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해인사 입구에 최치원 선생님 친필..! ─────행복한 마마
최치원 선생님 친필..!
최치원(崔致遠)에 대하여
1. 가계 및 유년시절
특히, 최씨가문 가운데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3최(崔)’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품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였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 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격려하였다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뒷날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던 점과 아울러 신흥가문출신의 기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2. 당나라에서의 시작(詩作) 활동
그리고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는데, 그때 지은 작품이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雜詩賦》 30수 1권 등이다.
그뒤 876년(헌강왕 2) 당나라의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
이때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을 추려 모은 것이 《중산복궤집 中山覆簣集》 1부(部) 5권이다.
그뒤 887년 겨울 표수현위를 사직하고 일시 경제적 곤란을 받게 되었으나, 양양(襄陽) 이위(李蔚)의 문객(門客)이 되었고, 곧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그러나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칠 때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그뒤 4년간 고변의 군막(軍幕)에서 표(表)·장(狀)·서계(書啓)·격문(檄文) 등을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차되었으며, 겸하여 포상으로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으며, 이어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공사간에 지은 글이 표·장·격(檄)·서(書)·위곡(委曲)·거첩(擧牒)·제문(祭文)·소계장(疏啓狀)·잡서(雜書)·시 등 1만여수에 달하였는데, 귀국 후 정선하여 《계원필경 桂苑筆耕》 20권을 이루게 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 討黃巢檄〉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3. 귀국후의 활동
이로 인하여 《당서 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그의 저서명이 수록되게 되었는데,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 권22 잡문(雜文)의 〈당서에 최치원전을 세우지 않은 데 대한 논의[唐書不立崔致遠傳議]〉에서 《당서》 열전(列傳)에 최치원의 전기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중국인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29세로 신라에 돌아오자, 헌강왕에 의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문명을 떨쳐 귀국한 다음해에 왕명으로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등의 명문을 남겼고,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하여 국왕에게 진헌하였다.
4. 시국관
889년(진성여왕 3)에는 마침내 주·군의 공부를 독촉하자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하여 전국적인 내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최치원은 895년 전국적인 내란의 와중에서 사찰을 지키다가 전몰한 승병들을 위하여 만든 해인사(海印寺) 경내의 한 공양탑(供養塔)의 기문(記文)에서 “당토(唐土)에서 벌어진 병(兵)·흉(凶)두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는 멈추었고, 동쪽 신라로 옮겨져와서 그 험악한 중에도 더욱 험악하여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져 있었다.”고 당시의 처참한 상태를 적었다.
당나라에서 직접 황소의 반란을 체험한 바 있는 그에게는 고국에서 벌어지고 있던 전쟁과 재앙이 당나라의 그것이 파급, 연장된 것으로 느껴졌던 모양으로, 당대 제일의 국제통(國際通)다운 시대감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5. 사회개혁 활동
부성군 태수로 있던 893년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의 횡행으로 가지 못하고, 그뒤에 다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일이 있다.
894년에는 시무책(時務策) 10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10여년 동안 중앙의 관직과 지방관직을 역임하면서, 중앙 진골귀족의 부패와 지방세력의 반란 등의 사회모순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결과 그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무책은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져서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으나 그의 정치적인 개혁안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모순을 외면하고 있던 진골귀족들에게 그 개혁안이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아니되어 실정을 거듭하던 진성여왕이 즉위한 지 11년 만에 정치문란의 책임을 지고 효공왕에게 선양(禪讓)하기에 이르렀다.
6. 은거생활
이에 이르자 최치원은 신라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세 장년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소요자방(逍遙自放)하다가 마침내 은거를 결심하였다.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즐겨 찾은 곳은 경주의 남산(南山), 강주(剛州: 지금의 義城)의 빙산(氷山), 합천(陜川)의 청량사(淸凉寺), 지리산의 쌍계사(雙磎寺), 합포현(合浦縣: 지금의 昌原)의 별서(別墅) 등이었다고 하는데, 이밖에도 동래(東萊)의 해운대(海雲臺)를 비롯하여 그의 발자취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만년에는 모형(母兄)인 승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가 지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의하면 908년(효공왕 12)말까지 생존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뒤의 행적은 전연 알 수 없으나, 물외인(物外人)으로 산수간에서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며 혹은 신선이 되었다는 속설도 전해오고 있으나, 자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새로운 주장도 있다.
7. 고려건국을 즈음한 태도
최치원이 실제 왕건에게 서신을 보낸 사실이 있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그가 송악(松岳) 지방에서 새로 대두하고 있던 왕건세력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은거하고 있던 해인사에는 희랑(希朗)과 관혜(觀惠) 등 두 사람의 화엄종장(華嚴宗匠)이 있어서 서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여 대립하고 있었다.
즉, 희랑은 왕건을 지지하는 데 비하여, 관혜는 견훤(甄萱)의 지지를 표방하고 있었다. 그때에 최치원이 희랑과 교분을 가지고 그를 위하여 시 6수를 지어준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로 보아 최치원은 희랑을 통해서도 왕건의 소식을 듣고 있었고, 나아가 고려의 흥기에 기대를 걸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역사의 중심무대가 경주에서 송악 지방으로 옮겨지고 또 그 주인공도 경주의 진골귀족이 몰락하는 대신에 지방의 호족세력이 새로 대두하고 있던 역사적 현실을 직접 눈으로 내다보면서 살다간 사람이었다.
비록 그 어느 편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사회적인 전환과정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이미 잔존세력에 불과하던 신라인으로 남아서 은거생활로 일생을 마치고 말았으나, 역사적 현실에 대한 고민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문인(門人)들이 대거 고려정권에 참가하여 새로운 성격의 지배층을 형성함으로써 신흥고려의 새로운 정치질서·사회질서의 수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8. 학문적 입장
자신을 ‘부유(腐儒)’·‘유문말학(儒門末學)’ 등으로 표현하였던 것으로 보아 학문의 기본적 입장은 유학(儒學)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유학을 단순히 불교의 부수적인 것으로 이해하거나, 왕자(王者)의 권위수식에만 이용하던 단계를 지나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내세우면서, 골품제도라는 신라사회의 족적 편제방법(族的編制方法)을 부정하는 방향으로까지 발전시켰던 것이다.
유교에 있어서의 선구적 업적은 뒷날 최승로(崔承老)로 이어져 고려국가의 정치이념으로 확립을 보기에 이르렀다.
9. 역사인식
이러한 최치원의 유교사관은 유교에 대한 이해가 보다 깊어지는 김부식(金富軾)의 그것에 비해서 냉정한 면이 결여된 것이었고, 따라서 그만큼 모방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제왕연대력》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아 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가야를 포함하여 삼국의 연표와 통일신라, 그리고 중국의 연표가 들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불허북국거상표 謝不許北國居上表〉나 〈상태사시중장 上太師侍中狀〉 등에서 나타난 발해인에 대한 강한 적개심으로 보아 발해사(渤海史)는 제외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상태사시중장〉에서는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로 발전한 것으로 인식하고, 또한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들이 건국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로 보아 그가 인식한 한국고대사체계는 삼한―삼국―통일신라와 발해로 이어져오는 것이었고, 나아가 그 자신의 시대에 와서 통일신라 자체도 이미 붕괴되고 있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10. 한문학·불교업적
그의 한문학은 중국문학의 차용(借用)을 통해서 형성되었는데, 신라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성립된 향가문학(鄕歌文學)과 대립되는 새로운 문학장르를 개척한 것이었다.
그리고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다. 《동문선》과 《계원필경》에 상당수의 시문이 수록되어 전하고 있는데 평이근아(平易近雅)하여 당시 만당시풍(晩唐詩風)과 구별되었다.
최치원은 그 자신 유학자로 자처하면서도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승려들과 교유하고, 불교관계의 글들을 많이 남기고 있었다. 불교 가운데서도 특히 종래의 학문불교·체제불교인 화엄종의 한계와 모순에 대해서 비판하는 성격을 가진 선종(禪宗)의 대두를 주목하고 있었다.
지증(智證)·낭혜(朗慧)·진감(眞鑑) 등 선승들의 탑비문(塔碑文)을 찬술하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특히 〈지증대사비문 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선종사(新羅禪宗史)를 간명하게 기술한 것으로 유명한데, 신라의 불교사를 세 시기로 구분하여 이해한 것은 말대사관(末代史觀)에 입각한 것으로서 주목된다.
그러나 불교 가운데서 주목한 것은 선종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종래의 지배적 불교인 화엄종이었다. 화엄종관계의 글을 많이 남기고 있어서 오늘날 확인되는 것만도 20여종에 이르고 있으며, 특히 화엄종 사찰인 해인사에 은거한 뒤부터는 해인사관계의 글을 많이 남겼다. 화엄종관계의 글 가운데는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부석존자전 浮石尊者傳》·《석순응전 釋順應傳》·《석이정전 釋利貞傳》 등이 있었던 것이 확인되는바, 이로 보아 신라화엄종사(新羅華嚴宗史)의 주류를 의상(義湘)―신림(神琳)―순응(順應)―이정(利貞)―희랑으로 이어지는 계통으로 이해하지 않았는가 한다.
그리고 화엄학 이외에도 유식학자(唯識學者)인 원측(圓測)과 태현(太賢)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 화엄학과 함께 신라불교의 양대 조류를 이루었던 유식학(唯識學)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주목된다.
11. 도교·노장·풍수지리연구
특히, 《계원필경》 권15에 수록된 〈재사 齋詞〉에서 그의 도교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귀국한 뒤 정치개혁을 주장하다가 진골귀족의 배척을 받아 관직을 떠난 뒤에는 현실적인 불운을
노장적(老莊的)인 분위기 속에서 자족하려고 하는 면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현실도피적인 행동이 뒷날 도교의 인물로까지 잘못 전하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찬술한 〈대숭복사비문〉에 의하면 예언적인 도참신앙(圖讖信仰)과 결부되어 국토재계획안적인 성격을 가지고 사회적 전환의 추진력이 되고 있었던 풍수지리설에도 상당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사회에 대한 인식이나 역사적인 위치가 선승(禪僧)이자 풍수지리설의 대가였던 도선(道詵)과 비슷한 점은 주목할만한 것이다. 이처럼 유학자라고 자처하면서 유교 이외에 불교나 노장사상, 그리고 심지어는 풍수지리설까지도 아무 모순 없이 복합하여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유교와 불교의 조화에 노력한 면이 〈난랑비서문 鸞郞碑序文〉을 비롯한 그의 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12. 평가
그러나 말년에 와서의 소극적이며 은둔적인 생활은 시대적인 제약성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신라말 고려초의 사회적인 전환기에서 중세적 지성의 선구자로 머물다 간 아쉬움을 남겼다.
1020년(현종 11) 현종에 의하여 내사령(內史令)에 추증, 다음해에 문창후(文昌候)에 추시(追諡)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永平)의 고운영당(孤雲影堂), 대구 해안현(解顔縣)의 계림사(桂林祠) 등에 제향되었다.
13. 저술
글씨도 잘 썼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것으로는 쌍계사의 〈진감선사비문〉이 유명하다.
그리고 많은 설화가 전해오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조선시대 김집(金集)의 《신독재전집 愼獨齋全集》에 실린 〈최문헌전 崔文獻傳〉이 있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新增東國輿地勝覽
新編諸宗敎藏總錄
華嚴寺事蹟
佛國寺古今歷代記
東文選
崔文昌候全集(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1972)
국역 孤雲先生文集 上·下(孤雲先生文集編纂會, 1972·1973)
韓國佛敎撰述文獻總錄(東國大學校佛敎文化硏究所, 1976)
崔文昌候全集 解題(李基白, 崔文昌候全集, 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1972)
崔孤雲의 文化的 地位(崔益翰, 春秋 2―6, 1941)
孤雲 崔致遠의 思想硏究(金福順, 史叢 24, 1980)
孤雲 崔致遠의 社會改革思想(崔根泳, 韓國思想 18, 1981)
崔致遠硏究(崔敬淑, 釜山史學 5, 1981)
崔致遠의 歷史敍述(趙仁成, 歷史學報 94·95合輯, 1982)
新羅統一期 및 高麗初期의 儒敎的 政治理念(李基白, 大東文化硏究 6·7合輯, 1970)
新羅骨品體制下의 儒敎的 政治理念(李基白, 新羅時代의 國家佛敎와 儒敎, 한국연구원, 1978)
韓國古代政治의 性格과 中世政治思想의 成立過程(金哲埈, 東方學志 10, 1969;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南北國時代와 崔致遠(李佑成, 創作과 批評 38, 1975;韓國의 歷史像, 창작과 비평사, 1982)
新羅下代禪宗九山派의 成立(崔柄憲, 韓國史硏究 7, 1972)
新羅下代 賓貢及第者의 出現과 羅唐文人의 交驩(李基東, 全海宗博士華甲記念史學論叢, 1979;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한국연구원, 1980)
羅末의 戰亂과 緇軍(李弘稙, 史叢 12·13合輯, 1968;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1973)
新羅六頭品硏究(李基白, 省谷論叢 2, 1971;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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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國文宗崔孤雲文學(徐首生, 語文學 1·2)
최고운의 사상과 문학(양광석, 한국문학론, 일월서각,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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