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伽倻山 1,430m [옮긴이/도천 최평열]
주봉 : 상왕봉(우두봉), 칠불봉
기타 : 두리봉, 남산제일봉, 의상봉
가야는 우리말로 가람, 개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도 하고,
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수행을 하신,
인도의 붓다가야에 있는 가야산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도 한다.
'우두'니 '상왕'이니 '영산'이니 하는 이름들도 인도의 가야산에서 온 것들이다.
'지환'과 '중향'은 옛적부터 가야산을 일러 '삼남의 금강산' 이라 한 데에서 연유하여
금강산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러한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거니와,
산의 남녘에 신선의 세계인 만수동이 있다고 전해 오는 말이 있을 만큼
가야산은 수려한 산세를 자랑한다.
가야산 이야기 :
가야산은 경북의 서남단에 우뚝 자리 잡은
영남의 제일봉으로서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예로부터
“조선팔경의 하나”,
“해동 제일의 명산”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으며,
백두산 정기를 받은 소백산맥이
추풍령을 거쳐 지리산으로 뻗다가
동쪽으로 혈맥을 갈라 솟아오른 곳으로
행정구역상 성주군, 합천군, 거창군에 걸쳐있다.
가야산은 6가야국의 주산으로써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산신山神(女神)이 상아덤<서장대>에 머물면서
천신天神 이질하夷叱河와 감응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뇌질주일惱窒朱日은 대가야의 시조 이지아시왕이 되고,
뇌질청예惱窒靑裔는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되었으며,
가야국 김수로왕은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許黃玉과 결혼하여
10명의 왕자를 두었는데,
큰 아들 거등巨登은 왕위를 계승하고
둘째, 셋째 아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서 허許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며
나머지 일곱 왕자는 허황후의 오빠 장유화상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야산에서 가장 힘차고 높은 칠불봉 밑에서 3년간 수도한 후
도를 깨달아 생불生佛이 되었다 하며,
그 자리에 칠불암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가야산은 물이 맑고 경관이 수려할 뿐 아니라,
예로부터 삼재三災(火, 水, 風災)가 들지 않는 영산靈山으로 불려지고 있다.
# 산뽕나무 :
뽕나무과
낙엽지는 넓은 잎의 큰키나무
꽃은 5월에 피고
검붉은 열매<오디>는 6월에 익으며
야생동물의 먹이가 된다.
# 백운암지 :
백운암이 있었던 자리로,
가야산 남쪽 용기골(龍起谷)에서 가야산성과 정상에 올라가는 길 중간에 위치,
계곡과 접하여 2단으로 석축을 쌓아 절터를 만들었는데,
길이 약 25m 가량의 석축과 계단지가 확인됨.
현 수륜면 백운리 일대의 해인사와 비슷한 통일신라시대(802년)에 무려 1000여칸
이나 되는 대규모의 금당사金塘寺가 건립되었고, 고려중엽부터 법수사法修寺로
고쳐 부르다가, 임진왜란 이후 조선 중엽에 폐사되었다.
이곳 용기골 일대에는 금당사에 딸린 100여 개의 암자가 있었는데
백운암 역시 그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 참꽃마리 :
# 벌깨덩굴 :
# 우산나물 :
# 가야산성 :
# 산철쭉 :
산세가 웅장하고, 수려하여 해동제일의 명산으로 유감이 없으며
또한 절 뒤의 소나무와 기암괴석은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것 같은 꿈을 꾸게 한다.
법보종찰 해인사의 주산으로 정상에서 바라본 일출과 일몰은 경이로움을 자아내어
조선8경의 하나로 이름나있다.
합천8경중 제1경이기도 하다.
# 칠불봉 : 좌측의 봉우리
# 구슬붕이 :
# 노랑제비꽃 :
# 상왕봉(우두봉) : 가운데 우측
# 설앵초 :
어우러진 노송과 그 사이 비단결 같은 시심이 흐르고
붉게 물든 홍류동 계곡으로 떨어지는 황금빛 물줄기 사이로
푸근한 고향의 향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해인사 앞자락을 굽이쳐 도는 홍류동 계곡은
우리나라 팔승 가운데 으뜸이라는 그 명성이 무색하지 않게
여느 산에서는 볼 수 없는 멋들어진 계곡 풍경을 철따라 운치있게 펼쳐내고 있다.
그렇듯이 빼어난 명산 가야산에 해인사가 터를 잡은 모습을 일러
행주형국이라하니, 이는 곧 큰 바다에 배가 가고 있는 모양이란 뜻이다.
가야산의 이런 지형은
일찍이 신라의 이름난 선비 고운 최치원이 찬탄하여 이른 대로,
가야산이 명산 가운데 명당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어 준다.
# 농산정 :
# 농산정籠山亭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에 있는 정자.
경남문화재자료 제172호
홍류동에서 가장 빼어난 곳의 암석위에,
신라 말기 유학자 최치원이 벼슬을 지낸 뒤 전국을 유랑하다가
만년에 은거하며 글을 읽고 수도하던 곳에 세운 정자.
농산정이라는 이름은 홍류동 계곡의 바위에 새겨져 있는
최치원의 시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건물이 처음 지어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건물은 1936년에 중수되었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정사각형 평면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한 목조기와집으로
여름의 폭우로 인하여 건물의 일부가 무너진 것을 1992년 새로 단장하였다.
정자 옆에는 ‘고운 최선생 돈적지(孤雲 崔先生 燉跡地)’라고 새긴 주석비(柱石碑)가 있고,
제시석(題詩石)에는 해인사시가 새겨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