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神仙이 된 文昌後 孤雲 崔致遠 선생 (제1부)
고운최치원선생 이성동사단법인합천향토사연구회장 문화칼럼
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해인사는 조선 팔경중의 하나인 가야산과 남산제일봉이 병풍처럼 둘러 싸여 주위 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명승지에 위치해 있다. 통일신라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천이백년 화엄사상의 불법을 전파한 유서 깊은 화엄종찰이다. 해인사의 해인(海印)의 의미는 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 모든 것이 도장 찍히듯 그대로 바닷물에 비쳐 보인다는 뜻으로 모든 번뇌가 사라진 부처의 마음 속에는 과거와 현재·미래의 모든 업이 똑똑하게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승경전의 하나인 화엄경은 <대방광불화엄경>을 말하며 따라서 화엄세계는 광대무변하게 우주에 편만해 계시는 붓다의 만덕(萬德)과 갖가지 꽃으로 장엄된 진리의 세계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해인사에 이르는 연도인 홍류동 일대는 부처님의 섭리로 사시사철 山水가 맑고 그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빚어내는 것인지 모른다.
신라 말 벼슬을 버리고 여기서 한동안 머물다가 신선이 되어 종적을 감추었다는 최치원 선생의 농산정(籠山亭)과 재실(齋室)이 고즈넉이 서 있는 홍류동은 그 계곡 따라 십리길에 늘어서서 하늘을 떠받들듯 솟아 있는 키 큰 홍송 밑으로 봄철에 시작하여 여름철끝자락까지 은행나무 벚나무들이 눈부시게 푸른 터널을 이루며 싱그러운 녹음(綠陰)의 향취(香臭)에 젖게 하는 곳이라 누구나 이곳에 오면 부처님의 화엄의 세계에 들어서는 장엄한 분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가을이 오면 이곳에서 펼쳐지는 천자만홍(千紫萬紅)의 아름다운 풍광이 계곡물을 붉게 물들인다 하여 언제부터인가 이곳을 홍류동(紅流洞)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곳은 토황격소문(討黃檄巢文)으로 당나라 전역에 이름을 떨쳤던 풍류객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이 고국에 돌아와서도 난세(亂世)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고 전국의 산과 바다와 강을 따라 주유(周遊)하다가 이곳 홍류동에 들려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종착지로 머문 곳이다. 그가 이곳에 머물며 시끄러운 세상의 온갖 시비(是非)를 흐르는 벽계수(碧溪水)에 씻고 청산을 벗삼아 살다가 신선이 되어 가야산에 사라졌다는 설화가 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구전(口傳)되어 전해지고 있다.
한국 한문학의 조종(祖宗)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최치원은 그의 생애를 통해서 많은 글을 남겼다. 그에 관한 기록과 그가 저술한 작품을 통해 그의 생애와 사상 특히 당나라에서의 활동과 귀국 후 신라 사회에 미친 그의 정치이념과 문학 및 종교사상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본다.
Ⅰ. 생애와 사상
최치원의 생애는 알려진 바와 같이 유년시절, 당나라 유학시기, 귀국후 신라에서의 활동, 은거시기로 크게 나뉘어진다.
이에 본고는 그간 밝혀진 연구 성과에 힘입어 그의 생애와 저술을 살펴보고 당과 신라말의 정치적 상황에서 형성된 그의 정치이념과 시무십여조의 개혁안, 그리고 신라말의 사상적 혼란 속에서 타고난 그의 종교관의 방향을 분석하고자 한다.
1. 가계 및 유년시절
최치원은 본래 신라의 왕경(지금의 경주)의 사량부(沙梁部) 혹은 본피부(本彼部) 사람으로 후기 신라의 진보적 시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견일(肩逸)의 아들로 알려져 있고,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 출신이다.
특히 최씨가문 가운데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최승우, 최언위와 함께 3최(崔 )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품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최치원은 이 중 가장 먼저 귀국해 당나라에서 쌓은 학문과 경륜을 조국 신라를 위해 펼쳐보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으나 두 사람은 입신양명에 발목을 잡는 골품제에 항거하여 최승우는 서남방면에서 일어난 후백제의 견훤의 진영에 편입했고, 최언위는 송악의 호족 왕건 휘하에 들어가 신라의 조정과 등을 지게 된다.
신라에는 골품제라고 해서 총 8계급이 있었다. 성골(聖骨)과 진골(眞骨), 6두품(六頭品)에서 1두품까지 있었다. , 성골은 부계, 모계가 모두 왕족의 혈통으로서 가장 높은 계급이며, 진골은 부계나 모계 중 한 쪽이 왕족일 경우, 또는 정복된 왕족이 여기에 해당된다. 예를 들면 김유신 집안은 가야의 왕족이었는데 신라에 합병이 된 후 곧 진골이 되었다.
6두품은 두품 중 가장 높은 계급인데 신라 17관등 중 제 6관등까지의 승진 제한이 있었다. 일반 평민은 1-3두품에 해당하는데 평민들의 기록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성골은 그야말로 다른 종족, 다른 신분의 피를 허용하지 않고 철저하게 왕족의 족내혼으로 이루어지며 다른 피가 섞이면 진골, 그 이외의 왕족이 아닌 신분의 사람들은 원천적으로 편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왕족이 아닌 경우로서 가장 출세할 수 있는 등급은 6두품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신라시대에도 이미 철저한 신분제도가 확립이 되어 있어서 신분상승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불만의 소지가 많았던 것이다.
1) 최치원의 탄생과 신라말의 왕실
지난 역사나 오늘의 사회현상을 보아도,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가 태어난 시대의 상황이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누구나 인지하는 사실이다.
최치원이 태어난 해는 857년이다. 이때는 귀족들의 견제와 거듭되는 반란에 시달려 왕위를 오랫동안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최치원이 태어난 해는 신라를 통치하던 문성왕이 죽은 해이다. 신라 중대의 강력한 왕권체제가 무너지고 신라하대의 각종 반란과 왕권교체로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했던 시기였다. 어느 시대든 이처럼 왕조의 말기는 혼란하다. 혼란은 결국 망국이라는 파국을 맞게 마련이다.
대개 이러한 시기에 태어난 사람은 시대 상황에 따라 삶의 방향도 큰 영향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출생은 그를 낳아준 부모의 사회적 계급과 지위와 연관되어 그 일생을 좌우할 만큼 삶 전체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최치원의 삶은 전반적으로 불안한 시기에 태어났다는 점 외에 정치 중심지인 경주에서 태어난 것도 그의 생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출생지는 오리무중이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이다.
최치원은 857년 <(憲安王 1년), (文聖王 19년)> 왕경인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계에 대하여 <崔致遠 字 孤雲 或 海雲 王京沙梁部人也 史傳泯滅不知其世系>, 『삼국사기』권 46 열전6, 최치원 조,
致遠乃 本彼部人也 今黃龍寺南昧呑寺南有古墟 云是崔候古宅也 殆明矣
(『삼국유사』권1, 혁거세 왕조)
위와 같이 삼국사기에서는 “최치원의 자는 고운 혹은 해운이요, 왕경의 사량부 사람이다. 그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서는 “치원은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황룡사(皇龍寺)와 매탄사(昧呑寺) 남쪽에 그의 집터가 남아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삼국사기』에는 사량부인으로, 『삼국유사』에는 본피부인으로 상이하게 나타나 있다.
만약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그는 경주 출신임에 틀림없다. 다만 경주 6촌 중 어느 부족출신인가를 가려내는 것은 <삼국사기> 신라 본조 유리왕조에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줄 때, 陽山部를 급량부로 하고 李氏를 주고 돌산고허부를 사량부로 하고 崔氏를 주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최치원은 사량부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어쨋든 삼국사(三國史)에 관한 기록 중 우리나라의 사료 중 두 종류의 사료에 기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최치원의 출신은 두 사료에 기대하는 게 합리적인 판단일 것이다.
출신 배경도 출신지만큼 한 인간의 삶에 운명을 결정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최치원은 그가 태어난 출생지도 불분명하지만, 태어난 家系도 분명치 않다. 그것은 최치원이 남긴 글 어디에서도 자신의 가계(家系)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남긴 작품 중에 자신의 아버지가 헌강왕의 命으로 ‘견일(肩逸)’이라는 이름을 하사(下賜)받았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삼국시대에 왕으로부터 이름을 하사받는 일은 나라에 큰 공을 세우거나 왕실에 특별한 업적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경주 사로국 6촌장이 신라개국 공신으로서 유리왕으로부터 성씨를 하사받았다는 것이 그 예이다.
이와 같이 그의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여 그 공로로 헌강왕으로부터 견일(肩逸)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그 공로가 원성왕을 위해 지은 발원문(發願文)이다. 발원문은 불교에서 수행자가 정진할 때 세운 서원(誓願)이나 시주(施主)의 소원을 적은 글이다.
최치원의 아버지 견일이 숭복사를 창건하는데 관여하고 원성왕의 극락왕생 천도를 위해 발원문까지 지은 것을 보면 상당한 글 솜씨를 지녔음은 물론, 신라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삼국유사'와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에 의하면 "숭복사는 신라 선덕왕 이전에 파진찬(波珍飡)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하여 '곡사(鵠寺)'라 하였는데, 원성왕(785년~798년)이 죽자 이곳에 능을 만들고 지금의 위치로 절을 옮겼다. 경문왕이 폐사(廢寺)나 다름없던 곡사(鵠寺)를 재건한 것은 꿈에 원성왕(元聖王)을 보았기 때문이다. 역사상 꿈과 관련해서 전해지는 설화들이 많다. 그 한 예가 이성계가 왕이 될 꿈해몽과 관련된 청허당 휴정의 「설봉산석왕사기」이다.
무학대사는 이 꿈해몽으로 이성계와 인연을 맺고 조선왕조 최초이자 마지막 왕사가 된다.
결국 꿈은 해석이 중요하다. 특히 정치사에서 꿈은 단순히 꿈이 아니라 정치행위기 때문이다. 경문왕이 곡사(鵠寺)를 재건하면서 원성왕을 끌어드린 것은 고도의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 경문왕은 곡사의 재건과 숭복사로 개명을 통해서 원성왕 직계와의 족벌의식을 제고(提高)하고자 했던 것이다. 왕이 족벌의식을 높인다는 것은 곧 왕권강화를 의도한 것이다. 그 이면에는 당시 귀족들의 힘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문왕의 이러한 사업에 최치원의 아버지 견일이 관여하고 있는 것은 그와 경문왕이 사적으로 밀접한 사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경문왕이 즉위하여 꿈에 원성왕을 보고 이 절을 증축한 뒤 능원(陵園)수호와 명복을 빌게 하였으며, 헌강왕 때 이 절의 이름을 ‘대숭복사’로 하였다고 하나 그 뒤의 역사는 알 수가 없다.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동쪽 토함산 자락, 숭복사지에는 최치원(857년~?)이 지은 비문이 1931년에 발견되었다.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 조각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절은 조선시대까지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비문을 받혔던 옛숭복사지의 귀부(龜趺)는 지금은 경주박물관 앞뜰에 놓여있다.
이로써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어주던 원찰이라는 것과 그곳에 있던 비문을 최치원이 지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경문왕과 최치원은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서로 신분은 다르지만 깊은 인연을 갖고 있었던 사이였다고 볼 수 있다.
경문왕은 최치원이 태어난 지 4년 되는 해에 왕위에 등극했고, 최치원이 당나라로 유학가기까지 왕위에 있었다. 경문왕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여귀설화(驪耳설화)'의 주인공이다. 경문왕이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귀가 자꾸 길어져 나귀 귀처럼 커져갔다. 왕비와 궁녀, 신하들까지도 이 사실을 몰랐지만, 오직 왕의 두건을 만드는 복두장(幞頭匠)만이 이 사실을 알았다. 그는 왕의 함구령(緘口令)을 어길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죽을 무렵에 도림사(道林寺) 대나무 숲에 들어가 "우리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했는데, 그 뒤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숲에서 "우리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들렸다. 경문왕은 이 소리가 싫어 곧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대신 산수유를 심었다. 그랬더니 그 뒤 바람이 불면 "우리 임금님의 귀는 길다네"라고 들렸다. 이 설화가 만들어진 것은 바깥세상 애환의 소리를 임금이 많이 듣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순수한 소망이 묘사된 설화가 아니었을까,
<삼국유사>에 따르면 경문왕은 헌안왕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 헌안왕이 경문왕을 사위로 맞이한 후 그를 후계자로 삼은 것은 그의 품성 때문이었다. 국선(國仙)이었던 경문왕 응렴(膺廉)은 스무살에 헌안왕의 부름으로 궁중 연회에 참석했다. 국선(國仙)은 당시 화랑도의 최고 지도자였다. 화랑도는 그 창설로부터 삼국통일이 완성된 문무왕대에 이르기까지 약 1세기 동안 융성하였으며, 삼국통일과정에 강한 무사도정신으로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통일 후 나라에 태평시대가 계속되면서 쇠퇴하여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9세기에 들어와 왕권이 약해지고 귀족세력이 강해지자 귀족들의 사병 집단으로 변질되어 가면서 화랑이란 말은 쓰지 않고 선랑(仙郞), 국선(國仙) 등으로 불렸다.
궁중연회서 헌안왕과 응렴이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다.
"낭(郎)이 국선으로 국토를 유력(遊歷)하며 어떤 일을 보았는가?"
"좋은 일 세 가지를 보았나이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낮은 사람들보다 겸손하게 사는 이가 첫째요, 큰 부지이면서 겸손하게 옷을 입는 것이 둘째요, 본디 귀하고 힘이 있으면서 그 위세를 쓰지 않는 이가 셋째이옵니다."
헌안왕은 응렴의 얘기에 감동해서 딸과 왕위까지 물려주었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경문왕은 즉위 후 대사면을 실시했다. 대사면의 정책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통치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시혜 정책이다. 대사면의 명분은 화합과 포용이지만,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초기 권력을 안정시키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경문왕의 또 다른 주용 정책은 국학(國學)의 진흥이다. 682년 (신문왕2)에 설치한 통일신라시대의 교육기관인 국학은 신라가 삼국통일 이후 국가 정치제도를 정비함에 따라 지배체제의 효율적인 운영의 필요에 의해 추진된 것이다.
경주 박물관 앞뜰에 있는 숭복사 터 귀부
http://www.hamyang.org/choi1.htm
가야산 신선이 된
최치원 선생 (3)
합천향토사연구회장
이 성 동
경문왕이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국학진흥에 힘쓴 이면에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 왕조 시대나 현대에 있어서도 자신의 권력을 펼칠 수 있는 수단이 인사권이다. 왕권의 힘은 바로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거나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인사권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제 30대 문무왕 때는 강력한 전제 왕권체제를 구축하여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이 태평시대를 구가하였으나 이후 귀족세력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제 35대 경덕왕 때에 이르러서는 귀족들의 조직적인 반발이 일어나 왕권이 급속도로 약화되기 시작한다.
제 36대 혜공왕 때에는 여섯 차례의 각종 반란과 친위 쿠데타 사건이 잇따르면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친왕파와 반왕파로 나뉘어 치열한 왕권다툼으로 신라는,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혼란기로 치닫게 된다.
경문왕의 왕권회복정책은 6두품 자제들을 많이 입학시켜 졸업과 동시에 곧장 관직에 임명함으로서 가능하면 자신의 수족들을 요소요소에 배치하면서 동시에 반발세력을 잠재우고 왕권을 강화하는 고육책이었다. 국학에는 6두품 자제들이 많이 입학했는데, 이들은 9년 동안 논어(論語), 효경(孝經)을 비롯하여 예기(禮記), 주역(周易), 사서(史書), 모시(毛詩),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선(文選) 등을 배웠다. 결코 이 과정은 상당한 재력은 물론 인내력과 학문에 대한 열정 없이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이 같은 과정은 정실인사를 배제하고 학문연찬(學問硏鑽)과 수신(修身)과정을 거친 자들에게 관직을 부여함으로써 귀족들의 반발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된 것이다.
경문왕의 아버지는 계명(啓明)이며, 어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할아버지는 43대 희강왕이며, 왕비는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헌안왕의 큰 딸인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이고, 헌안왕의 작은 딸도 후에 왕비로 삼았다. 아들은 황(晃 :정강왕), 정(晶 : 헌강왕) 윤(胤)이고 딸은 만(蔓: 진성여왕)이며, 동생으로는 위홍(魏弘)이 있었다. 경문왕은 할아버지가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헌안왕의 사위의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신의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서도 열심히 국사에 전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경문왕 때는 재위 중에 여러 차례 반란이 계속 발생했다. 경문왕 즉위 해인 861년에는 이찬 윤흥(允興)과 숙흥(叔興), 계흥(季興) 등이, 868년에는 이찬 김예(金銳), 김현(金鉉) 등이 874년에는 근종(近宗) 등이 반란을 꽤했다. 이처럼 경문왕은 재위 14년 동안 3차례나 반란이 있었다는 것은 여전히 경문왕의 왕위도 불안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경문왕의 불안했던 통치기간이 최치원으로 하여금 당나라 유학의 길을 선택하게 하는 동기가 된 것이다. 혼돈은 최치원과 같은 육두품 출신들에게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2) 최치원은 왜 당나라에 조기 유학의 길을 택했나?
최치원은 6두품의 출신으로서 골품제(骨品制)하에서도 국가 요직에 임명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당나라에 유학의 길을 택한 것은 나이 때문이었다. 최치원의 아버지 견일은 그의 아들이 국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입학연령이 되는 15세가 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수 없었다. 기다린다 해도 국학에의 입학을 또한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라처럼 골품제가 없는 당나라에 가서 높은 관직에 오르면 쉽게 신분상승이 되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한 믿음은 당시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고 당의 교육기관인 국자감에서 공부하여 당의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 때 신라에서 당나라에 유학한 학생들을 숙위학생(宿衛學生)이라고 하였고 이들에게 응시 기회를 준 빈공과(賓貢科)라는 과거제가 있었는데 이 시험에 합격하면 당나라의 관리가 되기도 하였다. 최치원(崔致遠) 최승우(崔承祐), 최언위(崔彦撝) 김운경등이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국내에서 활약했고, 불교계에서는 의상과 원측, 혜초 등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불교진흥에 큰 역할을 했다. 그 외에도 당나라 유학을 다녀 온 사람들이 신라 조정의 높은 직위에 올라 있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견일은 자신이 할 수 없었던 일을 아들을 통해 실현해보려는 강한 의지로 아들 최치원을 당나라에 유학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는 최치원을 당나라에 보내면서 "10년 안에 진사에 급제하지 않으면 내 아들이라 하지 말라, 나 역시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으리라"는 말에서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들 최치원을 당나라에 유학 보내고 난 후 아들이 당나라에서 벼슬하고 금의환향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계원필경>에서 간단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최치원은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불효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최치원의 형제로는 고국에 그의 형 현준(賢俊)이 있었고 종제(從弟)가 있었는데, 그의 형 현준(賢俊)은 해인사의 승려로 있었다. 종제로는 최서원(崔棲遠)과 최인연(崔仁渷)의 활동이 보인다.
2. 당나라에서의 활동
1) 당나라로 떠나다
최치원은 유학(儒學)적 소양(素養)을 쌓으며 성장했지만 신라의 골품제 하에서는 그의 역량을 소신껏 발휘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해서 입당(入唐)을 결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의 아버지 최견일이 아들을 당나라에 유학 보내기로 결정한 요인도 최치원이 가진 유학적 지식과 자식에 대한 신뢰감이었다. 최견일은 자식 뒷바라지를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자식에게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이다. 최치원은 아버지 최견일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12세에 배편으로 당(唐)나라에 건너갔다. 최치원이 탄 배가 중국 산동의 등주(登州)에 도착했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한반도와의 해상 교통로에 위치한 항구로서 신라인과 신라 선박의 출입이 잦았다. 발해만과 마주하고 있는 등주는 해상을 통해 온 신라 사람들이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가기 위해 처음으로 딛는 중국 땅이다. 여기서 수도 장안까지 가려면 교통수단이 복잡하고 여행 기간도 3개월 정도 소요된다. 최치원이 장안으로 가면서 운하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운하 근처는 물산이 집산하는 곳이고, 짐을 나르기도 편리하였기 때문이다. 최치원이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이 운하는 뒷날 자신의 상관으로 모셨던 고병(高騈 : 중국명 고변)이 다스렸던 관할이었기 때문에 최치원의 당나라 입당에 중요한 의미를 주는 교통로가 되었을지 모른다.
2) 최치원이 도착한 장안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지금은 서안(西安)으로 불리는 장안은 한나라 고조 5년 (기원전 202년)에 설치한 현(縣)이었다. 중국 7대 고도(古都) 중 하나인 장안은 서한(西漢), 신(新), 동한(東漢), 서진(西晉), 전조(前趙), 전진(前秦), 후한(後漢),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隨), 당(唐)의 수도였다. 중국 역대 왕조 중 가장 많은 왕조가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사실상 중국 고대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장안에 위치한 위수(渭水) 평원은 중국 고대문명의 젓줄인 셈이다.
장안을 관중(關中)이라 하는 이유는 동쪽으로는 함곡관(函谷關)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무관(武關), 남쪽으로는 산관(散關), 북쪽으로는 소관(蕭關)에 이르고 있어, 네 관문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관(關)이란 골짜기에 성벽을 쌓은 것이니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수(渭水)는 그 분지평야 한 가운데를 흐르는 황하(黃河)의 지류이다.
우리가 흔히 들어온 ‘장안의 화제’는 중국의 고도(古都)인 장안(長安)에서 일어난 큰 얘깃거리를 말한다. 그 만큼 장안은 중국은 물론 한국인에게도 오랜 세월동안 유명한 도시로 기억되고 있다. 최치원이 장안에 도착해서 이곳이 얼마나 위대한 도시인가를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원전 750년 전 “세계의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 했듯이 기원전 200년 전에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블랙홀처럼 모여들었던 곳이 장안이다. 장안에는 최치원처럼 신라에서 온 유학생뿐만 아니라 돌궐, 거란, 위구르 등 각 지역에서 각양 각생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들어와 살고 있었다. 이때 장안에서 탄생한 사상과 예술, 문학, 제도 등은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가야산 신선이 된
최치원 선생 (4)
합천향토사연구회장
이 성 동
당나라 장안에 도착한 최치원은 얼마간의 체류기간이 지난 다음, 타국에서 온 다른 유학생과 함께 국자감의 숙위학생이 되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최치원은 이곳에서
인백지기천지(人百之己千之), 즉 남이 백번하면 자기는 천번하는 노력으로 경(經), 사(史), 자(子), 집(集) 등을 두루 섭렵(涉獵)하였다. 經, 史, 子, 集은 중국 남북조 시대에 책을 분류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진 개념인데 경은 주로 사서오경인 '경서(經書), 사(史)는 '역사서'를 자(子)는 '자서(子書)'로 제자서(諸子書)'인데 춘추전국시대에 출현했던 제자백가의 주장을 담은 책으로 책의 이름에 자(子)가 붙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 예컨대『孟子』, 『老子(노자)』, 『한비자(韓非子』 등이 그것이다. 집(集)은 시(詩)나 부(賦), 사(史) 등의 문작작품을 엮은 '문집류'를 일컫는 개념이다.
『계원필경(桂園筆耕)』 의 서문에 의하면 이 시기에 그는 많은 시(詩)와 산문(散文)을 창작하여 뛰어난 시재(詩才)로, 재능있는 문필가로 널리 알려져 중국의 이름난 시인, 문필가들을 경탄시켰다.
그는 서경(西京)에서 스승을 만나 공부한지 6년 만인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시(主試)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 뒤 동도(東都:洛陽)에서는 시작(詩作)에 몰두했는데, 이때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雜詩賦)〉 30수 1권 등을 지었다. 치원이 빈공과에 합격한지 2년 만인 876년(헌강왕 2)에 강남도(江南道) 선주(宣州)의 율수현위(溧水縣尉)로 임명되었다.
최치원의 표현에 따르면 “현위는 그 직급은 낮으나 그 임무는 매우 중해서(其官雖卑 其務甚重) 죄수들을 살펴야 하고 피로한 백성을 위무하니(推詳滯獄 慰撫疲) 동료 공직자는 그 직언을 겁내고 지방수령들도 두려운 마음을 가진다(佐僚能憚 其直聲 宰尹亦懷 其畏色)
사리(事理)를 말하자면 실로 훌륭한 인재에게 맡겨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중요한 자리에 미성년인 만 19세의 외국인을 임명한 것은 당시 당나라로서는 이례적인 우대(최준옥, 사적고, 1982 보연각 265면)였다.
최치원 본인도 “본디 바닷가 출신으로 가문을 빛내게 될 줄 상상도 하지 못했거늘, 더욱이 면 곳 사람으로 한 고을 중책까지 맡았다.”고 회상했다. 이때 “급료가 많고(현위의 연봉은 당시 200~300석이었다고 함, -최완수 ‘신동아’ 2001년 9월호)
일은 한가로와 더욱 배움에 촌음(寸陰)을 헛되이 하지 않아 지은 글 모두 5권”(계원필경 서문에서 중산복궤집 내력 설명)이었다.
최치원은 귀국 후 이를 진성여왕에게 봉정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당나라에서 벼슬하면서도 기울어져가는 고국 신라를 구하고 부모님을 뵙고 싶은 애뜻한 심정을 아래와 같은 詩로 달래기도 하였다.
窓外三苦雨 창밖에는 밤이 깊도록 비가 내리고
燈前萬里心 등불 아래 마음은 고국을 달리네
秋風惟苦吟 가을 바람에 시를 읊네
世路少知音 세상에 내마음을 아는 이 없네
율수현은 당시 강남서도(江南西都) 선주(宣州) 관할이었다. 현재 강소성 강령부에 속한다.
삼국사기 이병도박사 역주(1983년판과 2000년판 모두)는 “율수현은 지금 강소성 율양현(溧陽縣)”이라고 설명했으나 착오이다. 율수현은 지금도 율수현 그대로 엄존하고 있다. 남경 남쪽 50km 지점에 율양(지금은 市로 되었음)이 있다. 현재 각종 저서와 제종(諸宗) 족보의 70% 이상이 율수(溧水)를 표수(漂水)로 잘못 적고 있다.
2000년 10월 16일 이 현(縣)의 박물관 경내에 선생의 동상이 세워졌다. 2001년 10월에는 경주최씨 후예들이 찾아가 이 동상을 참배했다.
3) 학문정진 위해 현위(縣尉 )사직(辭職)
최치원은 877년 겨울 현위직을 사임하고 입산수학(入山修學)에 들었다. 공식적인 사임 이유는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 : 관리 선발을 위해 문장 3편을 시험)에 응시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입산했으나 진심은 다음과 같다.
"나는 덩굴풀처럼 누구에게 붙어 사느니, 거미가 줄을 치듯 제힘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자 한다. 수 없이 생각해 봐도 학문하는 것만 못하다(不如學), 평생에 애써 노력한 것이 오히려 헛될까 두려워서(百年勤苦 唯恐失之) 벼슬길의 진흙탕에 다투어 뛰어들지 않고 다만 유교의도를 좇았다(未兢宦途 但遵儒道). 그러므로 처음 벼슬에서도 진토를 싫어하고(莁仕而懷超塵土) 거처할 데를 고르는데 산천을 그리워하니(卜居而貪憶林泉) 속세의 요로와 교통하는 데는 눈길을 준 일이 없고(人間之要路通津 眼無開處) 물외의 청산과 녹수에 돌아갈 때만 꿈꾸었다(物外之靑山綠水 夢有歸時)"(계원필경 재헌계)
4) 가난과 난리로 절박한 상황에
그러나 혈혈단신 외국청년으로서 공부에 장기간 전념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두 세 해가 지나자 "녹봉은 남은 것이 없고 글 읽을 양식이 모자랐으며"(제2장계) 설상가상으로 난리의 피 바람이 신변을 위협했다. 즉 885년에 반란을 일으킨 황소(黃巢)의 군대가 주변에 가까이에까지 밀어닥쳐 879년 6월 12일에는 율수의 주도(州都)인 선주(宣州)가 함락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생계가 아닌, 생사 자체가 걸린 절체절명의 급박한 상황이었다. "하늘이 높으니 물을 곳이 없고 날이 저무니 어디로 가야할까(天高莫問 日暮何歸)"(여격장서) "어디로 향해야 생을 안돈할 수 있을까(指何門而欲安生計)"(재현계)란 말은 바로 이런 급박함을 웅변해주고 있다.
이때의 심정은 다음 글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집은 멀고 길은 험하다. 한없는 근심이 밤세도록 속을 태우고(窮愁則終夜煎熬) 먼 고향 소식은 해를 지나도록 막혀있다. (遠信則經年阻絶)." (여객장서)
언 베개에 마음이 상하는데 내 짝은 등불에 비치는 외로운 그림자뿐이다(凍枕傷神 孤燈伴影) 멀리서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는 나그네의 마음 두근거리게 하여 편안한 잠 이룰 길 없으니, 천만 갈래의 울적함이 쌓인다. 더구나 집은 멀리 해 솟는 곳에 있고 길은 큰 하늘 못을 격해 있는 몸(家遙日域 路隔天池). 객사(客舍)에 들기가 원수보다 싫구나(投客舍而方甚死)" (재헌계)
전란 와중인 879년 이 해는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란 고사성어가 생긴 해이기도 하다. 이 말은 한 장수의 전공은 만 명의 군사가 싸움터에서 죽은 결과라는 뜻으로, 오직 공이 한 장수에게만 돌아가는 것을 개탄하는 말. 曺松의 <己亥歲>시에 나오는데 이 해가 바로 기해년이다.
875년에 발발. 879년 선주를 함락시킨 황소는 880년 황제를 참칭(僭稱 : 자기의 신분에 걸맞지 아니하는 칭호를)하고 881에는 수도인 장안까지 점거했으나 883년 장안을 뺏기고 884년에 피살되었다.
최치원에게는 설상가상으로 또 하나의 이변이 생겼으니 응시하고자 한 박학굉사과 시험이 이해부터 무기 연기되어 버린 것이다(松本明 1975.'鈴木선생고희기념 동양사논총' 409면). 아마 전란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험은 18년 뒤에야 부활되었다.
5) 고병(高騈)의 막료로 관직 다시 시작
이어진다. http://blog.daum.net/6299842/75998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