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고운 최치원 선생---[사학회회장 이동성 글]---도천 최평열
○ 姓名 : 한글 최 치원 한문 崔致遠
○ 本貫 : 경주 ○ 字 : 孤雲(혹은 海雲, 海夫)
○ 生(출생년도) : 857년 ○ 卒(별세년도) : 미상
○ 學行(수학과정 또는 학맥)
최치원의 家系
최치원은 본래 신라의 王京(지금의 경주)의 사량부(沙梁部) 또는 본피부(本彼部) 사람으로 후기 신라의 진보적 시문학(詩文學)을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견일(肩逸)의 아들로 알려져 있고,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 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 출신이다.
최치원은 857년<(憲安王 1년), (문성왕 19년)> 왕경인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계에 대하여 <崔致遠 字 孤雲 或 海雲 王京沙粱部人也 史傳泯不知其世系>,『삼국사기』권 46열전 6, 최치원 조,
致遠乃 本彼部人也 今黃龍寺南昧呑寺南有古墟 云是崔候古宅也 殆明矣
(『삼국유사』혁거세 왕조 권1
위와 같이 삼국사기에서는 "최치원의 자는 고운 혹은 해운이요, 왕경의 사량부 사람이다. 흔적이 없어져 그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서는 "최치원은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황룡사(皇龍寺)와 매탄사(昧呑寺) 남쪽에 그의 집터가 남아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삼국사기』에는 사량부인으로, 『삼국유사』에는 본피부(本彼部)인으로 상이하게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그의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肩逸)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여 그 공로로 헌강왕으로부터 견일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그 공로가 원성왕을 위해 지은 발원문(發願文)이다. 발원문은 불교에서 수행자가 정진할 때 세운 서원(誓願)이나 시주(施主)의 소원을 적은 글이다.
최치원의 아버지 견일이 숭복사를 창건하는데 관여하고, 원성왕의 극락왕생 천도를 위해 발원문까지 지은 것을 보면, 상당한 글 솜씨를 지녔음은 물론, 신라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최치원의 형제로 그의 형 현준(賢俊)이 있었고 종제(從弟)가 있었는데, 그의 형 현준은 해인사의 승려로 있었다. 종제로는 최서원(崔棲遠)과 최인연(崔仁渷)의 활동이 보인다.
이러한 가계를 가진 그는 6두품 출신이었다.
신라 골품제의 관등은 순수 왕족혈계인 성골(聖骨)과 왕족과 혼열계인 진골(眞骨)이 상위 관등을 차지하여 6두품은 신라 17관등 중 제 6관등 까지 승진이 제한되어 있었다. 이 점은 후에 그의 정치이념과 종교관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 동안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열심히 공부하도록 당부한 것을 보면 그는 신라 골품제에 대한 자신의 신분적 열세를 만회하는 방편으로 당나라 유학을 선택하였다고 보여진다.
〇 문행(문집목록, 주요 문적 등)
입당(入唐)과 문행 기록
최치원은 12세에 당으로 건너가 18세에 급제하여 어려서 침착하고 영민했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열두살이 되자 배편으로 당에 들어가 유학하고자 하였다. 이에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고 가거든 힘써 하여라"라고 하였다. 868년(경문왕 8)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서경(西京:長安)에 체류한 지 6년 만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시(主試)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 뒤 동도(東都:洛陽)에서 시작(詩作)에 몰두했는데, 이때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雜詩賦)〉 30수 1권 등을 지었다. 876년(헌강왕 2) 강남도(江南道) 선주(宣州)의 표수현위(漂水縣尉)로 임명되었다. 당시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이 후에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5권으로 엮어졌다. 877년 현위를 사직하고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입산했으나 서량(書糧)이 떨어져 양양(襄陽) 이위(李蔚)의 도움을 받았고, 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高騈에게 도움을 청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했다. 879년 高騈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황소(黃巢) 토벌에 나설 때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아 표장(表狀)·서계(書啓) 등을 작성했다. 880년 高騈의 천거로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都統巡官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인 881년 黃巢의 반란이 일어나자 朝廷에서 준남절도사 高騈에게 諸道行營兵馬都統을 命하여 난리를 討伐케 했을 때 선생은 황소를 치는 다음과 같은 檄文을 지었으니 『 不惟天下之人皆思顯戮抑亦地中之鬼己議陰주(천하의 모든 사람이 모두 너를 죽여야 한다고 할 뿐만 아니라 저 땅 밑에 있는 귀신들 까지도 너를 죽이기로 議論했으리) 황소는 이 구절을 보고 저도 모르게 床에서 떨어졌다 한다.
<『삼국사기』권 46열전 제6 최치원편>에 다음과 같이 그 문장이 실려 있다.
檄黃巢書 (討黃巢檄文)
廣明二年七月八日 諸道都統檢校太衛某 告黃巢 夫守正修常曰道 臨危制變曰權 智者成之於順時 愚者敗之於逆理 然則雖百年繫命 生死難期而萬事主心 是非可辨 今我以王師則有征無戰 軍政則先惠後誅將期剋復上京 固且敷陳大信 敬承嘉諭 用戢奸謀 且汝素是遐氓 驟爲勅敵 偶因乘勢 輒敢亂常 遂乃包藏禍心 竊弄神器 侵凌城闕 穢黷宮闈 旣當罪極滔天 必見敗深塗地 噫 唐虞己降 苗扈弗賓 無良無賴之徒 不義不忠之軰 爾曹所作 何代而無 遠則有劉曜王敦 覬覦晋室 近則有祿山朱泚 吠噪皇家 彼皆或手 握强兵 或身居重任 叱吒則雷奔電走 暄呼則霧塞煙橫 然猶暫逞奸圖 終殲醜類 日輸濶輾 豈縱妖氛 天網高懸 必除兇族 況汝出自閭閻之末 起於隴畝之間 以焚劫爲良謀 以殺傷爲急務 有大愆可以擢髮 無小善可以贖身 不唯天下之人 皆思顯戮 抑亦地中之鬼 己議陰誅 縱饒假氣遊魂 早合亡神奪魄 凡爲人事 莫若自知 吾不妄言 汝須審聽 比者 我國家德深含垢 恩重棄瑕 援爾節旄 寄爾方鎭 爾猶自懷鴆毒 不歛 梟聲 動則齧人 行唯吠主 乃至身負玄化 兵纏紫薇 公候則奔竄危途 警蹕則巡遊園地 不能早歸德義 但養頑兇 斯則聖上於汝 有赦罪之恩 汝則於國 有辜恩之罪 必當死亡無日 何不畏懼于天 況周鼎非 發問之端 漢宮豈倫安之所 不知爾意 終欲奚爲 汝不聽乎 道德經云 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天地尙不能久而況於人乎或乎字無 又不聽乎 春秋傳曰 天之假助不善 非祚之也 厚其凶惡而降之罰 今汝藏奸匿暴 惡積禍盈 危以自安 迷而不復 所謂燕巢幕上 漫恣騫飛 魚戱鼎中 則看燋爛 我緝熙雄略 糺合諸軍 猛將雲飛 勇夫雨集 高隆大旆 圍將楚塞之風 戰艦樓船 塞斷吳江之浪 淘汰尉銳於破敵 楊司空嚴可稱神 旁脁八維 橫行萬里 旣謂廣張烈火 爇彼鴻毛 何殊高擧泰山 壓其鳥卵 則日金神御節 水伯迎師 商風助肅殺之威 晨露滌昏煩之氣 波濤旣息 道路卽通 當解 孫權後殿 佇落帆於峴首 杜預前驅 收復京都 剋期旬朔 但以好生惡殺 上帝深仁 屈法申恩 大朝令典 討官賊者 不懷私忿 諭迷途者 固在直言 飛吾折簡之詞 解爾倒懸之急 汝其無成膠柱 早學見機 善者爲謀 過而能改 若願分茅裂士분 開國承家 免身首之橫分 得功名之卓立 無取信於面友 可傳榮於耳孫 此非兒女子所知 實乃丈夫之事 早須相報 無用見疑 我命戴皇天 信資白水 必須言發響應 不可恩多怨深 或若狂走所牽 酣眠未寤 猶將拒轍 固欲守株 則乃此熊拉豹之師 一麾撲滅 烏合鴟張之衆 四散分飛 身爲齋斧之膏 骨作戎車之粉 妻兒被戮 宗族見誅 想當燃腹之時 必恐噬臍不及 爾須酌量進退 分別否臧 與其叛而滅亡 葛若順而榮貴 但所望者 必能致之 勉尋壯士之規 立期豹變 無執愚夫之慮 坐守狐疑 某告
황소(黃巢)에게 보내는 격문
광명(廣明)2년(881) 7월 8일에 제도 도통 검교태위 아무개(高騈)는 황소에게 알린다.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닦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하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에 순응함으로써 성공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이치를 거스르는 것으로서 패하는 것이다. 그러니 비록 백년의 수명에 죽고 사는 것을 기약하기는 어렵지만, 모든 일은 마음으로 그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임금의 군사는 정벌을 하지만 싸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며, 군정(軍政)은 은혜를 앞세우고 죽이는 것을 뒤로 한다.
앞으로 기약하되 상경(上京)을 수복하고 참으로 또한 큰 신의를 펴고자 하여 삼가 천자의 명령을 받들어 간사한 꾀를 치우려 한다. 또 너희는 본디 먼 시골 백성으로 갑자기 억센 도적이 되어 우연히 시세를 타고 문득 감히 강상(綱常)을 어지럽혔다. 마침내 재앙을 일으키는 마음을 품고 잠깐 신성한 권능을 희롱하고 도성의 궁궐을 침략하여 궁문을 더럽혔다.
이미 죄가 하늘에 닿을 만큼 극도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여지없는 패망을 당하고 말 것이다. 아, 요순 이래로 묘족(苗族)과 호족(扈族)이 복종하지 않았는데, 양심 없고 충의 없는 무리가 바로 저희들이 아니겠는가,
멀리는 유요(劉曜)와 왕돈(王敦)이 진(晋)나라의 왕실을 엿보았고, 가까이는 안록산(安祿山)과 주자(朱泚)가 황가(皇家)를 시끄럽게 하였다. 그들은 모두 강한 군대를 장악하였고, 또한 중요한 자리에 있어 호령을 하면 우뢰와 번개가 치듯 하였고, 시끄럽게 떠들면 안개와 연기가 자욱하듯 하였지만, 잠깐 동안 못된 짓을 하다가 끝내 추한 족류들이 섬멸되었다.
햇볕이 활짝 퍼졌으니 어찌 요망한 기운을 그대로 두겠으며, 하늘의 그물은 높이 쳐졌으니 반드시 흉악한 족속을 제거할 것이다. 하물며 너는 평민 출신으로 농촌에서 일어나 불 지르고 겁탈하는 것을 좋은 계책으로 알고 살상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는 큰 죄만 있고 속죄할 수 있는 작은 착함도 없다.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또한 땅속의 귀신들도 이미 너를 가만히 죽이려고 의논하였을 것이니, 비록 네가 숨은 붙어 있어 혼이 논다고 하지만 벌써 정신은 달아났을 것이다.
무릇 사람의 일이란 스스로 아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내가 헛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니 너는 살펴서 잘 들어라.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는 덕이 깊어 더러운 것을 용납해 주고 은혜가 두터워 결점을 따지지 않아서 너에게 병권을 주고 지방을 맡겼거늘 너는 오히려 스스로 짐새(鴆)의 독을 품고 올빼미의 흉한 소리를 거두지 않아, 움직이면 사람을 물어뜯고 가면 주인을 보고 짖는 개와 같다.
이에 스스로 오묘한 (임금의) 덕화를 배반하고 군대가 자미성을 포위하여 공후 귀족들은 위험한 길로 달아나고 임금의 수레는 먼 지방으로 떠돌게 되었으니 너는 일찍 덕과 정의에 돌아올 줄을 모르고 다만 흉악한 짓만 늘어간다.
이에 성상께서 너에게 죄를 용서해 준 은혜가 있고, 너는 나라에 대하여 은혜를 저버린 죄가 있으니 반드시 머지않아 죽고 말 것인데, 어찌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느냐. 하물며 주나라 솥(周鼎)은 물어볼 것이 아니요, 한나라 궁궐이 어찌 훔쳐 머물 곳이겠느냐.
너의 생각은 끝내 어찌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다. 너는 듣지 못했느냐. <도덕경>에 말하기를, 회오리바람은 하루아침을 가지 못하고 소나기는 온종일을 갈 수 없다고 하였으니, 천지가 하는 일도 오히려 오래가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이 하는 일이겠는가.
또 듣지 못했는가. <춘추전>에 말하기를, 하늘이 아직 나쁜 자를 거짓 도와주는 것은 복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흉악함이 두터워져 벌을 내리려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너는 간사함을 감추고 흉악함을 숨겨서 죄악이 쌓이고 앙화가 가득하였음에도, 위험한 것을 편안히 여기고 미혹하여 돌이킬 줄 모르니, 이른바 제비가 천막 위에다 집을 짓고 (막이 불타는데도) 제멋대로 날아드는 것과 물고기가 솥 속에 노닐면서 바로 삶아지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우리는 뛰어난 군략을 모으고 여러 군사를 규합하여 용맹스런 장수는 구름처럼 날아들고 용감한 사내들은 비 쏟아지듯 모여들어 높고 큰 깃발은 초나라 변방의 바람을 에워싸고 전함과 누선은 오나라 강의 물결을 막고 끊었다.
도태위{(진나라 도간(陶侃)}처럼 적을 쳐부수는 데 날래고 양사공(수나라 楊素)처럼 엄숙함이 가히 신(神)이라 칭할 만하여 널리 팔방을 돌아보고 만리를 횡행하니 이미 이른바 타오르는 불을 널리 펴서 저 기러기 털을 태우고 태산을 높이 들어 새 알을 짓누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이제 금신(金神)이 계절을 맡았고 수백(水伯)이 우리 군사를 환영하는데, 가을바람은 엄숙히 죽이는 위엄을 도와주고 새벽 이슬은 저녁의 번잡한 기운을 씻어주니, 파도는 이미 잔잔해지고 도로는 곧 통하게 되었다. 석두성에 배의 벌이줄을 푸니 손권이 후군이 되었고, 현산 머리에 돛을 내리니 두예(杜預)가 앞장을 섰다.
서울을 수복하는 것은 기일을 넘긴다 해도 한 달이면 되겠지만, 다만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은 하느님의 깊은 인자함이요, 법을 굽혀서 은혜를 펴려는 것은 국가의 좋은 제도이다. 국가의 도적을 토벌하는 데는 사적인 원한을 생각지 말아야 하고 어두운 길을 헤매는 자를 깨우치는 데는 진실로 바른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한 장의 글을 날려서 너의 거꾸로 매달린 위급함을 풀어주려는 것이니 너는 미련한 짓을 하지 말고 일찍 기회를 보아 좋은 방책을 세워 잘못을 고치도록 해라. 만일 땅을 떼어 나누어 받아 나라를 열고 집을 보전하고, 몸과 머리가 나누어지는 것을 면하며 뛰어난 공명을 이루기를 원한다면, 얼굴 익은 벗들의 말을 믿지 말고 후손에게 영화를 전해 줄 것만을 생각하라.
이는 아녀자가 아는 체할 바가 아니요, 실은 대장부의 일이니 빨리 (가부를) 알릴 것이요, 쓸데없이 의심하지 말라. 나는 하늘을 우러러 명을 받았고 믿음은 맑은 물에 바탕하였으니 말이 떨어지면 반드시 메아리처럼 응할 것이며 은혜가 많아지고 원망이 깊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미쳐서 날뛰는 도당들에게 끌리어 취한 잠을 깨지 못하고 마치 (범아재비가) 수레에 항거하듯이 어리석은 고집을 부리다가는 곰을 때려잡고 표범을 납치한 우리 군사가 한 번 휘둘러 쳐부수어서 까마귀와 솔개같이 날뛰던 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갈 것이다.
너의 몸뚱이는 도끼날에 기름이 되고 뼈는 전차 밑에서 가루가 될 것이며 처자는 잡혀 죽고 종족은 주살될 것이다. 생각건대 (동탁처럼) 배(腹)를 불태울 때를 당해서는 (사슴처럼) 배꼽을 물어뜯는 후회를 하더라도 미치지 못 할까 두려우니, 너는 모름지기 진퇴를 헤아려보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라.
배반하다가 멸망하기보다는 어찌 귀순하여 영화롭게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다만 네가 바라는 바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니 장부가 할 일을 찾아 힘써서 표범의 무늬처럼 뚜렷하게 변하기를 기대할 것이요, 어리석은 사람의 생각을 고집하여 여우처럼 의심만 품지 말라. 아무개(高騈)는 고하노라.
이 글로써 선생의 이름은 천하에 떨쳤고 곧 이어 도통순관승무랑시어사내공봉(都統巡官乘務郞侍御史內供奉)으로 승차(陞差)되는 한편 26세 때에는 당나라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錦魚袋)를 하사받았다. 이때 軍務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이 뒤에 〈계원필경 桂苑筆耕〉 20권으로 엮어졌다.
28세에 본국에 돌아오려고 희종황제에게 장계를 올렸더니, 황제는 당이 국서를 가져가는 사신의 자격을 부여해주었으며, 당나라 문사들과 석별의 시를 지었는데 그중 최치원이 어린 나이에 낯선 땅 중국에 유학하여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고운(顧雲)이라는 친구가 시를 지어 송별하였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傍邊一點鷄林碧山孕秀生奇特十二乘船渡海來文章感動中華國十八 橫行戰詞苑一箭射破金門策”
내 듣건대 바다 위에 금자라 셋이 있어
머리마다 높고 높은 산을 이었다
그 산위에는 구슬` 자개의 궁궐과 황금 전각이요
산 아래에는 천리만리 가없는 넓은 바다로다
그 옆에 자리한 한 점 푸른 계림(鷄林)의 땅
자라산의 빼어난 정기 머금어 기이한 인재 태어났도돠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니
그의 문장 온 중국을 감동시켰다
열여덟에 과거장을 휩쓸고 다니더니
청 화살로 금문(金門) 깨고 급제하였다
위의 시 '금자라'는 금빛의 큰 자라를 말하는데, 신선이 살고 있는 봉래전(蓬萊殿)을 아래에서 떠받치고 있다고 한다. 신선이 살고 있다는 동해의 삼신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32년조 주석 참조할 것)
귀국 후의 활동
885년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에 의해 시독겸한림학사수병부시랑지서서감(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에 임명되어 외교문서 등의 작성을 담당했다. 이듬해 당나라에서 지은 저술들을 정리하여 왕에게 헌상했으며, 〈대숭복사비명 大崇福寺碑銘〉·〈진감국사비명 眞鑑國師碑銘〉등을 지었다. 이처럼 문장가로서 능력을 인정받기는 했으나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으로 당나라에서 배운 바를 자신의 뜻대로 펴볼 수가 없었다. 이에 외직을 청하여 대산(大山)·천령(天嶺)·부성(富城)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했다. 당시 신라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하대(下代)에 들어 중앙귀족들의 권력쟁탈과 함께 집권적인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지방세력의 반발과 자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889년(진성왕 3) 재정이 궁핍하여 주군(州郡)에 조세를 독촉한 것이 농민의 봉기로 이어지면서 신라사회는 전면적인 붕괴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891년 양길(梁吉)과 궁예(弓裔)가 동해안의 군현을 공략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다음해에는 견훤(甄萱)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최치원은 부성군 태수로 재직중이던 893년 당나라에 보내는 하정사(賀正使)로 임명되었으나 흉년이 들고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여 가지 못했다. 그 뒤 다시 입조사(入朝使)가 되어 당나라에 다녀왔다. 894년 2월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 조를 올렸다. 그가 올린 시무책의 내용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집권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사회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성왕은 이를 가납(嘉納)하고 그에게 아찬의 관등을 내렸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자체적인 체제정비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이 시무책은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897년 진성여왕의 양위(讓位)로 효공왕이 즉위했는데, 이때 진성여왕의 〈양위표 讓位表〉와 효공왕의 〈사사위표 謝嗣位表〉를 찬술하기도 했다.
그 뒤 당나라에 있을 때나 신라에 돌아와서나 모두 난세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는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 바다를 소요자방(逍遙自放)하며 지냈다. 그가 유람했던 곳으로는 경주 남산(南山), 강주(剛州) 빙산(氷山), 합주(陜州) 청량사(淸寺),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 별서(別墅) 등이 있다. 또 함양과 옥구, 부산의 해운대 등에는 그와 관련된 전승이 남아 있다. 만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모형(母兄)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지냈다. 904년(효공왕 8) 무렵 해인사 화엄원(華嚴院)에서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을 지었으며,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지었고 그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흥기할 때 비상한 인물이 반드시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을 알고 "계림(鷄林)은 황엽(黃葉)이요 곡령(鵠嶺)은 청송(靑松)"이라는 글을 보내 문안했다고 한다. 이는 후대의 가작(假作)인 것으로 보이나 신라말에 왕건을 지지한 희랑(希朗)과 교분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때 왕건을 지지한 후광으로 희랑대사는 그의 후원을 받아 고려초 해인사를 크게 중창한 기록이 있다.
사상과 문학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불교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비록 왕명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사(禪師)들의 비문을 찬술하기도 했다. 특히 〈봉암사지증대사비문 鳳巖寺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 선종사(禪宗史)를 3시기로 나누어 이해하게 하고 있다. 선종뿐만 아니라 교종인 화엄종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화엄종의 본산인 해인사 승려들과 교류하고 만년에는 그곳에 은거한 사실로부터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는 도교에도 일정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는데, 〈삼국사기〉에 인용된 〈난랑비서 鸞郞碑序〉에는 유·불·선에 대한 강령적인 이해가 나타나고 있다.
한편 문학 방면에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았다. 그의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으며, 시문은 평이근아(平易近雅)했다. 당나라에 있을 때 고운(顧雲)·나은(羅隱) 등의 문인과 교류했으며, 문명을 널리 떨쳐 〈신당서 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사륙집 四六集〉·〈계원필경〉이 소개되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 열전에 그가 입전(立傳)되지 않은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했다.
『신당서』예문지(藝文志)에는 "최치원의『사륙집(四六集』1권과『계원필경』20권이 있다"고 하고 주를 붙여 이르기를 "최치원은 고려 사람으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해 高騈의 종사관이 되었다"라고 했으니, 그의 이름이 중국에 알려진 것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또 그의 문집 30권이 세상에 유통되고 있다.
빈공과(賓貢科)는 당나라 과거제의 한 과(科)로서, 외국인을 상대로 한 것이다. 당시 신라인들이 많이 응시하여 합격했으며, 한때 그 석차를 둘러싸고 발해와 갈등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최치원은 많은 불교 관련 글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쌍계사진감선사탑비(雙溪寺眞鑑禪師塔碑)』,『성주사낭해화상탑비(聖住寺朗慧和尙塔碑』,『봉암사지증대사탑비(鳳岩寺智證大師塔碑)』,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등 이른바 '四山碑銘과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이 저명하다.
그 밖의 저술로는 문집 30권,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부석존자전 浮石尊者傳〉·〈석순응전 釋順應傳〉·〈석이정전 (釋利貞傳)> 등이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계원필경〉〈사산비명〉·〈법장화상전〉이 있으며, 〈동문선〉에 실린 시문 몇 편과 후대의 사적기(寺跡記) 등에 그가 지은 글의 편린이 전한다.
○ 기타 참고사항
최치원은 스스로 자신을 ‘유자(儒者)’로 자처하였다고는 하나 그의 사상은 유불선(儒佛仙)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그는 중국의 儒, 佛, 仙은 한민족의 본래 신교(神敎)가 다시 역수입된 것으로 보았다. 특히 그가 쓴 <난랑비 서문>은 한민족에 면면히 내려왔던 신교의 정신을 확연히 드러내주는데 여기에서 최치원은 신교가 유·불·선의 뿌리임을 밝히고 있다.
國有玄妙之道하니 曰風流라.
국유현묘지도 / 왈풍류
設敎之源이 備詳仙史하니 實內包含三敎하야 接化群生
설교지원 / 비상선사 / 실내포함삼교 / 접화군생
且如入則孝於家하고 出則忠於國은 魯司寇之旨也오
차여입즉효어가 / 출즉충어국 / 노사구지지야
處無爲之事하고 行不言之敎는 周柱史之宗也오
처무위지사 / 행불언지교 / 주주사지종야
諸惡莫作하고 諸善奉行은 竺乾太子之化也라.
제악막작 / 제선봉행 / 축건태자지화야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 난랑비 서문」)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가르침을 베푸는 근원은 선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거니와, 실로 삼교를 포함하여 접하는 모든 생명을 감화시키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보면, 이는 곧 집으로 들어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으로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가 가르쳤던 뜻이요, 매사에 무위로 대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함은 노자의 가르침이며, 악한 일을 하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는 것은 석가모니의 교화니라.”
최치원은 문인으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仙人으로서의 구도행 역시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말년에는 시해법의 일종인 ‘가야도인법’을 저술하여 전하였다고 한다. 신라 중기 화랑인 ‘물계자’나 사랑(四郞)의 전설에서 보여지 듯, 화랑의 정신은 멋과 풍류였다.
『청학집靑鶴集』을 쓴 조여적은 조선 단학의 계보가 광성자(廣成子)-명유(明由)-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문박-영랑-보덕-도선-최치원-위한조-편운자(片運子)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2)
반면 『해동전도록』에서는 태상노군에서 종리권 여동빈으로 이어지는 중국 도교가 종리권에서 당나라 유학생이었던 최승우를 거쳐 최치원을 통해 우리나라로 흘러 들어와 김시습 등으로 이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최치원은 비록 신라를 다시 부흥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자신이 진정한 풍류객의 길을 걸었고, 뛰어난 필치로 화랑의 정신을 후세에 전했다는 점에서 신라의 마지막 화랑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최치원은 후일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발만 남긴 채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져서 후인들이 유선(儒仙)’이라 부른다.
해인사 홍류동의 최치원 선생 독서당의 주련(柱聯)에 새겨진 <가야산 독서당에서 짓다>라는 이 시는 선생이 가야산에 은둔하고 있을 때 지은 칠언절구(七言絶句) 둔세시(遁世詩)로서 농산정(籠山亭 경남문화제자료 제172호) 건너편의 제시석(題詩石)이라 불리는 석벽(石壁)에도 새겨져 있다.
題伽倻山讀書堂
가야산 독서당에서 짓다
狂 噴 疊 石 吼 重 巒 광분첩석후중만
겹겹이 바위틈을 미친 듯이 내뿜어 뭇 봉우리를 울리니
人 語 難 分 咫 尺 間 인어난분지척간
사람의 말소리를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常 恐 是 非 聲 到 耳 상공시비성도이
늘 옳고 그름을 다투는 소리가 귀에 이를까 두려워
故 敎 流 水 盡 籠 山 고교류수진롱산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다 둘러놓았다네,
가야산 홍류동 계곡을 미친 듯이 흘러내리는 계천수가 괴석봉우리에 부딪치는 물소리 때문에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말소리조차 알아들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다투는 소리가 물소리에 잠겼지만, 선생은 또 다시 시비성(是非聲)이 들려올까 두렵다고 했다. 그래서 마지막 구절에서는 홍류동 계곡 물을 돌려 자신이 사는 곳과 산을 두르게 했다고 한 것이다. 대장부란 무릇 뜻을 얻으면 백성들과 함께 하여 경륜을 펴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한다고 하는데, 큰 재주를 가지고도 세상이 용납하지 않으니 물러날 수밖에 없다 하겠다. 광분하는 저 물소리 이면에는 선각자의 분노의 소리가 섞여있을 것 같지 않은가?
다음은 선생이 홍류동을 떠나기 전 마지막 남긴 시다. 이 시가 전하는 메시지로 보면 그는 이 길로 가야산으로 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一入靑山更不還
崔致遠의 遺言 詩
僧乎莫道靑山好 스님아! 푸른 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라
山好何事更出山 산이 좋은데 무슨 일로 다시 산을 나오는가.
試看他日吾踪跡 시험 삼아 이다음에 나의 종적을 보아라.
一入靑山更不還 한 번 푸른 산에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명예도 탐욕도 훨훨 벗어 청산에 씻고, 시끄러운 세상 떠나 홍류동에 외로이 사시더니, 어느 날 바람처럼 어디로 사라지셨을까?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지팡이도 또한 살아 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하라"는 유언만 남기고 지금의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유유히 사라져 종적을 감추셨으니, 지금껏 가야산 신선으로 살고 계시는가, 그가 심은 천년 회나무는 오늘도 그 쪽을 바라보며 한가로이 그 주인을 기다리고 있건만```
선생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1020년(현종 11)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성묘(聖廟:孔子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1023년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태인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제향되었다.
<참고자료>
『고운최치원선생문집』
『삼국사기』권46(열전 제6) 최치원
「최치원의 삼교융화사상에 관한 연구」, 하갑룡, 부산대학교
「고운 최치원 시집1」, 김진영 외역, 민속원, 1997
「신증동국여지승람」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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