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도천 최평열]
말기의 학자·문장가인 최치원에 관한 설화. 최치원이 당나라에 있을 때의 일화에 관련된 문헌설화이다. 한 편의 설화이기는 하나 내용 구성면에서 다분히 소설적 면모를 띠고 있어 소설로 보는 경우도 있다.
이 설화는 원래 ≪수이전 殊異傳≫에 수록되었던 것이 뒤에 성임(成任)의 ≪태평통재 太平通載≫ 권68에 ‘최치원(崔致遠)’이라는 이름 아래 전재되어 있고, 그 뒤 권문해(權文海)의 ≪대동운부군옥≫ 권15에는 ‘선녀홍대(仙女紅袋)’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전한다.
같은 내용이기는 하나 〈선녀홍대〉가 〈최치원〉보다 약 5분의 1 정도로 축약되어 있다. ≪태평통재≫에 수록된 설화의 내용을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최치원이 12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한 뒤 율수현(碌水縣)의 현위(縣尉)가 되었는데, 항상 고을 남쪽의 초현관(招賢館)에 가서 놀았다. 초현관 앞에는 쌍녀분(雙女墳)이라는 오래된 무덤이 있었는데, 예로부터 많은 명현들이 노는 곳이었다.
어느 날 최치원이 쌍녀분에 관한 시를 지어 읊었더니, 홀연히 취금(翠襟)이라는 시녀가 나타나 쌍녀분의 주인공인 팔낭자(八娘子)와 구낭자(九娘子)가 최치원의 시에 대해 화답한 시를 가져다주었다.
시를 읽고 감동한 최치원이 다시 두 여인을 만나고자 하는 시를 지어 보내고 초조히 기다리노라니, 얼마 뒤 이상한 향기가 진동하면서 아름다운 두 여인이 나타났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 최치원이 두 여인의 사연을 듣고자 하였다. 원래 그들은 율수현의 부자 장씨(張氏)의 딸들로 언니가 18세, 동생이 16세 되던 해 그녀들의 아버지가 시집보내고자 하여 언니는 소금장수에게, 동생은 차〔茶〕장수에게 정혼하였다.
그러나 그녀들의 뜻은 달랐기에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고민하다가 마침내 죽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여인을 함께 묻고 쌍녀분이라 이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한을 품고 죽은 그녀들은 마음을 알아줄 사람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다가, 마침 최치원 같은 수재를 만나 회포를 풀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였다.
세 사람은 곧 술자리를 베풀고 시로써 화답하여 즐기다가 흥취가 절정에 이르자, 최치원이 서로 인연을 맺자고 청하니 두 여인 또한 좋다고 하였다. 이에 세 사람이 베개를 나란히 하여 정을 나누니 그 기쁨이 한량없었다.
이렇게 즐기다가 달이 지고 닭이 울자 두 여인은 이제 작별할 시간이 되었다면서 시를 지어 바치고는 사라져 버렸다. 최치원은 그 다음날 지난밤 일을 회상하며 쌍녀분에 이르러 그 주위를 배회하면서 장가(長歌)를 지어 부른다. 그 뒤 최치원은 신라에 돌아와 여러 명승지를 유람하고 최후로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버린다.
이상의 내용에서 볼 때 이 설화는 설화라기보다는 소설에 매우 접근한 모습을 보여 주는데, 최초의 수록자나 작자는 알 수 없다. ≪태평통재≫에는 ≪수이전≫에서 나왔다고 하였고, ≪대동운부군옥≫에서도 그 출전을 ≪수이전≫으로 밝히면서, 참고 문헌에는 ≪태평통재≫도 기록하고 있다.
결국 처음 ≪수이전≫에 수록되어 있던 것이 ≪태평통재≫로, 이것이 다시 축약되어 ≪대동운부군옥≫에 수록된 것이다. 그러나 ≪대동운부군옥≫은 ≪수이전≫에서 곧바로 왔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최치원설화〉와 〈선녀홍대설화〉는 그 근원이 같다. 다만, 전자에 비하여 후자가 5분의 1 정도 축약되어 있는데, 첫부분과 끝부분이 생략되어 있고 다수 등장하는 한시가 대부분 빠져 있으며, 이야기의 줄거리도 많이 축약되어 있다.
이 설화는 내용상 중국 남송(南宋) 때의 ≪육조사적편류 六朝事迹編類≫의 분릉문(墳陵門) 제13 쌍녀분기(雙女墳記)와 공통되는 바가 많아 상호 연관성이 있다 하겠고, 당나라의 전기소설인 장작(張弗)의 〈유선굴 遊仙窟〉과도 공통되는 점이 많아 그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중국의 이야기들이 전래되어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인물인 최치원에 결부되었던 것이다.
최치원은 오랫동안 중국에 살았던 인물이기에 이들 중국 설화들과 잘 어울릴 수 있었고, 또 그의 시재(詩才)가 그곳에서 높이 평가되었기에 설화 속에서도 그의 시가 죽은 두 여인의 혼까지 움직일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설화의 내용에서 혼교설화(魂交說話)·재생설화(再生說話)·애정설화(愛情說話) 등의 요소를 볼 수 있는데, 이 설화가 중국 육조 시대(六朝時代), 그리고 당나라 시대 신괴류(神怪類)의 전기적 설화소설에서 다분히 영향을 받고 있음을 말하는 예이다.
이 설화의 성립 연대는 주인공인 최치원의 연대로 보아 고려 초기나 적어도 중기 이전으로 추측된다. 신라 말엽 이후 많은 최치원 관계 설화가 생성, 구전되면서 이 설화도 생성되었고, 이것이 처음 ≪수이전≫에 수록되었다가 ≪태평통재≫에서 ≪대동운부군옥≫의 순서로 전개되었으며, 이야기 중의 혼교설화·재생설화적 요소는 ≪금오신화≫나 기타 많은 조선 시대 국문소설의 혼교적·재생적 요소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이다.
또, 설화의 내용 중 주인공들의 의사표시가 대부분 한시로 나타나 있어 전체적으로 20여 수의 시가 등장하는데, 이러한 설화소설 속의 삽입 시는 후대 한문소설류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는 데에서 이 설화의 문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편, 조선 시대 소설로 〈최치원전〉 또는 〈최고운전〉·〈최문헌전〉 등의 최치원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있는바, 이 〈최치원설화〉와 공통되는 점은 별로 없다. 〈최치원전〉은 지하국대적제치설화(地下國大賊除治說話) 등 다양한 조선 시대 구전설화의 집대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병 양란 이후의 민족적 민중 의식이 표출되어 있어 그 성립 연대가 조선 중기 이후로 보이며, 그 설화적 내용에 있어서도 공통적인 요소가 없어 〈최치원설화〉와의 직접적인 상호 영향 관계는 인정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太平通載, 大東韻府群玉, 六朝事迹編類, 新羅殊異傳小攷 續(崔康賢, 국어국문학 26, 국어국문학회, 1963), 殊異傳과 崔孤雲傳(金甲福, 成大文學 7, 成均館大學校文學會, 1961), 崔致遠傳의 小說性(曺壽鶴, 嶺南語文學 2집, 嶺南大學校國文科, 1975), 崔致遠과 傳說文學-孤雲說話를 중심으로-(張德順, 아카데미논총 4, 세계평화교수아카데미,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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