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고운 최치원 선생---[사학회회장 이동성 글]---도천 최평열

 

○ 姓名 : 한글 최 치원 한문 崔致遠

○ 本貫 : 경주 ○ 字 : 孤雲(혹은 海雲, 海夫)

○ 生(출생년도) : 857년 ○ 卒(별세년도) : 미상

 

○ 學行(수학과정 또는 학맥)

 

최치원의 家系

 

최치원은 본래 신라의 王京(지금의 경주)의 사량부(沙梁部) 또는 본피부(本彼部) 사람으로 후기 신라의 진보적 시문학(詩文學)을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견일(肩逸)의 아들로 알려져 있고,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 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 출신이다.

최치원은 857년<(憲安王 1년), (문성왕 19년)> 왕경인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계에 대하여 <崔致遠 字 孤雲 或 海雲 王京沙粱部人也 史傳泯不知其世系>,『삼국사기』권 46열전 6, 최치원 조,

致遠乃 本彼部人也 今黃龍寺南昧呑寺南有古墟 云是崔候古宅也 殆明矣

(『삼국유사혁거세 왕조 권1

위와 같이 삼국사기에서는 "최치원의 자는 고운 혹은 해운이요, 왕경의 사량부 사람이다. 흔적이 없어져 그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서는 "최치원은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황룡사(皇龍寺)와 매탄사(昧呑寺) 남쪽에 그의 집터가 남아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삼국사기』에는 사량부인으로, 『삼국유사』에는 본피부(本彼部)인으로 상이하게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그의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肩逸)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여 그 공로로 헌강왕으로부터 견일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그 공로가 원성왕을 위해 지은 발원문(發願文)이다. 발원문은 불교에서 수행자가 정진할 때 세운 서원(誓願)이나 시주(施主)의 소원을 적은 글이다.

최치원의 아버지 견일이 숭복사를 창건하는데 관여하고, 원성왕의 극락왕생 천도를 위해 발원문까지 지은 것을 보면, 상당한 글 솜씨를 지녔음은 물론, 신라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최치원의 형제로 그의 형 현준(賢俊)이 있었고 종제(從弟)가 있었는데, 그의 형 현준은 해인사의 승려로 있었다. 종제로는 최서원(崔棲遠)과 최인연(崔仁渷)의 활동이 보인다.

이러한 가계를 가진 그는 6두품 출신이었다.

신라 골품제의 관등은 순수 왕족혈계인 성골(聖骨)과 왕족과 혼열계인 진골(眞骨)이 상위 관등을 차지하여 6두품은 신라 17관등 중 제 6관등 까지 승진이 제한되어 있었다. 이 점은 후에 그의 정치이념과 종교관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 동안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열심히 공부하도록 당부한 것을 보면 그는 신라 골품제에 대한 자신의 신분적 열세를 만회하는 방편으로 당나라 유학을 선택하였다고 보여진다.

〇 문행(문집목록, 주요 문적 등)

 

입당(入唐)과 문행 기록

 

최치원은 12세에 당으로 건너가 18세에 급제하여 어려서 침착하고 영민했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열두살이 되자 배편으로 당에 들어가 유학하고자 하였다. 이에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고 가거든 힘써 하여라"라고 하였다. 868년(경문왕 8)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서경(西京:長安)에 체류한 지 6년 만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시(主試)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 뒤 동도(東都:洛陽)에서 시작(詩作)에 몰두했는데, 이때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雜詩賦)〉 30수 1권 등을 지었다. 876년(헌강왕 2) 강남도(江南道) 선주(宣州)의 표수현위(漂水縣尉)로 임명되었다. 당시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이 후에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5권으로 엮어졌다. 877년 현위를 사직하고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입산했으나 서량(書糧)이 떨어져 양양(襄陽) 이위(李蔚)의 도움을 받았고, 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高騈에게 도움을 청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했다. 879년 高騈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황소(黃巢) 토벌에 나설 때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아 표장(表狀)·서계(書啓) 등을 작성했다. 880년 高騈의 천거로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都統巡官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인 881년 黃巢의 반란이 일어나자 朝廷에서 준남절도사 高騈에게 諸道行營兵馬都統을 命하여 난리를 討伐케 했을 때 선생은 황소를 치는 다음과 같은 檄文을 지었으니 『 不惟天下之人皆思顯戮抑亦地中之鬼己議陰주(천하의 모든 사람이 모두 너를 죽여야 한다고 할 뿐만 아니라 저 땅 밑에 있는 귀신들 까지도 너를 죽이기로 議論했으리) 황소는 이 구절을 보고 저도 모르게 床에서 떨어졌다 한다.

<『삼국사기』권 46열전 제6 최치원편>에 다음과 같이 그 문장이 실려 있다.

 

檄黃巢書 (討黃巢檄文)

 

廣明二年七月八日 諸道都統檢校太衛某 告黃巢 夫守正修常曰道 臨危制變曰權 智者成之於順時 愚者敗之於逆理 然則雖百年繫命 生死難期而萬事主心 是非可辨 今我以王師則有征無戰 軍政則先惠後誅將期剋復上京 固且敷陳大信 敬承嘉諭 用戢奸謀 且汝素是遐氓 驟爲勅敵 偶因乘勢 輒敢亂常 遂乃包藏禍心 竊弄神器 侵凌城闕 穢黷宮闈 旣當罪極滔天 必見敗深塗地 噫 唐虞己降 苗扈弗賓 無良無賴之徒 不義不忠之軰 爾曹所作 何代而無 遠則有劉曜王敦 覬覦晋室 近則有祿山朱泚 吠噪皇家 彼皆或手 握强兵 或身居重任 叱吒則雷奔電走 暄呼則霧塞煙橫 然猶暫逞奸圖 終殲醜類 日輸濶輾 豈縱妖氛 天網高懸 必除兇族 況汝出自閭閻之末 起於隴畝之間 以焚劫爲良謀 以殺傷爲急務 有大愆可以擢髮 無小善可以贖身 不唯天下之人 皆思顯戮 抑亦地中之鬼 己議陰誅 縱饒假氣遊魂 早合亡神奪魄 凡爲人事 莫若自知 吾不妄言 汝須審聽 比者 我國家德深含垢 恩重棄瑕 援爾節旄 寄爾方鎭 爾猶自懷鴆毒 不歛 梟聲 動則齧人 行唯吠主 乃至身負玄化 兵纏紫薇 公候則奔竄危途 警蹕則巡遊園地 不能早歸德義 但養頑兇 斯則聖上於汝 有赦罪之恩 汝則於國 有辜恩之罪 必當死亡無日 何不畏懼于天 況周鼎非 發問之端 漢宮豈倫安之所 不知爾意 終欲奚爲 汝不聽乎 道德經云 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天地尙不能久而況於人乎或乎字無 又不聽乎 春秋傳曰 天之假助不善 非祚之也 厚其凶惡而降之罰 今汝藏奸匿暴 惡積禍盈 危以自安 迷而不復 所謂燕巢幕上 漫恣騫飛 魚戱鼎中 則看燋爛 我緝熙雄略 糺合諸軍 猛將雲飛 勇夫雨集 高隆大旆 圍將楚塞之風 戰艦樓船 塞斷吳江之浪 淘汰尉銳於破敵 楊司空嚴可稱神 旁脁八維 橫行萬里 旣謂廣張烈火 爇彼鴻毛 何殊高擧泰山 壓其鳥卵 則日金神御節 水伯迎師 商風助肅殺之威 晨露滌昏煩之氣 波濤旣息 道路卽通 當解 孫權後殿 佇落帆於峴首 杜預前驅 收復京都 剋期旬朔 但以好生惡殺 上帝深仁 屈法申恩 大朝令典 討官賊者 不懷私忿 諭迷途者 固在直言 飛吾折簡之詞 解爾倒懸之急 汝其無成膠柱 早學見機 善者爲謀 過而能改 若願分茅裂士분 開國承家 免身首之橫分 得功名之卓立 無取信於面友 可傳榮於耳孫 此非兒女子所知 實乃丈夫之事 早須相報 無用見疑 我命戴皇天 信資白水 必須言發響應 不可恩多怨深 或若狂走所牽 酣眠未寤 猶將拒轍 固欲守株 則乃此熊拉豹之師 一麾撲滅 烏合鴟張之衆 四散分飛 身爲齋斧之膏 骨作戎車之粉 妻兒被戮 宗族見誅 想當燃腹之時 必恐噬臍不及 爾須酌量進退 分別否臧 與其叛而滅亡 葛若順而榮貴 但所望者 必能致之 勉尋壯士之規 立期豹變 無執愚夫之慮 坐守狐疑 某告

 

황소(黃巢)에게 보내는 격문

 

광명(廣明)2년(881) 7월 8일에 제도 도통 검교태위 아무개(高騈)는 황소에게 알린다.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닦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하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에 순응함으로써 성공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이치를 거스르는 것으로서 패하는 것이다. 그러니 비록 백년의 수명에 죽고 사는 것을 기약하기는 어렵지만, 모든 일은 마음으로 그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임금의 군사는 정벌을 하지만 싸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며, 군정(軍政)은 은혜를 앞세우고 죽이는 것을 뒤로 한다.

앞으로 기약하되 상경(上京)을 수복하고 참으로 또한 큰 신의를 펴고자 하여 삼가 천자의 명령을 받들어 간사한 꾀를 치우려 한다. 또 너희는 본디 먼 시골 백성으로 갑자기 억센 도적이 되어 우연히 시세를 타고 문득 감히 강상(綱常)을 어지럽혔다. 마침내 재앙을 일으키는 마음을 품고 잠깐 신성한 권능을 희롱하고 도성의 궁궐을 침략하여 궁문을 더럽혔다.

이미 죄가 하늘에 닿을 만큼 극도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여지없는 패망을 당하고 말 것이다. 아, 요순 이래로 묘족(苗族)과 호족(扈族)이 복종하지 않았는데, 양심 없고 충의 없는 무리가 바로 저희들이 아니겠는가,

멀리는 유요(劉曜)와 왕돈(王敦)이 진(晋)나라의 왕실을 엿보았고, 가까이는 안록산(安祿山)과 주자(朱泚)가 황가(皇家)를 시끄럽게 하였다. 그들은 모두 강한 군대를 장악하였고, 또한 중요한 자리에 있어 호령을 하면 우뢰와 번개가 치듯 하였고, 시끄럽게 떠들면 안개와 연기가 자욱하듯 하였지만, 잠깐 동안 못된 짓을 하다가 끝내 추한 족류들이 섬멸되었다.

햇볕이 활짝 퍼졌으니 어찌 요망한 기운을 그대로 두겠으며, 하늘의 그물은 높이 쳐졌으니 반드시 흉악한 족속을 제거할 것이다. 하물며 너는 평민 출신으로 농촌에서 일어나 불 지르고 겁탈하는 것을 좋은 계책으로 알고 살상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는 큰 죄만 있고 속죄할 수 있는 작은 착함도 없다.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또한 땅속의 귀신들도 이미 너를 가만히 죽이려고 의논하였을 것이니, 비록 네가 숨은 붙어 있어 혼이 논다고 하지만 벌써 정신은 달아났을 것이다.

 

무릇 사람의 일이란 스스로 아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내가 헛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니 너는 살펴서 잘 들어라.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는 덕이 깊어 더러운 것을 용납해 주고 은혜가 두터워 결점을 따지지 않아서 너에게 병권을 주고 지방을 맡겼거늘 너는 오히려 스스로 짐새(鴆)의 독을 품고 올빼미의 흉한 소리를 거두지 않아, 움직이면 사람을 물어뜯고 가면 주인을 보고 짖는 개와 같다.

이에 스스로 오묘한 (임금의) 덕화를 배반하고 군대가 자미성을 포위하여 공후 귀족들은 위험한 길로 달아나고 임금의 수레는 먼 지방으로 떠돌게 되었으니 너는 일찍 덕과 정의에 돌아올 줄을 모르고 다만 흉악한 짓만 늘어간다.

이에 성상께서 너에게 죄를 용서해 준 은혜가 있고, 너는 나라에 대하여 은혜를 저버린 죄가 있으니 반드시 머지않아 죽고 말 것인데, 어찌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느냐. 하물며 주나라 솥(周鼎)은 물어볼 것이 아니요, 한나라 궁궐이 어찌 훔쳐 머물 곳이겠느냐.

너의 생각은 끝내 어찌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다. 너는 듣지 못했느냐. <도덕경>에 말하기를, 회오리바람은 하루아침을 가지 못하고 소나기는 온종일을 갈 수 없다고 하였으니, 천지가 하는 일도 오히려 오래가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이 하는 일이겠는가.

또 듣지 못했는가. <춘추전>에 말하기를, 하늘이 아직 나쁜 자를 거짓 도와주는 것은 복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흉악함이 두터워져 벌을 내리려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너는 간사함을 감추고 흉악함을 숨겨서 죄악이 쌓이고 앙화가 가득하였음에도, 위험한 것을 편안히 여기고 미혹하여 돌이킬 줄 모르니, 이른바 제비가 천막 위에다 집을 짓고 (막이 불타는데도) 제멋대로 날아드는 것과 물고기가 솥 속에 노닐면서 바로 삶아지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우리는 뛰어난 군략을 모으고 여러 군사를 규합하여 용맹스런 장수는 구름처럼 날아들고 용감한 사내들은 비 쏟아지듯 모여들어 높고 큰 깃발은 초나라 변방의 바람을 에워싸고 전함과 누선은 오나라 강의 물결을 막고 끊었다.

도태위{(진나라 도간(陶侃)}처럼 적을 쳐부수는 데 날래고 양사공(수나라 楊素)처럼 엄숙함이 가히 신(神)이라 칭할 만하여 널리 팔방을 돌아보고 만리를 횡행하니 이미 이른바 타오르는 불을 널리 펴서 저 기러기 털을 태우고 태산을 높이 들어 새 알을 짓누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이제 금신(金神)이 계절을 맡았고 수백(水伯)이 우리 군사를 환영하는데, 가을바람은 엄숙히 죽이는 위엄을 도와주고 새벽 이슬은 저녁의 번잡한 기운을 씻어주니, 파도는 이미 잔잔해지고 도로는 곧 통하게 되었다. 석두성에 배의 벌이줄을 푸니 손권이 후군이 되었고, 현산 머리에 돛을 내리니 두예(杜預)가 앞장을 섰다.

서울을 수복하는 것은 기일을 넘긴다 해도 한 달이면 되겠지만, 다만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은 하느님의 깊은 인자함이요, 법을 굽혀서 은혜를 펴려는 것은 국가의 좋은 제도이다. 국가의 도적을 토벌하는 데는 사적인 원한을 생각지 말아야 하고 어두운 길을 헤매는 자를 깨우치는 데는 진실로 바른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한 장의 글을 날려서 너의 거꾸로 매달린 위급함을 풀어주려는 것이니 너는 미련한 짓을 하지 말고 일찍 기회를 보아 좋은 방책을 세워 잘못을 고치도록 해라. 만일 땅을 떼어 나누어 받아 나라를 열고 집을 보전하고, 몸과 머리가 나누어지는 것을 면하며 뛰어난 공명을 이루기를 원한다면, 얼굴 익은 벗들의 말을 믿지 말고 후손에게 영화를 전해 줄 것만을 생각하라.

이는 아녀자가 아는 체할 바가 아니요, 실은 대장부의 일이니 빨리 (가부를) 알릴 것이요, 쓸데없이 의심하지 말라. 나는 하늘을 우러러 명을 받았고 믿음은 맑은 물에 바탕하였으니 말이 떨어지면 반드시 메아리처럼 응할 것이며 은혜가 많아지고 원망이 깊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미쳐서 날뛰는 도당들에게 끌리어 취한 잠을 깨지 못하고 마치 (범아재비가) 수레에 항거하듯이 어리석은 고집을 부리다가는 곰을 때려잡고 표범을 납치한 우리 군사가 한 번 휘둘러 쳐부수어서 까마귀와 솔개같이 날뛰던 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갈 것이다.

너의 몸뚱이는 도끼날에 기름이 되고 뼈는 전차 밑에서 가루가 될 것이며 처자는 잡혀 죽고 종족은 주살될 것이다. 생각건대 (동탁처럼) 배(腹)를 불태울 때를 당해서는 (사슴처럼) 배꼽을 물어뜯는 후회를 하더라도 미치지 못 할까 두려우니, 너는 모름지기 진퇴를 헤아려보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라.

배반하다가 멸망하기보다는 어찌 귀순하여 영화롭게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다만 네가 바라는 바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니 장부가 할 일을 찾아 힘써서 표범의 무늬처럼 뚜렷하게 변하기를 기대할 것이요, 어리석은 사람의 생각을 고집하여 여우처럼 의심만 품지 말라. 아무개(高騈)는 고하노라.

 

이 글로써 선생의 이름은 천하에 떨쳤고 곧 이어 도통순관승무랑시어사내공봉(都統巡官乘務郞侍御史內供奉)으로 승차(陞差)되는 한편 26세 때에는 당나라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錦魚袋)를 하사받았다. 이때 軍務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이 뒤에 〈계원필경 桂苑筆耕〉 20권으로 엮어졌다.

 

 

28세에 본국에 돌아오려고 희종황제에게 장계를 올렸더니, 황제는 당이 국서를 가져가는 사신의 자격을 부여해주었으며, 당나라 문사들과 석별의 시를 지었는데 그중 최치원이 어린 나이에 낯선 땅 중국에 유학하여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고운(顧雲)이라는 친구가 시를 지어 송별하였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傍邊一點鷄林碧山孕秀生奇特十二乘船渡海來文章感動中華國十八 橫行戰詞苑一箭射破金門策”

 

내 듣건대 바다 위에 금자라 셋이 있어

머리마다 높고 높은 산을 이었다

그 산위에는 구슬` 자개의 궁궐과 황금 전각이요

산 아래에는 천리만리 가없는 넓은 바다로다

그 옆에 자리한 한 점 푸른 계림(鷄林)의 땅

자라산의 빼어난 정기 머금어 기이한 인재 태어났도돠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니

그의 문장 온 중국을 감동시켰다

열여덟에 과거장을 휩쓸고 다니더니

청 화살로 금문(金門) 깨고 급제하였다

 

위의 시 '금자라'는 금빛의 큰 자라를 말하는데, 신선이 살고 있는 봉래전(蓬萊殿)을 아래에서 떠받치고 있다고 한다. 신선이 살고 있다는 동해의 삼신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32년조 주석 참조할 것)

 

귀국 후의 활동

 

885년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에 의해 시독겸한림학사수병부시랑지서서감(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에 임명되어 외교문서 등의 작성을 담당했다. 이듬해 당나라에서 지은 저술들을 정리하여 왕에게 헌상했으며, 〈대숭복사비명 大崇福寺碑銘〉·〈진감국사비명 眞鑑國師碑銘〉등을 지었다. 이처럼 문장가로서 능력을 인정받기는 했으나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으로 당나라에서 배운 바를 자신의 뜻대로 펴볼 수가 없었다. 이에 외직을 청하여 대산(大山)·천령(天嶺)·부성(富城)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했다. 당시 신라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하대(下代)에 들어 중앙귀족들의 권력쟁탈과 함께 집권적인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지방세력의 반발과 자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889년(진성왕 3) 재정이 궁핍하여 주군(州郡)에 조세를 독촉한 것이 농민의 봉기로 이어지면서 신라사회는 전면적인 붕괴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891년 양길(梁吉)과 궁예(弓裔)가 동해안의 군현을 공략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다음해에는 견훤(甄萱)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최치원은 부성군 태수로 재직중이던 893년 당나라에 보내는 하정사(賀正使)로 임명되었으나 흉년이 들고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여 가지 못했다. 그 뒤 다시 입조사(入朝使)가 되어 당나라에 다녀왔다. 894년 2월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 조를 올렸다. 그가 올린 시무책의 내용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집권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사회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성왕은 이를 가납(嘉納)하고 그에게 아찬의 관등을 내렸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자체적인 체제정비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이 시무책은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897년 진성여왕의 양위(讓位)로 효공왕이 즉위했는데, 이때 진성여왕의 〈양위표 讓位表〉와 효공왕의 〈사사위표 謝嗣位表〉를 찬술하기도 했다.

그 뒤 당나라에 있을 때나 신라에 돌아와서나 모두 난세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는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 바다를 소요자방(逍遙自放)하며 지냈다. 그가 유람했던 곳으로는 경주 남산(南山), 강주(剛州) 빙산(氷山), 합주(陜州) 청량사(淸寺),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 별서(別墅) 등이 있다. 또 함양과 옥구, 부산의 해운대 등에는 그와 관련된 전승이 남아 있다. 만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모형(母兄)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지냈다. 904년(효공왕 8) 무렵 해인사 화엄원(華嚴院)에서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을 지었으며,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지었고 그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흥기할 때 비상한 인물이 반드시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을 알고 "계림(鷄林)은 황엽(黃葉)이요 곡령(鵠嶺)은 청송(靑松)"이라는 글을 보내 문안했다고 한다. 이는 후대의 가작(假作)인 것으로 보이나 신라말에 왕건을 지지한 희랑(希朗)과 교분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때 왕건을 지지한 후광으로 희랑대사는 그의 후원을 받아 고려초 해인사를 크게 중창한 기록이 있다.

 

사상과 문학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불교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비록 왕명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사(禪師)들의 비문을 찬술하기도 했다. 특히 〈봉암사지증대사비문 鳳巖寺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 선종사(禪宗史)를 3시기로 나누어 이해하게 하고 있다. 선종뿐만 아니라 교종인 화엄종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화엄종의 본산인 해인사 승려들과 교류하고 만년에는 그곳에 은거한 사실로부터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는 도교에도 일정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는데, 〈삼국사기〉에 인용된 〈난랑비서 鸞郞碑序〉에는 유·불·선에 대한 강령적인 이해가 나타나고 있다.

 

한편 문학 방면에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았다. 그의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으며, 시문은 평이근아(平易近雅)했다. 당나라에 있을 때 고운(顧雲)·나은(羅隱) 등의 문인과 교류했으며, 문명을 널리 떨쳐 〈신당서 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사륙집 四六集〉·〈계원필경〉이 소개되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 열전에 그가 입전(立傳)되지 않은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했다.

『신당서』예문지(藝文志)에는 "최치원의『사륙집(四六集』1권과『계원필경』20권이 있다"고 하고 주를 붙여 이르기를 "최치원은 고려 사람으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해 高騈의 종사관이 되었다"라고 했으니, 그의 이름이 중국에 알려진 것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또 그의 문집 30권이 세상에 유통되고 있다.

빈공과(賓貢科)는 당나라 과거제의 한 과(科)로서, 외국인을 상대로 한 것이다. 당시 신라인들이 많이 응시하여 합격했으며, 한때 그 석차를 둘러싸고 발해와 갈등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최치원은 많은 불교 관련 글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쌍계사진감선사탑비(雙溪寺眞鑑禪師塔碑)』,『성주사낭해화상탑비(聖住寺朗慧和尙塔碑』,『봉암사지증대사탑비(鳳岩寺智證大師塔碑)』,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등 이른바 '四山碑銘과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이 저명하다.

그 밖의 저술로는 문집 30권,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부석존자전 浮石尊者傳〉·〈석순응전 釋順應傳〉·〈석이정전 (釋利貞傳)> 등이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계원필경〉〈사산비명〉·〈법장화상전〉이 있으며, 〈동문선〉에 실린 시문 몇 편과 후대의 사적기(寺跡記) 등에 그가 지은 글의 편린이 전한다.

 

○ 기타 참고사항

 

 최치원은 스스로 자신을 ‘유자(儒者)’로 자처하였다고는 하나 그의 사상은 유불선(儒佛仙)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그는 중국의 儒, 佛, 仙은 한민족의 본래 신교(神敎)가 다시 역수입된 것으로 보았다. 특히 그가 쓴 <난랑비 서문>은 한민족에 면면히 내려왔던 신교의 정신을 확연히 드러내주는데 여기에서 최치원은 신교가 유·불·선의 뿌리임을 밝히고 있다.

 

 國有玄妙之道하니 曰風流라.

 국유현묘지도 / 왈풍류

 設敎之源이 備詳仙史하니 實內包含三敎하야 接化群生

 설교지원 / 비상선사 / 실내포함삼교 / 접화군생

 且如入則孝於家하고 出則忠於國은 魯司寇之旨也오

 차여입즉효어가 / 출즉충어국 / 노사구지지야

 處無爲之事하고 行不言之敎는 周柱史之宗也오

 처무위지사 / 행불언지교 / 주주사지종야

 諸惡莫作하고 諸善奉行은 竺乾太子之化也라.

 제악막작 / 제선봉행 / 축건태자지화야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 난랑비 서문」)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가르침을 베푸는 근원은 선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거니와, 실로 삼교를 포함하여 접하는 모든 생명을 감화시키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보면, 이는 곧 집으로 들어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으로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가 가르쳤던 뜻이요, 매사에 무위로 대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함은 노자의 가르침이며, 악한 일을 하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는 것은 석가모니의 교화니라.”

 

최치원은 문인으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仙人으로서의 구도행 역시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말년에는 시해법의 일종인 ‘가야도인법’을 저술하여 전하였다고 한다. 신라 중기 화랑인 ‘물계자’나 사랑(四郞)의 전설에서 보여지 듯, 화랑의 정신은 멋과 풍류였다.

『청학집靑鶴集』을 쓴 조여적은 조선 단학의 계보가 광성자(廣成子)-명유(明由)-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문박-영랑-보덕-도선-최치원-위한조-편운자(片運子)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2)

반면 『해동전도록』에서는 태상노군에서 종리권 여동빈으로 이어지는 중국 도교가 종리권에서 당나라 유학생이었던 최승우를 거쳐 최치원을 통해 우리나라로 흘러 들어와 김시습 등으로 이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최치원은 비록 신라를 다시 부흥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자신이 진정한 풍류객의 길을 걸었고, 뛰어난 필치로 화랑의 정신을 후세에 전했다는 점에서 신라의 마지막 화랑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최치원은 후일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발만 남긴 채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져서 후인들이 유선(儒仙)’이라 부른다.

해인사 홍류동의 최치원 선생 독서당의 주련(柱聯)에 새겨진 <가야산 독서당에서 짓다>라는 이 시는 선생이 가야산에 은둔하고 있을 때 지은 칠언절구(七言絶句) 둔세시(遁世詩)로서 농산정(籠山亭 경남문화제자료 제172호) 건너편의 제시석(題詩石)이라 불리는 석벽(石壁)에도 새겨져 있다.

 

 題伽倻山讀書堂        

가야산 독서당에서 짓다

 

狂 噴 疊 石 吼 重 巒   광분첩석후중만

겹겹이 바위틈을 미친 듯이 내뿜어 뭇 봉우리를 울리니

 

人 語 難 分 咫 尺 間  인어난분지척간

사람의 말소리를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常 恐 是 非 聲 到 耳  상공시비성도이

늘 옳고 그름을 다투는 소리가 귀에 이를까 두려워

 

故 敎 流 水 盡 籠 山  고교류수진롱산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다 둘러놓았다네,

 

가야산 홍류동 계곡을 미친 듯이 흘러내리는 계천수가 괴석봉우리에 부딪치는 물소리 때문에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말소리조차 알아들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다투는 소리가 물소리에 잠겼지만, 선생은 또 다시 시비성(是非聲)이 들려올까 두렵다고 했다. 그래서 마지막 구절에서는 홍류동 계곡 물을 돌려 자신이 사는 곳과 산을 두르게 했다고 한 것이다. 대장부란 무릇 뜻을 얻으면 백성들과 함께 하여 경륜을 펴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한다고 하는데, 큰 재주를 가지고도 세상이 용납하지 않으니 물러날 수밖에 없다 하겠다. 광분하는 저 물소리 이면에는 선각자의 분노의 소리가 섞여있을 것 같지 않은가?

다음은 선생이 홍류동을 떠나기 전 마지막 남긴 시다. 이 시가 전하는 메시지로 보면 그는 이 길로 가야산으로 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一入靑山更不還

崔致遠의 遺言 詩

僧乎莫道靑山好  스님아! 푸른 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라

山好何事更出山  산이 좋은데 무슨 일로 다시 산을 나오는가.

試看他日吾踪跡  시험 삼아 이다음에 나의 종적을 보아라.

一入靑山更不還  한 번 푸른 산에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명예도 탐욕도 훨훨 벗어 청산에 씻고, 시끄러운 세상 떠나 홍류동에 외로이 사시더니, 어느 날 바람처럼 어디로 사라지셨을까?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지팡이도 또한 살아 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하라"는 유언만 남기고 지금의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유유히 사라져 종적을 감추셨으니, 지금껏 가야산 신선으로 살고 계시는가, 그가 심은 천년 회나무는 오늘도 그 쪽을 바라보며 한가로이 그 주인을 기다리고 있건만```

 

선생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1020년(현종 11)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성묘(聖廟:孔子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1023년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태인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제향되었다.

 

 

 <참고자료>

『고운최치원선생문집』

 『삼국사기』권46(열전 제6) 최치원

 「최치원의 삼교융화사상에 관한 연구」, 하갑룡, 부산대학교

 「고운 최치원 시집1」, 김진영 외역, 민속원, 1997

「신증동국여지승람」

그 외,

 

 합천군 홍류동 농산정 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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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류동 농산정 

 

 

                                                                             

                                                                             (해인사 농산정)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최치원(崔致遠 857-?)

 

                                          

狂噴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하니 : 층층 바위돌에 분출하고 겹겹 산에 포효하는 물이니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이라 : 가까운 곳 사람의 말소리조차 구별하기 어렵네.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하여 : 시비 가리는 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서

故敎流水盡籠山(고교유수진농산)이라 : 일부러 흐르는 물더러 온 산을 돌게 하네.

 

 

              * 噴내뿜을 분 疊포갤 첩 吼울부짖을 후 巒이어진산 만 咫가까울 지 籠바구니 롱

 

 

 

    오늘은 이번 2011년 6월 11일(토) 서예세상 정기답사지인 해인사에 있는 농산정을 읊은

    최치원의 시를 감상하겠습니다.

    최고운의 이 시는 작가 스스로 농산정에 앉아서 쏟아지는 물줄기와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하고

    자신의 입장을 이에 빚대어 노래한 것입니다. 최치원은 유가로서, 불가로서, 도가로서

    삼교를 융회관통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서예가입니다.

    농산정 앞에는 최고운의 글씨로 일컬어지는 전지 한 장 크기의 행초서가 마애각서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되면 현장에서 탁본도 해 볼 생각입니다...

 

 

 

 

  삼도헌과 함께 맛보기 


 1구에서는 해인사 입구 매표소를 지나 수백미터 올라가다 왼쪽을 보면 농산정이 보이는데 거기서 보는 자연풍광을 묘사하고 있지요. 산골을 흐르는 물소리의 기세와 그 소리를 생생하게 표현함으로써, 그가 서있는 공간이 작자가 바라는 현실 세계와 멀리 떨어진 깊고 조용한 곳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직접 농산정에 서보면 마치 한 폭의 그림같은 경치에 무릎을 치게 됩니다.

 

 

 2구에서는 미친 듯 성난 듯이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물의 기세를 묘사하고 있지요. 그 물소리는 마치 호랑이나 사자가 울부짖듯 하고 너무 세차고 줄기차서 고요한 산골짜기를 소리로 가득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곁(咫尺間)에서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人語)조차 알아들을 수 없을(難分) 정도이지요. 실제 해인사 농산정에 앉아보면 실감이 납니다. 여기서는 산속 물소리로 가까이 있는 사람의 말소리마저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현을 함으로써, 1구에서 조성된 공간이 2구에서도 세상과 담을 쌓고 있는 공간임을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3구에서 작자는 자신에게 실망과 상처를 준 인간세상의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에 대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지요. 그래서 그는 항상(常) 두려워한다(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목숨 걸고 따지는 시비소리(是非聲)로 그 소리가 귀(耳)에 들리는 것(到)이 싫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인간의 시비를 따지는 소리가 고요한 산 속을 오염시킬까 항상 두렵다는 작가의 다소 염세적인 태도가 보여집니다.


 4구에서 작자는 산골짜기의 물은 온 산을 둘러 흐른다고 전제합니다. 그것은 세상사람들의 시비소리가 고요한 산에 이르는 것을 막기위해, 조물주가 일부러(故) 흐르는 물(流水)로 모든 산(山)을 다(盡) 둘러서 돌(籠)게 한 것(敎)이라고 보았던 것이겠지요. 여기서는 조물주가 계곡의 물소리로 자연을 지키듯이, 자신은 무너져가는 신라사회의 혼란에서 오는 온갖 부당한 현실속에서 자신의 순수한 이상을 지키려는 결의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작가탐구

 

 

 

 고운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한 뒤 29세에 귀국하였으나 6두품의 신분상 한계를 절감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글을 쓰는 문인의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모든 한문 문체에 능숙하였고, 우리나라 한문학의 비조로 <<계원필경>>이라는 개인 문집을 내어 <동국문종>으로 추앙받고 있지요. 말년에 해인사에 은거하면서 신선이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몰년을 모르지요...

 

 최고운은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서예가입니다. 그는 당나라 유학을 통해 신라를 대표하는 문장가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특히 자신이 직접 문장을 짓고 붓으로 글을 쓴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사산비명>으로 그 가운데 쌍계사에 있는 <진감선사비>는 백미에 해당합니다. 답사 때 최고운에 대해 상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총총...

 

 이번 서예세상 답사(6월 11일)때 해인사를 찾아 농산정에 앉아보면 최고운의 시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몇 번 해인사 농산정을 찾아 신선이 되어 가야산으로 들어갔다는 최고운의 흔적을 더덤어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 최고운을 생각하면서 신선이 되어 봅시다. 단, 하루라도... 신선처럼 마음이 쿨해지면 돌아와서 느낌을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시(詩) -농산정(籠山亭)

 

지난 11월 16일 하나산악회에서 매화산을 산행하기에 앞서 가야산  홍류동계곡(계곡에 비치는 가을 단풍이 계곡물까지 붉게 물들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초입에 위치한 고운 최치원선생의 유서깊은 농산정을 답사하면서 아름다운 계곡과 맑은 물, 농산정의 멋스러움을 감상하였다.

 

마침 12월 21일 영덕 팔각산 산행날 대절 버스안에서, 송전 류진환 시인이  최치원선생의 <농산정>시를  해설한 것을 여기에 옮겨 싣는다.

 

 농산정으로 가는 무지개 다리

 

 무지개다리와 솔

 

 농산정을 바라보며

 

 홍류동 계곡의 맑은 물

 

 농산정

 

 농산정의 송림

 

 농산정 안에 걸려있는 최치원의 시 농산정

 

 

 

 

아래의 籠山亭 작품은 신라 말 대문장가인 孤雲 崔致遠이 지은 7언 절구로 구성된 유명한 시를 소개한다.

그가 당나라 유학의 과정을 마치고 높은 벼슬자리를 사양한 후 가야산으로 들어가서 풍류생활을 보내던 중 산수(山水)의 풍경을 읊은 시다. 현실을 대하는 작자의 의식을 간결한 형식 속에 잘 응축시켜 놓고 있다. 부귀와 벼슬 등 속세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남은 인생을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작자의 풍류가 이 시의 주된 이미지<물소리>에 의해 활기차게 드러나고 있다.


籠山亭


孤雲   崔致遠


狂奔疊石吼重蠻(광분첩석후중만)   물결 거세게 흘러 산을 울리고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가까운 거리에서도 말소리를 분간하기 어렵구나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시비 따지는 소리 들릴까 두려워

 

故敎流水盡籠山(고교류수진농산)   흐르는 물소리로 온 산을 에워싸고 있네.


<註>

奔  달아날 분        疊  겹칠 첩         吼  울 후

巒  뫼 만               咫  짧을 지         恐  두려울 공

籠  대그릇 롱


疊石  포개진돌        重巒   겹쳐진돌         籠山  산에 꽉 차게함



시의 구성을 보면, 기(起)구에서는 온산에 울려 퍼지는 웅장한 물소리를, 승(承)구에서는 인간의 말소리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물소리가 울려 퍼짐을, 전(轉)구에서는 시비의 소리가 난무하는 어지러운 세태에 대한 작자의 심리가 반영되어 있으며, 결(結)구에서는 그러한 세상과 스스로를 격리시켜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하고자 하는 작자의 심리가 표현되어 있다. 이 시의 轉ㆍ結구에서, 인간의 <시비소리>가 듣기 싫어서 산골짜기 모두를 <물소리>로 가득 채운다는 표현으로, 참으로 깊은 해학의 뜻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구성을 다시정리하면>

 起---자연의 소리(웅장한 시냇물 소리)

 承---인간의 소리(속세와의 단절감)

 轉---작가의 심리(세상의 소리와 단절하고 싶은 마음)

 結---세속과 격리(은거하고 싶은 마음)



<崔致遠> 857~ ?

  통일신라 말기 학자 문장가. 경주(慶州) 최(崔)씨 시조,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6두품 출신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 , 12세에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였고,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당시 사회적 현실에서는 자신의 개혁안이 실현 될수 없음을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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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면 홍류동 / 최치원이 가야산에 들어와 수도한 곳

가야19명소 I 농산정 가야산 소리길

"(蠻자를巒자로)

오랑캐만蠻자를 뫼만 : 산봉우리만巒자로 고쳤네요 ~ 

 

농산정

환경부 가야산국립공원사무소에서(아래 사진참조)

하일문창입차"만" : 최치원께서 언제 이 산에 들어왔던가?

백운황학묘연간 : 흰구름과황학(黃鶴)이 아득히 어우러진 때 였도다.

이장유수홍진세 : 이미 흐르는 물로서 세상의 때를 씻었으니

불필중농만첩산 : 만겹 산으로 다시 귀 막을 필요는 없으리하.

전망대

춘풍척촉발층"만" : 봄바람에 철쭉이 온 산봉우리에 피어나니

니창연지수경간 : 거울 같은 물 속에 붉은 연지 가득하구나.

약사중이풍엽경 : 만약에 단풍 붉은 빛을 다시금 옮긴다면

용영금랑반함산 : 크고 넓은 비단물결에 반쯤은 잠기리라.

 

 

사진 2011. 12, 10. ---도천/ 최평열

사진 참조 하세요 ~











 












 

蠻자를 巒자로 바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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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의 한국성씨를 찾아서?-경주최씨(慶州崔氏) [옮긴이 도천 최평열]

‘토황소격문’ 지은 동양 최고 문장가 최치원이 시조

 

 

2011년 07월 19일 (화) 14:05:07 정복규 .
   
동학 창시 최제우, 경주 교동 ‘최부자집’도 경주최씨


시조 최치원(崔致遠)은 12살의 나이로 당나라에 건너가 17세 때 과거에 급제, 당나라에서 벼슬을 지내다 29살 때 귀국한다.

당나라 말 황소의 반란 때 지은‘토황소격문’은 동양에서 최고의 문장으로 꼽힌다.

신라 말기에 민심이 동요되자 가야산 해인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마친다.

고려 초 평장사를 지낸 최언위는 최치원의 사촌 동생이다.

18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42세에 귀국, 벼슬을 지낸다.

935년 신라가 망하자 고려에 가서 태사사부가 되었다.

최승우는 진성여왕 4년(890년) 당나라에 건너가 공부하고 3년 뒤 급제하였다.

최치원, 최언위, 최승우를 가리켜‘삼최’라 부른다.

최승로는 고려 성종 때 문하시중을, 최 항은 고려 현종 때 평장사를 지냈다.

수운 최제우는 인내천의 교리를 완성하고 동학을 창시한다.

해월 최시형은 1861년 동학교가 된 뒤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된다.

면암 최익현은 1876년 일본과의 통상이 논의되자 도끼를 들고 대궐문 앞에 엎드려 조약체결은 안 된다고 외치다 흑산도로 쫓겨 간다.

최 준은 경주시 교동에서 ‘최부자집’으로 이름났다.

최용신(1909-1935)은 일제 때 여성 농촌계몽 운동가로 유명하다.

해방 후 경주최씨는 사회 각계에 숱한 인맥을 형성했다.

최현배(문학박사. 한글학자. 전 연세대부총장), 최문환(경제학박사. 전 서울대총장), 최정훈(의학박사, 전 연세대 교육대학원장)씨 등이 대표적이다.

최현배는 우리말과 글의 발전을 위해 외길 한평생을 걸어온 학자다.

최영해(전 한국교과서출판협회장), 최신해(의학박사. 청량리뇌병원장), 최철해(도서출판 정음사사장)씨 등 3형제는 그의 아들들이다.

군에서는 최경록(전 육군참모총장. 향군회장), 최용덕(전 공군참모총장. 전 체신부장관)씨 등이다.

최인규(전 내무부장관), 최형섭(전 과기처장관), 최종호(전 국가보훈처장)씨 등은 관계의 인물이다.

재계에는 최종환(삼환기업회장), 최무현(서전기업사장), 최준문(동아그룹 명예회장), 최준규(서통회장), 최관식(코리아엔지니어링사장)씨 등이 있다.

국회의원은 최국현(제헌의원), 최윤동(제헌의원), 최창규(12대의원), 최형우(전 민주당 원내총무), 최두고(10대, 동성학원이사장) 등 30여 명이 있다.

최영희(문학박사. 한림대교수 겸 박물관장), 최상수(전 경희대교수. 한국민속학연구소장), 최기원(홍익대 미술대교수), 최영박(이학박사. 고려대교수), 최지훈(이학박사. 강릉대학장), 최기철(이학박사. 서울대 명예교수), 최임환(재정학, 성균관대교수)등도 있다.

(무순, 전 현직 구분 안됐음) 집성촌은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전남 담양군 대전면 중옥리, 경남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 경남 산청군 산청읍, 경남 합천군 봉산면 술곡리 등이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669명이다.

항렬자는 32世 모(模) 규(圭), 33世 병(柄) 용(鎔), 34世 탁(鐸) 문(汶), 35世 래(來) 동(東), 36世 시(時) 선(先), 37世 용(鏞) 재(在), 38世 수(洙)탁(鐸), 39世 근(根) 한(漢), 40世 하(夏) 민(敏), 41世 성(聲) 식(植) 등이다.

주요파는 ▲판도판서공파 ▲충열공파 ▲삼사좌윤공파 ▲어사공파 ▲밀성공파 ▲광정공파 등이다.

인구는 2000년 현재 976,820명이다.

서울 178,716명, 부산 104,058명, 대구 77,432명, 인천 49,459명, 광주 16,207명, 대전 28,118명, 울산 36,403명, 경기 171,852명, 강원 25,027명, 충북 30,347명, 충남 42,907명, 전북 21,181명, 전남 27,712명, 경북 88,774명, 경남 75,368명, 제주 3,259명이다.

 

해인사 소리길

        소산/문 재학

 

삶이 풍요로워 지면서 모두 건강과 여가활동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이에 발마추어 각 지방에서는 주민의 건강과 관광객 유치를 위해 경관이 좋은 곳에 옛길을 찾아내거나 새로 개설하는 등 산책로를 만들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제주도 올레길이다.

올레길의 뜻은 “아주 좁은 골목길”을 뜻하는 제주도 방언이다.

 

제주도 섬을 한 바퀴 돌면서 올레길을 내었는데, 지금까지 18개소를 개발 했다고 한다.

즉 제주도 해안을 따라 풍광이 아름다운 곳을 걸어서 즐기도록 한 것이다.

각 여행사들의 다양한 여행 상품소개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 다고 한다.

 

또 부산시도 여러 곳이 있지만, 이기대공원의 해안산책로인 둘레 십 리길은 해안가의 기암괴석과 쪽빛 푸른 바다 주변의 아름다운 오륙도. 광안대교. 동백섬을 바라보면서 심신의 건강을 도모하는 이기대 둘레길도 이미 유명한 관광명소이다.

 

2011년 대장경천년세계문화 축전행사가 9월23일부터 11월 6일까지 경남 합천군 가야면의 테마파크 중심으로 열리고 있다.

 

대장경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그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축전으로 대장경 천 년관. 지식문화관. 정신문화관. 세계교류관 등 전시관에서 진행된다.

 

이 축제를 계기로

풍광이 아름다운 해인사 홍류동 계곡을 중심으로 6km의 해인사 소리길을 내었다.

 

소리길이란 계곡의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를 뜻하는 이름이라 했다.

말의 느낌으로는 소로길. 오솔길로도 통하는 것 같다.

 

다방면으로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시는 합천군 전 K군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소리길의 “소리(蘇利)”는 불가에서 극락. 천당을 뜻하기에

소리길이란 극락으로 가는 길이라 했다.

 

황금들녘의 벼 수확이 시작되고 곳곳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가 가을을 알리는 청명한 날에 해인사 소리길 탐방에 나셨다.

 

대장경천년 세계문화축전 주 행사장 옆. 차량 수백 대를 주차할 수 있는 대형주차장 건너편에서부터 소리길은 시작된다.

 

소리길 입구서부터 울창한 숲과 암반을 타고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압도한다.

시원하고 상쾌한 숲속공기 피톤치드가 쏟아지는 잣나무. 적송나무. 단풍나무 숲속은 가슴부터 시원하다.

 

나무가 울창한 길이라 모자(帽子)는 필요치 않았다.

곳곳에 목책과 미려한 나무다리는 이용객의 편의를 위해 조성되어 있었다.

 

 

소로길은 해인사 본당을 가는 도로의 계곡을 사이로 반대편에 대부분 조성 되어있다.

나무가 울창하기도 하고, 물소리 바람소리 때문에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길의 표고는 해발 300m부터 500m 사이에 위치해 인체 생체리듬에 가장이상적인 해발높이에 개설되어 있는 셈이다.)

 

해인사 소리길은 각 구간마다 돌아보는 길. 함께 가는 길. 칭찬하기. 맨발로 걷기. 동화되기. 침묵의 길. 비움의 자리. 마음 씻기. 명상의 길. 마음 전하기 등 10개의 체험코스를 명명하여 재미를 더하고 있다.

 

소리길의 대부분은 1200여 년 전(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3년=서기802년에 창건함.)부터 다녔던 길인지 좁은 길도 있지만, 때로는 넓은 곳도 나오는데 전체가 비교적 완만한 길이였다.

 

신선이 된 기분으로 그리고 천 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다녔을 길을 그 당시 분위기에 젖어 걸었다.

 

푹신한 낙엽 쌓인 길. 간간이 눈부신 가을햇살이 비치는 소리길을 물소리 바람소리를 벗 삼아 걷다보면 곳곳의 명소마다 절경을 노래한 한시(漢詩)를 대형 간판에 칼라로 절경사진과 해설을 첨부 소개한 것을 보기도 하고,

 

산새들과 나무들의 이름도 칼라사진에 설명을 곁들인 펫말을 곳곳에 설치하여 탐방객들에게 산지식을 제공해 주었다.

 

한참을 걷다보면 바위와 절벽 곳곳에 새겨진 글자들이 눈에 띄는데, 천년동안 이곳을 지나간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거닐며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한 흔적들 같았다.

 

홍류동(紅流洞) 계곡은 가을단풍의 붉은빛이 흐르는 물조차 붉게 보일 정도로 아름답다고 부쳐진 이름이다.

 

그 중 계곡의 풍치가 가장 빼어난 곳에 있는 농산정(籠山亭)은 통일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선생이 이곳의 풍광에 빠져 노년을 지내다 갓과 신발만 남겨둔 채 홀연히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곳곳에 선생의 자취가 남아있다.

 

홍류동천 일원에 무릉도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축화전(가야천을 떠내려오는 꽃잎을 따라 올라간다.)을 시작으로 경멱원(축전 행사장 부근 : 가야산의 무릉도원을 바라본다.). 무릉교(해인성지 표지석 맞은편으로 무릉도원). 칠성대(활모양의 노석대에서 북두칠성에 예향하다.).

 

농산정(흐르는 물소리로 산을 모두 귀먹게 했다.). 취적봉(홍류동 독서당 뒷산 능선 신선이 남쪽을 향해피리를 부는 모습). 자필암(광풍뢰 아래쪽 길가 : 신선이 도끼로 찍어 만든 붓으로 먹물을 찍은 바위). 음풍뢰(광풍뢰 하류 : 바람이 노래하는 여울). 광풍뢰(제월담 하류 : 빛을 머금은 바람이 춤추는 여울목).

 

제월담(농산정과 길상암의 중간 : 구름이 걷혀 밝은 달이 못에 들어나는 곳). 분옥폭포(농산정과 길상암의 중간 : 뿜어내는 갖가지 영롱한 구슬이 푸른 비단에 비치네). 길상암(적멸보궁). 낙화담(도인의 흐르는 눈물이 푸른 물결에 더해지는 곳). 첩석대(돌무더기가 쟁반처럼 쌓여있는 곳). 회선암(첩석대 위편 : 신선이 노니는 바위) 등 명소를 볼 수 있다.

 

소리길을 계속 올라가면 곳곳에 기암괴석의 절벽에 푸른 이끼를 둥지삼아 구절초 같은 야생화가 시선을 모으고, 수많은 세월을 두고 흐르는 맑은 물이 이루어낸 옥수(玉水)같은 소(沼)가 곳곳에 있어 감탄을 자아낸다.

옥류동천이라 부를 만 했다.

 

마음까지 시원한 숲속의 솔바람소리. 계곡의 물소리는 지척에 있는 사람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이고 간간이 아름다운 새소리랑 자연의 숨소리에 젖어 거닐면 속세의 찌든 때를 씻어 내리고, 세상사 온갖 시름을 달래준다.

 

몇 곳에 있는 휴식처(테그)에 쉬기도 하고, 아름다운 계곡과 험준한 산세의 다양한 절경을 아주 상쾌한 기분으로 감상 하면서 2시간 가까이 걷다보면 해인사 본당 가는 입구가 나온다.(해인사 대웅전 뒤편의 장경판전(국보 제52호)은 세계문화유산으로

팔만대장경(81,258장=국보 제32호)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음)

 

이와 같이 해인사 소리길은 시종일관(始終一貫) 하늘이 보이지 않는 울창한 숲의 솔바람소리. 새소리. 암반위로 부서지는 옥수(玉水) 물소리 등을 감상 하면서 걷는 신선의 길이다.

,

산뜻한 목책다리가 계곡을 다섯 차례나 왕복하므로 다리난간에서 계곡의 아래위 풍광이랑 주변의 기암괴석의 절경 등 전체경관을 보면서 자연의 소리를 만끽할 수 있어 전국 최고의 명소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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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현 11.09.25. 22:29
글을 읽다보니 제주와 해인사를 마치 함께 기행하며 신선이된 기분이고 ~~
귀한 글안에 머물다 갑니다 ~~ 일교차가 심하오니 건한 하시옵소서 ~

 

소당/김태은 11.09.24. 17:14
작년 가을 합천에 가서 소산님의 안내로 합천 구석 구석 골고루 구경하면서
설명을 잘 해주시여 참으로 멋진 1박2일의 시간을 갖었던 기억이 넘~생생합니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며 가끔 그때의 생각을 회상하며 빙그레 혼자 웃어봅니다
글을 너무 잘 쓰시고 시상도 훌륭하시고.....세상에 널리 기록을 남기시게 되었으니
참으로 멋진 축복받은 삶><이십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백초 11.09.26. 08:36
합천 해인사 갔던 작년 ...벌써 1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으니 세월의 빠름을 느낍니다
김밥에 밤에 ...자가용으로 길 안내 가이드 까지 ....아름다운 추억속으로,,,,,,,
 
센스 11.09.28. 20:00
소산님 글을 보니 울창한 숲길,새소리,암반 위로 떨어지는 옥수 물소리 등 해인사 소리길을 걷고 싶은 충동이 이네요~^^ㅎㅎ
 
청담 추연택 11.09.29. 12:02 new
10월 첫날 향우회 회원들과 소리길 가기로 했는데
소산의 얘기 듣고 나니 눈에 선하게 떠올라 안가도 될것 같지만 그래도 가봐야지 ~~~
잘 다녀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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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野김연화 11.09.24. 17:42
시인님 고운글 감사합니다
늘 문운이 가득 하시고
가네에 무궁한발전과 행복을 기원 드립니다......

 

竹虎/김홍만 11.09.28. 19:54
여행 길잡이 책을 내시면 좋겠습니다

   

천사1004 11.09.24. 13:44
좋은곳소개해주셨어감사함니다 어제한번 두루가보구싶어짐니다 ~~

  

 
머루알 11.09.24. 11:48
신선의 길.
생각만해도 좋습니다.

   

문경자(21회) 11.09.24. 12:26
대장경천년 세계문화축전
해인사 소리길에 대한 글을 읽어보니
단숨에 달려 가 소리길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생각만해도 그곳에 가있는듯 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전인구(17회) 11.09.25. 15:57
예전에는 홍류동 계곡을 많이 걸어서 갔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차길이 생기니 계곡은 그냥 지나쳐 가는 정도로 지나면서 항상 아쉬웠는데 걷는 길이생겼으니 경치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네요. 언젠가 꼭 가봐야지~~~
  
 
당신멋져 11.09.24. 18:53
해인사 소리길 자세하게 안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주에는 한 번 찾아볼까 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백암 11.09.27. 22:45
꼭 한번 가서 걷어보고 싶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맑은오후 11.09.25. 00:40
해인사 옛날에 가보았는데 그당시에는 교통이 불편했다는 기억입니다.
지금은 달라졌겠죠. 대장경 입구의 동그란 문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조금씩 민족의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니
참 다행이란 생각입니다. 천천히 소리길을 걷고 싶어 집니다.
언제 걷을수 있게 되겠지요...
잘읽고 갑니다.

   

白雲/손경훈 11.09.26. 10:03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행복한 한주 되세요

   

청암류기환 11.09.25. 08:02
2011년 해인사 대장경천년세계문화 축전행사에 한번 다녀 올까 합니다.
고운 글 고맙습니다.

   

샬라 11.09.24. 11:46
올레길 둘레길.. 많이 만들어 건강한 생활에 도움은 되겠지만,
무분별하게 파헤쳐 훼손돼 다시 인간에게 앙갚음으로 되돌아오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좋은 소재가 되는 글 감사합니다.
 
낭림산맥 11.09.24. 23:51
좋은 글 감사합니다,,
 
수선화 11.09.25. 08:55
좋은글 감사합니다~~

 

안녕 하십니까?   소산 님 검색하다 이 글이 보입니다.
글중에서 소산님 이 홍류동(紅流洞) 계곡은 가을단풍의 붉은빛이 흐르는 물조차 붉게 보일 정도로 아름답다고 부쳐진 이름이다.
는 등 많은 글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자 들에는 오곡중에 벼는 풍년을 이루고 있고 ~ 쌀쌀한 날씨입니다. 건강하게 즐거운 삶을 누리시며 많은 글을 부탁합니다. 행복하세요.~

 

 

(다음글은 백두문화원.http://cafe.daum.net/pdrs 에서 퍼온글입니다.

 

 

 

 

2006. 7. 2일/ 이형석 쌍계유적 답사-촬영










최치원은 95세까지 살았다

홍성 보금산 쌍계계곡에 금석문 16점 남겨

 

 

 ( 홍성 보금산 쌍계계곡에 금석문 16점 남겼다는 그 글자가 궁금합니다)



윤여덕(사단법인 현정회 총무이사)


입춘(立春)을 갓지난 지난달 7일 오전 충남 홍성군 장곡면 월계2리 보금산(寶金山, 300여m) 기슭 쌍계계곡 강당지(講堂址)에서는 영하의 추위 속에서 조촐하면서도 유서(由緖) 깊은 제례(祭禮)행사가 베풀어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그 연원조차 정확하게 알 길이 없는 이 마을 제사는 다름 아닌 ‘한국사상의 원류(源流)’를 형성했던 신라 말의 대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선생을 가리는 춘향대제(春享大祭)다.

9부능선상의 천년 古塚

행사 끝에 음복(飮福,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참례자들이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주 몇 잔으로 몸을 녹이고 대보름 명절 기분에 들떠 신명(神明)이 되살아난 마을주민들은 그 길로 쌍계계곡에 흩어져 있는 고운선생의 유적(주로 石刻筆蹟)들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그러나 보금산 정상 부근(9부능선)에 있다는 선생의 묘소(추정)는 워낙 거리가 멀어(마을에서 2km 거리) 10월 시제(時祭)때로 미루고 이날은 찾지 않았다.

경상도 가야산(海印寺)에서 우화등선(羽化登仙, 몸만 남기고, 즉 시해 尸解하고 혼백 魂魄은 神仙으로 化한다는 道家의 말) 하였다는 고운선생의 제사를 어째서 이 구벽진 충청도 산골에서 지내고 있는지 처음에는 그 연유를 알 길이 없었다.

‘어느날 고운(孤雲)이 아침 일찍 집 문을 나선 뒤로는 그가 간 곳을 알지 못했으며 갓과 신만이 숲 속에 남아 있었으니 아마도 신선(神仙)이 되어 갔을 것이다. 그래서 중들이 그 날로 명복을 빌게 되었다’고 적고 있는 고려 명종 때의 학자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기록대로라면 그의 행적은 그가 세상을 등지고 은거했던 가야산에서 44세에 일단 끝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4년후인 904년에 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발(跋, 책끝에 적는 글, 後記)의 내용으로 미루어 48세 때까지 해인사 화암원이라는 암자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우화등선(羽化登仙)의 허(虛)와 실(實)

그가 가야산에서 자취를 감추기 전후의 행적을 보아도 경주 남산을 비롯하여 강주(剛州, 지금의 경북 의성) 합천 청량사, 하동 쌍계사, 창원 별서(別墅), 동래 해운대 등 주로 경상도 일원에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 문화대백과 사전 22권 최치원 항목 집필자 崔柄憲)

가야산 이후 고운선생 연구의 단초를 연 학자는 60~70년대 부여박물관장을 지낸 홍사준(洪思俊)이다. 그의 연구는 조선후기의 백과사전인 이규경(李圭景, 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나오는 문창후 사적 변증설(文昌侯事蹟辨證說) ‘묘는 호서 홍산 극락사 뒤에 있는데 비가 있고 비의 앞글씨는 자필이며 뒷면은 최홍효가 썼다’ (墓在鴻山 現極樂寺后 ... 有碑 公自筆碑額 陰記崔興孝書)과 동시대의 문신학자 서유구(徐有 , 1746~1845)의 교인계원필경서(校印桂苑筆耕序) ‘장사는 호서의 홍산에서 지냈으니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은 망녕된 말이다. 그리고 묘는 홍산에 있는데 이는 가야산 기슭에 있는 한 지맥의 이름이다(葬在湖西之鴻山 謂羽化者妄也 墓在鴻山是 伽倻山 一麓之名)’를 근거로 출발하고 있다.


묘재홍산(墓在鴻山)이 부른 혼란

위의 두 문헌기록을 근거로 해서 홍사준은 실제로 지난 ‘71년 홍산 무량사에 1개월 가량 머물면서 절 뒤 만수산일대를 답사하였으나 소득이 없었다’고 그의 논문 <崔致遠의 一生>에서 밝히고 있다. 홍산이라는 지명이 일치하는데다 ‘극락사 뒤’를 ‘무량사 뒤’로 속단한 것이다.

고려말 최영장군이 왜구를 무찌른 홍산대첩(鴻山大捷)으로 보다 유명한 홍산은 행정 관할상 현재 부여군에 속해 있는데 이것은 일제(日帝)이후 개편된 행정구역이고 그 이전 조선시대에는 홍주부(洪州府)에 배속되어 있었다.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시에 전국을 23부(府)로 개편하면서 부 밑에 군(郡)을 설치하였는데 이때 공주부(公州府)와 홍주부로 분속된 부여지방의 홍산현이 군으로 개편되면서 임천(林川)군과 함께 홍주부 관할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忠南 地域의 文化遺蹟 제3집 扶餘篇, 1989)

홍산은 일찍이 태종 13년의 지방제 정비 과정에서도 행정적으로는 공주목(牧, 전국 12牧의 하나)에 속하면서도 군사적 통속(統屬)관계에 있어서는 홍주 진영(鎭營)으로 편제되는 등 2중 구조로 되어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명목상 공주권에 속하나 사실상은 홍주권 대접을 받은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규경이나 서유구가 장곡면 월계리 보금산에 있는 묘소를 ‘묘재 홍산(墓在鴻山)’이라고 기록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특히 당시 말단지명을 호칭할 때 한 단계 위 단위 지명으로 통용한 것은 우선 알기 쉽고 쓰기 편하다는 이점(利點)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장곡이 홍주목(牧) 관할이기는 하나 이름 없는 기초단위 행정지명을 지금의 광역시쯤 되는 목이나 부 단위로 부를 수는 없기 때문에 홍산현으로 한 단계 낮추어서 불렀을 거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천광역시 관할 강화군내에 있는 면 단위 지명을 인천이라 하지 않고 강화라고 하는 것과 같다.


사제(師弟) 2대에 걸친 연구 결실

홍사준의 직제자인 홍주향토문화연구회 전옥진(田玉鎭, 69)부회장도 ‘고운 최치원선생 묘역고’(孤雲崔致遠先生墓域考)라는 논문에서 홍산(鴻山)의 ‘鴻’자가 홍주(洪州)의 ‘洪’자를 오기(誤記)했을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洪山’이라는 가정하에서 그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걸 보면 이 문제(鴻山의 위치 比定)로 적잖이 고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전씨는 또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가야산 (678m, 경상도 가야산과 이름이 같다)이 광활한 예당(禮唐)평야가 전개되는 이 일대의 주산(主山)으로서 보금산을 그 한 지맥으로 거느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상의 금환(金丸)이라는 이 지역의 또 다른 이름에 주목한다.

신라오기(新羅五技)를 노래한 향악잡영(鄕樂雜詠) 5수(首)중의 금환시(金丸詩)가 쌍계계곡의 빼어난 풍광(風光)과 금환놀이를 동시에 읊은 2중가(重歌)일 수도 있다는 색다른 해석을 내 놓고 있다. 금환은 달을 뜻하는 말이기도 해 유난히 ‘月’자 든 지명이 많은(모두14개) 이곳의 지리적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주장이다.


금환(金丸)은 월계(月溪)의 옛지명

‘한번 들어가면 세상 인연 다 버리고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一入靑山更不還)던 그이기에 신선의 경지를 읊은 이런 시를 남길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것이다. 최치원의 묘소로 추정되고 있는 보금산 고총 아래 산기슭 일대가 ‘절골’이라는 이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이 터가 바로 지난 ‘96년 흥성문화원주관 학술발표회에서 오윤희교수(한서대)가 발표한 논문 ‘호서지방의 최치원 사적’중의 ‘쌍계근방의 극락사’일런지도 모른다는 추리가 가능해진다.

또 최근에는 묘소부근 땅속에서 비석 받침들(臺石, 사방 홈길이 25cm) 1개를 발굴함으로써 이 부근 어딘가에 반드시 비석도 묻혀 있을 거라는 추정을 가능케 해 주었다.

너비 10m 안팎의 쌍계 상류에서 두 갈래 물줄기가 만나는 용소(龍沼)까지 약 3백m 들어간 계곡 석벽에 새겨진 금석문은 모두 16개에 이른다. 그 중에 ‘崔孤雲書’라고 이름을 새긴 ‘雙磎’와 ‘楓嶽’은 가로새긴 두 글자의 길이가 93cm로 하동 쌍계사 입구에 있는 ‘雙磎石門’의 세로길이와 꼭 같다.

이 금석문의 필적을 감정하기 위하여 작년봄 최근영(崔根泳)교수(역사학회회장)가 서예학(書藝學) 전공인 손환일(孫煥一)강사(원광대)와 함께 직접 현지를 답사한 끝에 고운 찬(撰) 서(書)인 진감선사 대공탑(眞鑑禪師大空塔) 비문 탁본 글씨와 비교한 끝에 역시 두 필적이 일치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필적감정으로 친필 확인

이밖에 그가 태수를 두 번씩이나 지낸 부성(富城, 지금의 서산)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富城祠)이 있으며 ‘過仙閣’이라는 고운 친필 동헌(東軒)현판이 유명하다.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 옥병계(玉屛溪)바위에는 경남 하동군 화계면 법왕리 계곡 석벽의 친필 세이암(洗耳 )과 똑같은 세이암 세글자가 세겨져 있다.

‘세상의 시비를 초월한다’는 은둔의 뜻이 짙게 베어 있는 글귀다.

매년 10월에 길일을 택해 지내는 가을시제(時祭)에는 현지의 경주 최씨 문중 후손들은 물론 멀리 경상도 종친들도 벌써 7년째 매년 참례하고 있다.

‘99% 확신한다’고 거의 단정적으로 말하는 문창(文昌)학술연구원이사장 최창규(崔昌圭, 67, 부산)씨는 지난해 영조 때의 선대 필첩 역본(筆帖譯本, 陶渦 崔南復先生 筆跡)을 펴내면서 ‘孤雲先生의 隱遁生活과 詩의 世界’라는 부록을 증편(增編), ‘임종(臨終)의 땅’편을 신설하고 지리산 화개동설과 함께 마지막 은둔 종신지(終身地)로 홍성 장곡설을 내세우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최치원의 출생지를 경주로 지목했는데 몇년전부터는 전북 옥구설(沃溝說)이 새로이 대두되면서 예산, 서산, 홍성, 보령에서 옥구를 잇는 호서(湖西)일대가 바로 최치원이 나서, 자라,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와 활동하다 생을 마친 평생의 무대(舞臺)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호서(湖西)지방은 그의 평생무대

경내에 최치원을 모시는 서원(文昌書院)과 단군전이 있는 옥구 향교(典儀 김정기 72)에는 일제 말(42.43년께) 서해 변에 군산비행장을 닦을 때 철거 직전 옮겨왔다는 자천대(紫泉臺)가 있다. 이 정자가 최치원이 어려서 공부하던 곳이라 하며 군산 외항 바닷가 산기슭에는 역시 최치원이 노닐던 바위굴이 지금은 전설로만 남아 있다.

군산에서 강(금강) 하나만 건너면 곧 만나게 되는 보령 성주사도 그가 어려서 공부했다는 절이며 이처럼 질긴 인연으로 후에 신라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인 낭혜화상탑비문(朗慧和尙塔碑文)을 짓게 되었다는 인과(因果)의 무상(無常)함이 금방 손에 잡힐 듯 다가선다.

일찍이 95세 생존설을 주장한바 있는 이경선교수(한양대)의 한국인물사 고전편에 의한다면 첫 은둔지 가야산 이후 50년 가까이를 더 산 셈이 되는데 그 행적은 고증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이 기나긴 시간 그는 과연 무슨 일을 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아직껏 풀지 못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계림황엽(鷄林黃葉) 곡령청송(鵠嶺靑松)’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국운과 푸른 소나무처럼 일어나는 고려를 비교한 이 한 구절이 이른바 밀찬조국설(密贊肇國說, 은밀히 고려의 건국을 도왔다는 말)을 낳고 자신은 신라조정에서 쫓겨나는 몸이 되었으나 그의 문하제자들에게는 오히려 고려 조정 진출의 길이 되었다고 하는 이율배반(二律背反) 속에서도 그는 끝내 교육을 택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그리 어렵지가 않다.

장곡월계리 강당지와 해미(海美)에 있는 가야산 보원사(普願寺) 강당사비(講堂寺碑, 최치원찬 金生書)가 이를 잘 입증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형석 E 메일 <korealove@paran.com>  019-225-4845.
 

최치원은 공자의 유도로 부터 석가의 불경이니 노자의 도덕경을 엄청나게 연구 한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그의 난낭비 鸞郞碑(환웅, 단군등을 예찬한 비석)序文 만 보아도 알수 있다.

특히 그는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말하는 도덕경을 탐독하고 우리의 전래 사상인 신선도와 융합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것은 그의 천부경 예찬문이 노자의 도덕경 81 장 처럼 81 자로 되어 있고 그 냉용도 결국은 그와 같다

 

 

고운 최치원 선생 (2) - 영정(影幀)





 

 

 

 

 

 

 

제 목 : 고운 최치원 선생 (3) - 필적(筆跡) 글 쓴 이 : 월계자




[영상 자료 출처: http://www.koreandb.net]

 

 

 

 

 

최치원

崔致遠 857(헌안왕 1) ~ ?


신라시대의 학자.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자 고운(孤雲)• 해운(海雲).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에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병(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찬)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보光塔碑)> <사산비(四山碑)> 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궤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있다.

참조: 《최치원설화연구》 한석수 저(계명문화사, 1991) 《최치원의 사상연구》 최영성 저(아세아문화사, 1990) 《최치원의 시 정신연구》 선낙희 저(관동출판사, 1986)



[출처: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제24권 610쪽]

 

 

경주최씨 대동보

 

 

 

 

 

 

 

 

 

 

 

 

 

 

 

 

 

ㅁ동영상] 姓氏의 故鄕 - 慶州崔氏

 

 





출처 : http://koreanroot.co.kr / http://tvpot.daum.net/v/24429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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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단법인경주최씨대종회서 2011년도 춘계향사 하였다.

사진2011. 4. 16/편집2011. 4. 18. 후손 도천 최평열

 

경주시 상서장에서2011. 4. 16.낮 행사시

 

9.  사단법인경주최씨대종회서 2011년도 춘계향사 하였다.

사진2011. 4. 16/편집2011. 4. 18. 후손 도천 최평열

 

경주시 상서장에서2011. 4. 16.낮 행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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