글
질문자 채택

RAIN524U(qkrt********) | 답변 26 | 채택률 31.6%

활동분야 : 국내배우 | 드라마
본인소개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실제로 있엇습니다.

진평왕시대에..

2009-07-30 13:10 | 출처 : 본인작성

질문자 한마디

(씨엠과 나는님)
우와, 정말 최고의 답변입니다.

소재우 | 답변 1 | 채택률 0%

활동분야 : 해당 분야가 없습니다.
본인소개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알천은 실제 인물입니다. 소씨 대종회를 클릭하면  자세히 설명. 그리고 9월 18일 KBS 8시에 역사스페셜에서 방송 . 자료를 제공 했슴.

2009-09-18 10:19 | 출처 : 본인작성

푸른바다(love*********) | 답변 1 | 채택률 0%

활동분야 : 해당 분야가 없습니다.
본인소개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알천랑의 이름은 "이승효"이구요

나이는 26으로 알려짐


 

2009-10-14 15:53 | 출처 : 본인작성

소정영(sojy****) | 답변 1 | 채택률 0%

활동분야 : 해당 분야가 없습니다.
본인소개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mbc 연속극 선덕여왕에서 열연중인 알천랑에 대하여 문의하신 내용에 대한 답글입니다. 알천랑은 실존인물이시고 그분은 진주소씨의 시조(始祖)이십니다. 참고가 되실 것 같아 다음카페에서 운영하고 있는 '진주소씨사랑방'이라는 곳에서 아래글을 복사하였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 래

시조 경공(慶公)의 초휘(初諱:처음이름)는 알천(閼川)이시며 서기 636년 60歲때 27대 선덕여왕 5년 백제가 독산성을 침공하니 신라의 장군이신 알천공(閼川公)은 예하장병(隷下將兵)을 이끌고 출전하여 격전 끝에 이를 물리치고 익년(翌年) 61세에 대장군이 되시고 62세 때인 638년 고구려(高句麗)군과 칠중성(七重城) 밖에서 싸워 이를 격퇴하시고 이찬(伊湌) 벼슬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서기 647년 진덕여왕(眞德女王) 원년(元年) 70세에 신라 최고 관직인 각간(角干:조선시대의 영의정. 현재의 국무총리와 같은 직급)이 되시고 다음해인 71세때 귀족회의의 의장격인 상대등(上大等)에 오르시었다. 

  당시 신라는 왕권(王權)이 중심이 되는 귀족국가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이었으므로 귀족(貴族)들의 통솔(統率)을 위하여 화백(和白) 즉 귀족회의를 설치하고 좌수(座首)즉 의장격인 상대등(上大等)을 두었다고 한다. 

  알천공은 상대등에 오르신지 7년후인 서기 654년 29대 태종무열왕 원년 78세로 퇴임하시니 28대 진덕여왕이 승하(昇遐)하신 해이다. 진덕여왕이 승하(昇遐:임금이 세상을 떠남)하시자 군신(君臣)모두가 상대등(上大等) 알천공(閼川公)에게 등극(登極)을 간청하였으나 알천공께서는 왕위(王位)를 완곡(婉曲)하게 물리치시어 굳이 사양하시고 말씀하시기를 「臣은 이미 늙었으며 또한 덕행이 일컬을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춘추공(春秋公)은 덕망이 높고 실로 제세(濟世)의 영걸(英傑)이라 아니할 수 없다.」고 하시며 김춘추를 받들어 왕으로 추대(推戴)하시니 춘추공은 세 번 사양하다가 마침내 왕위에 오르니 이분이 바로 신라29대 태종무열왕이시다.(삼국사기.삼국유사)

  그후 태종무열왕 3년인 656년에 무열왕이 알천공의 공로를 가상(嘉賞:찬미하고 칭찬함)하여 공의 24대조 벌공(蘇伐公)을 문열왕(文烈王)으로 봉(封)하였다(삼국사기.삼국유사).   

   이때 公은 80歲였으나 슬하에 손자가 없음으로 개탄(慨歎)의 나날을 보내시던중 하루는 꿈에 벌공(蘇伐公)께서  현몽(現夢)하시기를 흔소(欣笑:기뻐서 크게 웃음)하시면서 「그대가 도사곡으로 이사하면 가히 구치자(九豸者 : 九將軍)를 얻으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아부인(玲阿婦人) 박씨와 며누리이신 석씨(昔氏)께서도 같은 꿈을 꾸시어 公이 기이(奇異)히 여겨 오시다 84세때(서기 660년 3월 3일) 마침내 도사곡(塗斯谷 : 九柿洞)으로 이거(移居)하시어 다음해에 손자 복서공(福瑞公)을 얻으셨다.  얼마나 기쁘셨던지 그때부터 이름을 알천(閼川)에서 경사스럽다고 하여 경(慶)이라 개휘(改諱:이름을 바꿈)하시었다고 하며 도사곡을 지금까지 진주시 소경동(蘇慶洞) 또는 상대동(上大洞:벼슬이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2009-10-19 06:50 | 출처 : 본인작성

블로그 바로가기

선덕여왕 시청률의 주역은 미실(고현정)이다.내생각..

자명도의 시청률을 잠재워 버리고 이제 당당히 30프러를 상회하는 시청률을 보이는 '선덕여왕' 나만 그런지 몰라도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미실(고현정)의 일품 연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다른 연기자들의 도움과 극본및 내용전개의 재미성도 배제할수 없지만 난 단연 시청률 상승의 일등 공신은 미실(고현정)이라 생각한다. 다들 공감하는것은 미실(고현정)의 대사나 연기를 보면서 닭살이 돋을 만큼 짜릿한 느낌을 나만 격은 것은 아닐것이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2009-08-06 10:34 이 답변 자세히보기
블로그 바로가기

주연보다 멋진 그들 엄기준 & 이승효

요즘 선덕여왕을 재미있게 보고있습니다. 처음에는 저 꼬마가 언제커서 여왕까지 되려나싶었는데, 생각보다 전개도 빠르고 배우들의 연기도 참 좋네요. 고현정을 비롯한 숱한 베테랑 연기자들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십화랑의 홍경인도 반갑고, 무엇보다 눈이 가는 건 알천랑 이승효입니다. 주인공이 정의감에 불타면 그러려니 하다가도, 알천랑같은 조연들이 소신있게 권력에 맞서는걸 보면 신선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저만 그런건가요? 흠. 아무튼 그러해서.. 2009-08-17 15:03 이 답변 자세히보기

우측 영역


재심청구란 형사에만 해당되는 제도인가요

길(k61***) | 2010-04-30 19:47 | 조회 295 | 답변 2

 소액심판으로 항소심에서 패한후 상고한결과 기각당햇습니다

이제는 영영 이 부당함을 호소할길이없는줄알앗는데

대법원 윤리심의관실에 계신분이 재심이란 제도가잇으니 한번

알아보라고하셔서 검색을해보니 재심은 형사에만 해당되는 제도처럼

설명이나오네요.

"확정판결에 있어서의 사실인정의 오류를 시정하고 불이익을받은 피고

인 구제에 목적이잇다..."

재심은 민사와는 무관한 제도인지 궁금합니다.

이 질문에 답변하시면 지식머니 5, 채택시엔 30 을 더 드립니다.
답변하기
질문자 채택

열혈친절남 | 소개 | 답변

전문분야 : 법,법률상담 (2위) | 노동 (7위) | 답변 5048 | 채택률 84.3%
본인소개 : 변호사이고, 이메일주소는 yoho678@hanmail.net 입니다....

 인터넷 검색의 한계이지요. 비슷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은, 저도 여기서 답변을 많이 하지만 다른 분들의 답변을 보면 정말 정확한 분들도 계시지만 비슷하면서도 정확하지 않거나 아예 틀린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분들의 판단을 존중해서 답을 달지는 않습니다. 재심은 민사에도 적용이 됩니다. 하지만 재심을 위해서는 새로운 증거의 확보라는 요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2010-05-01 23:46 | 출처 : 본인작성

질문자 한마디

(길님)
우와, 정말 최고의 답변입니다.

지존(ani***) | 답변 1 | 채택률 0%

활동분야 : 해당 분야가 없습니다.
본인소개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저도 민사 사건으로 항소에 패하고 상고했는데 소액재판(2천만원 미만)은 상고(대법원 심의)대상이 안된다는 얘길 듣고 여기저기 찾아봤더니 아래와 같은 법 조항이 나와 있군요!

 

   제451조 (재심사유) ①다음 각호 가운데 어느 하나에 해당하면 확정된 종국판결에 대하여 재심의 소를 제기할 수 있다. 다만, 당사자가 상소에 의하여 그 사유를 주장하였거나, 이를 알고도 주장하지 아니한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1. 법률에 따라 판결법원을 구성하지 아니한 때
2. 법률상 그 재판에 관여할 수 없는 법관이 관여한 때
3. 법정대리권·소송대리권 또는 대리인이 소송행위를 하는 데에 필요한 권한의 수여에 흠이 있는 때. 다만, 제60조 또는 제97조의 규정에 따라 추인한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4. 재판에 관여한 법관이 그 사건에 관하여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때
5. 형사상 처벌을 받을 다른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아 자백을 하였거나 판결에 영향을 미칠 공격 또는 방어방법의 제출에 방해를 받은 때
6. 판결의 증거가 된 문서, 그 밖의 물건이 위조되거나 변조된 것인 때
7. 증인·감정인·통역인의 거짓 진술 또는 당사자신문에 따른 당사자나 법정대리인의 거짓 진술이 판결의 증거가 된 때
8. 판결의 기초가 된 민사나 형사의 판결, 그 밖의 재판 또는 행정처분이 다른 재판이나 행정처분에 따라 바뀐 때
9. 판결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사항에 관하여 판단을 누락한 때
10. 재심을 제기할 판결이 전에 선고한 확정판결에 어긋나는 때
11. 당사자가 상대방의 주소 또는 거소를 알고 있었음에도 있는 곳을 잘 모른다고 하거나 주소나 거소를 거짓으로 하여 소를 제기한 때
②제1항제4호 내지 제7호의 경우에는 처벌받을 행위에 대하여 유죄의 판결이나 과태료부과의 재판이 확정된 때 또는 증거부족 외의 이유로 유죄의 확정판결이나 과태료부과의 확정재판을 할 수 없을 때에만 재심의 소를 제기할 수 있다.
③항소심에서 사건에 대하여 본안판결을 하였을 때에는 제1심 판결에 대하여 재심의 소를 제기하지 못한다.
  
   제452조 (기본이 되는 재판의 재심사유) 판결의 기본이 되는 재판에 제451조에 정한 사유가 있을 때에는 그 재판에 대하여 독립된 불복방법이 있는 경우라도 그 사유를 재심의 이유로 삼을 수 있다.
  
   제453조 (재심관할법원) ①재심은 재심을 제기할 판결을 한 법원의 전속관할로 한다.
②심급을 달리하는 법원이 같은 사건에 대하여 내린 판결에 대한 재심의 소는 상급법원이 관할한다. 다만, 항소심판결과 상고심판결에 각각 독립된 재심사유가 있는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제454조 (재심사유에 관한 중간판결) ①법원은 재심의 소가 적법한지 여부와 재심사유가 있는지 여부에 관한 심리 및 재판을 본안에 관한 심리 및 재판과 분리하여 먼저 시행할 수 있다.
②제1항의 경우에 법원은 재심사유가 있다고 인정한 때에는 그 취지의 중간판결을 한 뒤 본안에 관하여 심리·재판한다.
  
   제455조 (재심의 소송절차) 재심의 소송절차에는 각 심급의 소송절차에 관한 규정을 준용한다.
  
   제456조 (재심제기의 기간) ①재심의 소는 당사자가 판결이 확정된 뒤 재심의 사유를 안 날부터 30일 이내에 제기하여야 한다.
②제1항의 기간은 불변기간으로 한다.
③판결이 확정된 뒤 5년이 지난 때에는 재심의 소를 제기하지 못한다.
④재심의 사유가 판결이 확정된 뒤에 생긴 때에는 제3항의 기간은 그 사유가 발생한 날부터 계산한다.
  
   제457조 (재심제기의 기간) 대리권의 흠 또는 제451조제1항제10호에 규정한 사항을 이유로 들어 제기하는 재심의 소에는 제456조의 규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제458조 (재심소장의 필수적 기재사항) 재심소장에는 다음 각호의 사항을 적어야 한다.
1. 당사자와 법정대리인
2. 재심할 판결의 표시와 그 판결에 대하여 재심을 청구하는 취지
3. 재심의 이유
  
   제459조 (변론과 재판의 범위) ①본안의 변론과 재판은 재심청구이유의 범위안에서 하여야 한다.
②재심의 이유는 바꿀 수 있다.
   제460조 (결과가 정당한 경우의 재심기각) 재심의 사유가 있는 경우라도 판결이 정당하다고 인정한 때에는 법원은 재심의 청구를 기각하여야 한다.
   제461조 (준재심) 제220조의 조서 또는 즉시항고로 불복할 수 있는 결정이나 명령이 확정된 경우에 제451조제1항에 규정된 사유가 있는 때에는 확정판결에 대한 제451조 내지 제460조의 규정에 준하여 재심을 제기할 수 있다.

2010-08-20 20:56 | 출처 : 본인작성

우측 영역


홍류동 고운 최치원 선생유적에 관한 글

 

 

 

 

 

 

 

 

 

'고운 최치원선생 관련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조항목
가야면
최치원
합천군
누정
역참조항목
제가야산독서당
인기 검색어
세종
대제학
인플레이션
유효숫자
춘분
등고선
분리과세
마이크로미터
절구
프랑스



백과사전 홈 > 역사와 지리 > 문화재 > 한국 > 문화재자료 > 경상남도

 

농산정 [籠山亭] 에 대한 이미지(13개)농산정 항목가기
농산정
800*600, 166kb
농산정
800*533, 131kb
농산정
800*533, 136kb
농산정
800*533, 132kb
농산정
800*533, 78kb
농산정
800*533, 82kb
농산정
800*533, 81kb
농산정
800*533, 158kb
농산정
800*533, 144kb
1 2
읽을만한 오픈백과
공급면적, 분양면적, 계약면적에...
[생활영어] '남자다움'의 귀여운...
서브리미널 효과(subliminal eff...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 ...
주거 문화로보는 제주민들의 지...
내가 찾은 항목
농산정
가야산국립공원
최치원
농산정
가야산국립공원

 

재심청구란 형사에만 해당되는 제도인가요  (0) 2010.10.07
홍류동 고운 최치원 선생 유적에 관한 글  (0) 2010.06.24
최치원설화  (0) 2010.01.09
쌍녀분설화(雙女墳說話)   (0) 2010.01.09
가야산.해인사 .홍류동계곡  (0) 2009.09.22

최치원설화

[옮긴이/도천 최평열]

 

 말기의 학자·문장가인 최치원에 관한 설화. 최치원이 당나라에 있을 때의 일화에 관련된 문헌설화이다. 한 편의 설화이기는 하나 내용 구성면에서 다분히 소설적 면모를 띠고 있어 소설로 보는 경우도 있다.
이 설화는 원래 ≪수이전 殊異傳≫에 수록되었던 것이 뒤에
성임(成任
)의 ≪태평통재 太平通載≫ 권68에 ‘최치원(崔致遠)’이라는 이름 아래 전재되어 있고, 그 뒤 권문해(權文海)의 ≪대동운부군옥≫ 권15에는 ‘선녀홍대(仙女紅袋)’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전한다.
같은 내용이기는 하나 〈선녀홍대〉가 〈최치원〉보다 약 5분의 1 정도로 축약되어 있다. ≪태평통재≫에 수록된 설화의 내용을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최치원이 12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한 뒤 율수현(碌水縣)의 현위(縣尉)가 되었는데, 항상 고을 남쪽의 초현관(招賢館)에 가서 놀았다. 초현관 앞에는 쌍녀분(雙女墳)이라는 오래된 무덤이 있었는데, 예로부터 많은 명현들이 노는 곳이었다.
어느 날 최치원이 쌍녀분에 관한 시를 지어 읊었더니, 홀연히 취금(翠襟)이라는 시녀가 나타나 쌍녀분의 주인공인 팔낭자(八娘子)와 구낭자(九娘子)가 최치원의 시에 대해 화답한 시를 가져다주었다.
시를 읽고 감동한 최치원이 다시 두 여인을 만나고자 하는 시를 지어 보내고 초조히 기다리노라니, 얼마 뒤 이상한 향기가 진동하면서 아름다운 두 여인이 나타났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 최치원이 두 여인의 사연을 듣고자 하였다. 원래 그들은 율수현의 부자 장씨(張氏)의 딸들로 언니가 18세, 동생이 16세 되던 해 그녀들의 아버지가 시집보내고자 하여 언니는 소금장수에게, 동생은 차〔茶〕장수에게 정혼하였다.
그러나 그녀들의 뜻은 달랐기에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고민하다가 마침내 죽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여인을 함께 묻고 쌍녀분이라 이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한을 품고 죽은 그녀들은 마음을 알아줄 사람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다가, 마침 최치원 같은 수재를 만나 회포를 풀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였다.
세 사람은 곧 술자리를 베풀고 시로써 화답하여 즐기다가 흥취가 절정에 이르자, 최치원이 서로 인연을 맺자고 청하니 두 여인 또한 좋다고 하였다. 이에 세 사람이 베개를 나란히 하여 정을 나누니 그 기쁨이 한량없었다.
이렇게 즐기다가 달이 지고 닭이 울자 두 여인은 이제 작별할 시간이 되었다면서 시를 지어 바치고는 사라져 버렸다. 최치원은 그 다음날 지난밤 일을 회상하며 쌍녀분에 이르러 그 주위를 배회하면서 장가(長歌)를 지어 부른다. 그 뒤 최치원은 신라에 돌아와 여러 명승지를 유람하고 최후로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버린다.


이상의 내용에서 볼 때 이 설화는 설화라기보다는 소설에 매우 접근한 모습을 보여 주는데, 최초의 수록자나 작자는 알 수 없다. ≪태평통재≫에는 ≪수이전≫에서 나왔다고 하였고, ≪대동운부군옥≫에서도 그 출전을 ≪수이전≫으로 밝히면서, 참고 문헌에는 ≪태평통재≫도 기록하고 있다.
결국 처음 ≪수이전≫에 수록되어 있던 것이 ≪태평통재≫로, 이것이 다시 축약되어 ≪대동운부군옥≫에 수록된 것이다. 그러나 ≪대동운부군옥≫은 ≪수이전≫에서 곧바로 왔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최치원설화〉와 〈선녀홍대설화〉는 그 근원이 같다. 다만, 전자에 비하여 후자가 5분의 1 정도 축약되어 있는데, 첫부분과 끝부분이 생략되어 있고 다수 등장하는 한시가 대부분 빠져 있으며, 이야기의 줄거리도 많이 축약되어 있다.
이 설화는 내용상 중국 남송(南宋) 때의 ≪육
조사적편류 六朝事迹編類≫의 분릉문(墳陵門) 제13 쌍녀분기(雙女墳記)와 공통되는 바가 많아 상호 연관성이 있다 하겠고, 당나라의 전기소설인 장작(張弗)의 〈유선굴 遊仙窟〉과도 공통되는 점이 많아 그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중국의 이야기들이 전래되어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인물인 최치원에 결부되었던 것이다.
최치원은 오랫동안 중국에 살았던 인물이기에 이들 중국 설화들과 잘 어울릴 수 있었고, 또 그의 시재(詩才)가 그곳에서 높이 평가되었기에 설화 속에서도 그의 시가 죽은 두 여인의 혼까지 움직일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설화의 내용에서 혼교설화(魂交說話)·재생설화(再生說話)·애정설화(愛情說話) 등의 요소를 볼 수 있는데, 이 설화가 중국 육조 시대(六朝時代), 그리고 당나라 시대 신괴류(神怪類)의 전기적 설화소설에서 다분히 영향을 받고 있음을 말하는 예이다.
이 설화의 성립 연대는 주인공인 최치원의 연대로 보아 고려 초기나 적어도 중기 이전으로 추측된다. 신라 말엽 이후 많은 최치원 관계 설화가 생성, 구전되면서 이 설화도 생성되었고, 이것이 처음 ≪수이전≫에 수록되었다가 ≪태평통재≫에서 ≪대동운부군옥≫의 순서로 전개되었으며, 이야기 중의 혼교설화·재생설화적 요소는 ≪금오신화≫나 기타 많은 조선 시대 국문소설의 혼교적·재생적 요소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이다.
또, 설화의 내용 중 주인공들의 의사표시가 대부분 한시로 나타나 있어 전체적으로 20여 수의 시가 등장하는데, 이러한 설화소설 속의 삽입 시는 후대 한문소설류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는 데에서 이 설화의 문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편, 조선 시대 소설로 〈최치원전〉 또는 〈최고운전〉·〈최문헌전〉 등의 최치원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있는바, 이 〈최치원설화〉와 공통되는 점은 별로 없다. 〈최치원전〉은 지하국대적제치설화(地下國大賊除治說話) 등 다양한 조선 시대 구전설화의 집대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병 양란 이후의 민족적 민중 의식이 표출되어 있어 그 성립 연대가 조선 중기 이후로 보이며, 그 설화적 내용에 있어서도 공통적인 요소가 없어 〈최치원설화〉와의 직접적인 상호 영향 관계는 인정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太平通載, 大東韻府群玉, 六朝事迹編類, 新羅殊異傳小攷 續(崔康賢, 국어국문학 26, 국어국문학회, 1963), 殊異傳과 崔孤雲傳(金甲福, 成大文學 7, 成均館大學校文學會, 1961), 崔致遠傳의 小說性(曺壽鶴, 嶺南語文學 2집, 嶺南大學校國文科, 1975), 崔致遠과 傳說文學-孤雲說話를 중심으로-(張德順, 아카데미논총 4, 세계평화교수아카데미, 197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