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경주최씨대종회 2011년도 춘향 및 총회 개최의 건 등

2011.3.10.송달. 2011.3.10.편집:도천 최평열

 

2011. 년도 춘계향사 및 총회 개회의 건있으니

경주시 사단법인 경주최씨대종회 로 많이 참가 바람.

 

 

 

합천군 가야면 사무소에서 종중향례행사 조사서 참조

종중(문중)향례행사 조사서

 

재실명

문창후 고운 최치원선생 농산정 학사당 가야서당

 

 

 

 

 

 

사당명

학사당

 

사 당

 

위패수

1위

 

향례일시

춘향제(학사당):한식(04.05.경)

추모행사(농산정):04.17(음)

 

참석인원

약 100명

 

종중또는

 

단 체

학사당 유계(儒契)

농산정 유계(儒契)

 

대표자

 

주소: 대구시 남구 대명3동 1921-3 양지빌라트 501호

 

성명: 최평열 전화: (053)654-5912 핸드폰: 011-807-5912

 

위 치

 

학사당: 가야면 구원리 산 2-1 농산정: 가야면 구원리 산 1

 

재실건립

 

연 혁

1927년 건립 후 1936년 현 위치로 옮긴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소송(대법원 확정 판결로 현 대표자 승소) 여파로 1997년부터 향사 중단.

제목부터 유림(儒林) 행사 조사서로 바꿔 달라고 할 정도.

 

배향선생의

 

약 력

 

최치원(崔致遠, 857~?)은 유교∙불교∙도교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지녔던 학자

 

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하지만 높은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뜻을 현실

 

정치에 펼쳐보이지 못하고 깊은 좌절을 안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이룩한 학문과 문장의 경지는 높았으나, 난세를 산 그의 삶은 그가 이룩한 높

 

은 경지만큼 불행했다.

 

사후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저서로 『계원필경』『법장화상전』이 있다.

 

향례방법

 

(홀기)

학사당 : 초헌, 아헌, 종헌, 독축, 집례, 주작, 봉작 등을 분전하여 홀기에의 한 향례

농산정 : 시를 읊거나 짓는 등 문창후 고운 선생을 추모함.

 

 

* 우리 학사당, 농산정 가야서당에 관련 춘향행사 못해죄송 *

 

우리 학사당 춘향행사는 한식일였는데 무도한자들의 재산탐욕에 소송이 16년을 해서 대법원의 판결에서도 두번을 무도한자들의 원고가 소유권을 취득을 했다거나 관리를 했다고 볼 수도 없음이 분명하다고 원심이 판결했는데, 항소심에서 는 당사자능력이 없음이 분명하다,라고 부산고등법원의 소 각하각하로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위원회 종중이라고 명칭을 바꾸여 다시 대구법원에 소제기하여 각하되고 대법원기각으로 확정이 되었음에도 피고이었던 최평열 승소하여 선대에 있어 본래되로 춘향행사를 유림인 학사당유계 및 농산정유계원으로 계속 최평열 문창후 고운 최치원선생을 기리는 행사를 해야 하는데, 방해할 목적으로 위 유림단체와 주손인 최평열과 행사를 못하게 할 목적으로 해산시킨 후 페소한 무도한 사이비단체 들이 그 소송 중반 부터 매년 무단출입하여 행사할려고 하는데 못하게 하고 대응하고 있습니다, 파렴치한자들의 감은이슬에 속지 마시길 부탁 드립니다.

 

학사당, 농산정, 가야서당 건물 소유자(대표) 최평열 씀

 

 

그래서 매년 학사당, 농산정, 가야서당 에 비가 세고 페허가 되어 가도록 행정당국으로부터 보수도 못하도록 방해되고 행정당국으로 부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1994년부터 16년을 이런 여파로 협조를 받지 못해서 학사당 및 농산정에서 유림행사가 중단되었습니다, 

위 사단법인 경주최씨 대종회(경주시 인왕동 274번지 : 박물관 남서쪽 300메다 즘 남산기슭)에서 매년 상서장(해운 최치원선생 영정모신곳)에서 전국 경주최씨 종인님들이 4월 16일 춘계향사 및 총회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곳에 매년 참석하고 있습니다, 종인님 이곳에 많은 참석 바랍니다.

 

학사당, 농산정, 가야서당에서는 매년 한식에 춘햐향사 행사를 했으나 부득이 현제는 유림향사를 못합니다, 경주최씨 종인님들이 춘계향사흫 지내는 상서장 건물과 최평열 명의로 된 학사당, 농산정, 가야서당 건물과 별개 입니다, 

그럼에도 무도한자들이 분쟁을 만들었습니다, 이 여파로 매년 문창후 고운 최치원선생 춘향향사행사를 못하는 점에 되하여 죄송하오니 삼가 양해 해주시길 바랍니다.

학사당 등 주손(소유자:총괄주선자) 최평열 씀

 

 

아래 블로그 프로필 학사당, 농산정, 가야서당 등 향사사진 상세히 보는곳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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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대자연농원/농산정/학사당/가야서당/대표도천최평열=

   

블로그 찾아주셔서 감사 합니다.

오늘도 즐겁고 행복한 시간 되십시요,

해인사의 농산정을 찾아서

 

농산정은 신라 말기의 거유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은둔하여 수도하시던 곳

이라고 합니다    원 정자의 창건시기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정자는

후손과 유림에 의하여 중건된 것으로 1990년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정자 건너편에는 치원대 또는 제시석

이라고 하는 석벽이 있는데 고운 최치원 선생의 칠언절구

둔세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정자의 이름도 그 시의 

한 귀절을 따서 농산정 이라고 합니다   

 

 

 

고운선생은 서기 857년인 문성왕 19년에 사량부에서 탄생하셨고

성은 최요 이름은 치원, 자는 고운, 호는 해운이라고 합니다 

 

 

고운선생이 탄생하실 때만 해도 신라에는 문자가 없었고

글이 없으니 기록도 할 수 없는 시대였다고 합니다

 

고운선생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당나라의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우리나라의 최초 문집인 계원필경집을 남겼는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보다도 수백년이 앞선

기록문자가 된다고 합니다 

 

 

농산정 앞에 세워져 있는 고운최선생둔세지

(孤雲崔先生遯世地)라는 표지석이

개울가에 세워져 있습니다

 

 

고운 선생은 중국에서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 이라는

글을 써서 황소에게 보낸 격문이 있습니다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땅 속의

귀신 까지도 이미 너를 죽이려고 의논하였을 것이다 라는

귀절에서 포악무지했던 황소도 놀라 혼비 백산하여

의자에 앉았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최치원의 제시석에 대해 김종직은 제시석을 두고 부서진 돌

사이에 먹물흔적 남았네 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제시석에서 필묵흔적을 느낄 수 있었던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강 정구라는 묵객은 가야산을 유람한 뒤에

유가야산록 이라는 책에서

 

 

폭포 곁 돌 표면에 최고운 시 한수를 새긴 것이 있는데

 

 

매년 장마의 미친듯한 물살에 씻겨 마멸되어

지금은 다시 알아 볼 수 없다

 

 

한 참 손으로 비벼서 만져본 후에 어슴푸레 겨우

한 두 글자를 얻었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제시석은 길에서 조금 높은 곳에 있고

또 그 필 획이 매우 뚜렸하여 김 종직과 한강이

말 하던 제시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시석의 좌측 하단에 우암서(尤菴書)라는 글자를 보면

우암 송시열의 글씨는 아닌 것 같다고 하여

 

 

후대에 이 제시석의 글씨가 우암의 것임을 표시하기 위하여

나중에 새겨 넣은 것으로 말하고 있는 학설도 있습니다 

 

 

 

동강(東江) 김영한의 급우제집(及禹齊集)에는

가야산 해인사 라는 시의 주에 ......

  

 

암벽에 우암이 쓴 최고운의 절구가 있다 고 하여

이를 우암의 글씨로 단언하고 있습니다  

 

    

농산정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72호로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 입구에 있습니다 

회장님! 좋은 답사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농산정 고운 최치원선생

[온긴글]

 

 

 

 

 

 

 

 

 

 

 

 

 

 

 

 

 

 

 

 

 

 

 

 

농산정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72호로,합천군 가야면 해인사 입구에 있다.

농산정은 신라 말기의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은둔하여 지냈던 곳으로
원 정자의 창건시기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정자는 1990년에 보수 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는

홍류동계곡의 맑은 물과 더불어 가야산을 찾는 이들의 마음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 성철스님이.

 

 

고운최선생둔세지(孤雲崔先生遯世地)는 두번째 세워져 있다.

 


최치원 선생의 칠언절구 둔세시가 새겨져 있다.

“미친 듯 겹친 돌 때리어 첩첩한 산 울리니

(狂奔疊石吼重巒 광분첩석후중만)
지척간의 말소리조차 분간하기 어렵다네

(人語難分咫尺間 인어난분지척간)
시비소리 들릴까 저어하노니

(常恐是非聲到耳 상공시비성도이)
흐르는 물 시켜 온 산을 감았네”

(故敎流水盡籠山 고교유수진농산)

 

농산정 이라는 이름도 그 시의 한 귀절이다.

 

 

 

 

 

홍류동을 최치원은 '풍부한 수량의 거센 물소리가 세상의 시비소리를 막아주었다.

 

“스님이여 청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소
산이 좋다면서 어찌하여 산 밖으로 나오려고 하시는가
뒷날 내 자취를 시험삼아 보시구려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니”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시(詩) -농산정(籠山亭)

 

지난 11월 16일 하나산악회에서 매화산을 산행하기에 앞서 가야산  홍류동계곡(계곡에 비치는 가을 단풍이 계곡물까지 붉게 물들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초입에 위치한 고운 최치원선생의 유서깊은 농산정을 답사하면서 아름다운 계곡과 맑은 물, 농산정의 멋스러움을 감상하였다.

 

마침 12월 21일 영덕 팔각산 산행날 대절 버스안에서, 송전 류진환 시인이  최치원선생의 <농산정>시를  해설한 것을 여기에 옮겨 싣는다.

 

 농산정으로 가는 무지개 다리

 

 무지개다리와 솔

 

 농산정을 바라보며

 

 홍류동 계곡의 맑은 물

 

 농산정

 

 농산정의 송림

 

 농산정 안에 걸려있는 최치원의 시 농산정

 

 

 

 

아래의 籠山亭 작품은 신라 말 대문장가인 孤雲 崔致遠이 지은 7언 절구로 구성된 유명한 시를 소개한다.

그가 당나라 유학의 과정을 마치고 높은 벼슬자리를 사양한 후 가야산으로 들어가서 풍류생활을 보내던 중 산수(山水)의 풍경을 읊은 시다. 현실을 대하는 작자의 의식을 간결한 형식 속에 잘 응축시켜 놓고 있다. 부귀와 벼슬 등 속세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남은 인생을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작자의 풍류가 이 시의 주된 이미지<물소리>에 의해 활기차게 드러나고 있다.


籠山亭


孤雲   崔致遠


狂奔疊石吼重蠻(광분첩석후중만)   물결 거세게 흘러 산을 울리고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가까운 거리에서도 말소리를 분간하기 어렵구나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시비 따지는 소리 들릴까 두려워

 

故敎流水盡籠山(고교류수진농산)   흐르는 물소리로 온 산을 에워싸고 있네.


<註>

奔  달아날 분        疊  겹칠 첩         吼  울 후

巒  뫼 만               咫  짧을 지         恐  두려울 공

籠  대그릇 롱


疊石  포개진돌        重巒   겹쳐진돌         籠山  산에 꽉 차게함



시의 구성을 보면, 기(起)구에서는 온산에 울려 퍼지는 웅장한 물소리를, 승(承)구에서는 인간의 말소리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물소리가 울려 퍼짐을, 전(轉)구에서는 시비의 소리가 난무하는 어지러운 세태에 대한 작자의 심리가 반영되어 있으며, 결(結)구에서는 그러한 세상과 스스로를 격리시켜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하고자 하는 작자의 심리가 표현되어 있다. 이 시의 轉ㆍ結구에서, 인간의 <시비소리>가 듣기 싫어서 산골짜기 모두를 <물소리>로 가득 채운다는 표현으로, 참으로 깊은 해학의 뜻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구성을 다시정리하면>

 起---자연의 소리(웅장한 시냇물 소리)

 承---인간의 소리(속세와의 단절감)

 轉---작가의 심리(세상의 소리와 단절하고 싶은 마음)

 結---세속과 격리(은거하고 싶은 마음)



<崔致遠> 857~ ?

  통일신라 말기 학자 문장가. 경주(慶州) 최(崔)씨 시조,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6두품 출신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 , 12세에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였고,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당시 사회적 현실에서는 자신의 개혁안이 실현 될수 없음을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가야산 神仙이 된 文昌後 孤雲 崔致遠 선생 (제1부)

                            

                           고운최치원선생                이성동사단법인합천향토사연구회장 문화칼럼

 

                    

 

 

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해인사는 조선 팔경중의 하나인 가야산과 남산제일봉이 병풍처럼 둘러 싸여 주위 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명승지에 위치해 있다. 통일신라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천이백년 화엄사상의 불법을 전파한 유서 깊은 화엄종찰이다. 해인사의 해인(海印)의 의미는 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 모든 것이 도장 찍히듯 그대로 바닷물에 비쳐 보인다는 뜻으로 모든 번뇌가 사라진 부처의 마음 속에는 과거와 현재·미래의 모든 업이 똑똑하게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승경전의 하나인 화엄경은 <대방광불화엄경>을 말하며 따라서 화엄세계는 광대무변하게 우주에 편만해 계시는 붓다의 만덕(萬德)과 갖가지 꽃으로 장엄된 진리의 세계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해인사에 이르는 연도인 홍류동 일대는 부처님의 섭리로 사시사철 山水가 맑고 그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빚어내는 것인지 모른다.

신라 말 벼슬을 버리고 여기서 한동안 머물다가 신선이 되어 종적을 감추었다는 최치원 선생의 농산정(籠山亭)과 재실(齋室)이 고즈넉이 서 있는 홍류동은 그 계곡 따라 십리길에 늘어서서 하늘을 떠받들듯 솟아 있는 키 큰 홍송 밑으로 봄철에 시작하여 여름철끝자락까지 은행나무 벚나무들이 눈부시게 푸른 터널을 이루며 싱그러운 녹음(綠陰)의 향취(香臭)에 젖게 하는 곳이라 누구나 이곳에 오면 부처님의 화엄의 세계에 들어서는 장엄한 분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가을이 오면 이곳에서 펼쳐지는 천자만홍(千紫萬紅)의 아름다운 풍광이 계곡물을 붉게 물들인다 하여 언제부터인가 이곳을 홍류동(紅流洞)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곳은 토황격소문(討黃檄巢文)으로 당나라 전역에 이름을 떨쳤던 풍류객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이 고국에 돌아와서도 난세(亂世)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고 전국의 산과 바다와 강을 따라 주유(周遊)하다가 이곳 홍류동에 들려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종착지로 머문 곳이다. 그가 이곳에 머물며 시끄러운 세상의 온갖 시비(是非)를 흐르는 벽계수(碧溪水)에 씻고 청산을 벗삼아 살다가 신선이 되어 가야산에 사라졌다는 설화가 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구전(口傳)되어 전해지고 있다.

한국 한문학의 조종(祖宗)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최치원은 그의 생애를 통해서 많은 글을 남겼다. 그에 관한 기록과 그가 저술한 작품을 통해 그의 생애와 사상 특히 당나라에서의 활동과 귀국 후 신라 사회에 미친 그의 정치이념과 문학 및 종교사상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본다.

 

Ⅰ. 생애와 사상

 

최치원의 생애는 알려진 바와 같이 유년시절, 당나라 유학시기, 귀국후 신라에서의 활동, 은거시기로 크게 나뉘어진다.

이에 본고는 그간 밝혀진 연구 성과에 힘입어 그의 생애와 저술을 살펴보고 당과 신라말의 정치적 상황에서 형성된 그의 정치이념과 시무십여조의 개혁안, 그리고 신라말의 사상적 혼란 속에서 타고난 그의 종교관의 방향을 분석하고자 한다.

 

1. 가계 및 유년시절

최치원은 본래 신라의 왕경(지금의 경주)의 사량부(沙梁部) 혹은 본피부(本彼部) 사람으로 후기 신라의 진보적 시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견일(肩逸)의 아들로 알려져 있고,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 출신이다.

특히 최씨가문 가운데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최승우, 최언위와 함께 3최(崔 )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품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최치원은 이 중 가장 먼저 귀국해 당나라에서 쌓은 학문과 경륜을 조국 신라를 위해 펼쳐보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으나 두 사람은 입신양명에 발목을 잡는 골품제에 항거하여 최승우는 서남방면에서 일어난 후백제의 견훤의 진영에 편입했고, 최언위는 송악의 호족 왕건 휘하에 들어가 신라의 조정과 등을 지게 된다.

신라에는 골품제라고 해서 총 8계급이 있었다. 성골(聖骨)과 진골(眞骨), 6두품(六頭品)에서 1두품까지 있었다. , 성골은 부계, 모계가 모두 왕족의 혈통으로서 가장 높은 계급이며, 진골은 부계나 모계 중 한 쪽이 왕족일 경우, 또는 정복된 왕족이 여기에 해당된다. 예를 들면 김유신 집안은 가야의 왕족이었는데 신라에 합병이 된 후 곧 진골이 되었다.

6두품은 두품 중 가장 높은 계급인데 신라 17관등 중 제 6관등까지의 승진 제한이 있었다. 일반 평민은 1-3두품에 해당하는데 평민들의 기록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성골은 그야말로 다른 종족, 다른 신분의 피를 허용하지 않고 철저하게 왕족의 족내혼으로 이루어지며 다른 피가 섞이면 진골, 그 이외의 왕족이 아닌 신분의 사람들은 원천적으로 편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왕족이 아닌 경우로서 가장 출세할 수 있는 등급은 6두품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신라시대에도 이미 철저한 신분제도가 확립이 되어 있어서 신분상승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불만의 소지가 많았던 것이다.

 

1) 최치원의 탄생과 신라말의 왕실

 

지난 역사나 오늘의 사회현상을 보아도,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가 태어난 시대의 상황이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누구나 인지하는 사실이다.

최치원이 태어난 해는 857년이다. 이때는 귀족들의 견제와 거듭되는 반란에 시달려 왕위를 오랫동안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최치원이 태어난 해는 신라를 통치하던 문성왕이 죽은 해이다. 신라 중대의 강력한 왕권체제가 무너지고 신라하대의 각종 반란과 왕권교체로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했던 시기였다. 어느 시대든 이처럼 왕조의 말기는 혼란하다. 혼란은 결국 망국이라는 파국을 맞게 마련이다.

대개 이러한 시기에 태어난 사람은 시대 상황에 따라 삶의 방향도 큰 영향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출생은 그를 낳아준 부모의 사회적 계급과 지위와 연관되어 그 일생을 좌우할 만큼 삶 전체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최치원의 삶은 전반적으로 불안한 시기에 태어났다는 점 외에 정치 중심지인 경주에서 태어난 것도 그의 생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출생지는 오리무중이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이다.

 

최치원은 857년 <(憲安王 1년), (文聖王 19년)> 왕경인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계에 대하여 <崔致遠 字 孤雲 或 海雲 王京沙梁部人也 史傳泯滅不知其世系>, 『삼국사기』권 46 열전6, 최치원 조,

致遠乃 本彼部人也 今黃龍寺南昧呑寺南有古墟 云是崔候古宅也 殆明矣

(『삼국유사』권1, 혁거세 왕조)

위와 같이 삼국사기에서는 “최치원의 자는 고운 혹은 해운이요, 왕경의 사량부 사람이다. 그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서는 “치원은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황룡사(皇龍寺)와 매탄사(昧呑寺) 남쪽에 그의 집터가 남아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삼국사기』에는 사량부인으로, 『삼국유사』에는 본피부인으로 상이하게 나타나 있다.

만약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그는 경주 출신임에 틀림없다. 다만 경주 6촌 중 어느 부족출신인가를 가려내는 것은 <삼국사기> 신라 본조 유리왕조에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줄 때, 陽山部를 급량부로 하고 李氏를 주고 돌산고허부를 사량부로 하고 崔氏를 주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최치원은 사량부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어쨋든 삼국사(三國史)에 관한 기록 중 우리나라의 사료 중 두 종류의 사료에 기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최치원의 출신은 두 사료에 기대하는 게 합리적인 판단일 것이다.

출신 배경도 출신지만큼 한 인간의 삶에 운명을 결정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최치원은 그가 태어난 출생지도 불분명하지만, 태어난 家系도 분명치 않다. 그것은 최치원이 남긴 글 어디에서도 자신의 가계(家系)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남긴 작품 중에 자신의 아버지가 헌강왕의 命으로 ‘견일(肩逸)’이라는 이름을 하사(下賜)받았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삼국시대에 왕으로부터 이름을 하사받는 일은 나라에 큰 공을 세우거나 왕실에 특별한 업적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경주 사로국 6촌장이 신라개국 공신으로서 유리왕으로부터 성씨를 하사받았다는 것이 그 예이다.

이와 같이 그의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여 그 공로로 헌강왕으로부터 견일(肩逸)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그 공로가 원성왕을 위해 지은 발원문(發願文)이다. 발원문은 불교에서 수행자가 정진할 때 세운 서원(誓願)이나 시주(施主)의 소원을 적은 글이다.

최치원의 아버지 견일이 숭복사를 창건하는데 관여하고 원성왕의 극락왕생 천도를 위해 발원문까지 지은 것을 보면 상당한 글 솜씨를 지녔음은 물론, 신라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삼국유사'와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에 의하면 "숭복사는 신라 선덕왕 이전에 파진찬(波珍飡)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하여 '곡사(鵠寺)'라 하였는데, 원성왕(785년~798년)이 죽자 이곳에 능을 만들고 지금의 위치로 절을 옮겼다. 경문왕이 폐사(廢寺)나 다름없던 곡사(鵠寺)를 재건한 것은 꿈에 원성왕(元聖王)을 보았기 때문이다. 역사상 꿈과 관련해서 전해지는 설화들이 많다. 그 한 예가 이성계가 왕이 될 꿈해몽과 관련된 청허당 휴정의 「설봉산석왕사기」이다.

무학대사는 이 꿈해몽으로 이성계와 인연을 맺고 조선왕조 최초이자 마지막 왕사가 된다.

결국 꿈은 해석이 중요하다. 특히 정치사에서 꿈은 단순히 꿈이 아니라 정치행위기 때문이다. 경문왕이 곡사(鵠寺)를 재건하면서 원성왕을 끌어드린 것은 고도의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 경문왕은 곡사의 재건과 숭복사로 개명을 통해서 원성왕 직계와의 족벌의식을 제고(提高)하고자 했던 것이다. 왕이 족벌의식을 높인다는 것은 곧 왕권강화를 의도한 것이다. 그 이면에는 당시 귀족들의 힘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문왕의 이러한 사업에 최치원의 아버지 견일이 관여하고 있는 것은 그와 경문왕이 사적으로 밀접한 사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경문왕이 즉위하여 꿈에 원성왕을 보고 이 절을 증축한 뒤 능원(陵園)수호와 명복을 빌게 하였으며, 헌강왕 때 이 절의 이름을 ‘대숭복사’로 하였다고 하나 그 뒤의 역사는 알 수가 없다.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동쪽 토함산 자락, 숭복사지에는 최치원(857년~?)이 지은 비문이 1931년에 발견되었다.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 조각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절은 조선시대까지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비문을 받혔던 옛숭복사지의 귀부(龜趺)는 지금은 경주박물관 앞뜰에 놓여있다.

이로써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어주던 원찰이라는 것과 그곳에 있던 비문을 최치원이 지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경문왕과 최치원은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서로 신분은 다르지만 깊은 인연을 갖고 있었던 사이였다고 볼 수 있다.

경문왕은 최치원이 태어난 지 4년 되는 해에 왕위에 등극했고, 최치원이 당나라로 유학가기까지 왕위에 있었다. 경문왕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여귀설화(驪耳설화)'의 주인공이다. 경문왕이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귀가 자꾸 길어져 나귀 귀처럼 커져갔다. 왕비와 궁녀, 신하들까지도 이 사실을 몰랐지만, 오직 왕의 두건을 만드는 복두장(幞頭匠)만이 이 사실을 알았다. 그는 왕의 함구령(緘口令)을 어길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죽을 무렵에 도림사(道林寺) 대나무 숲에 들어가 "우리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했는데, 그 뒤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숲에서 "우리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들렸다. 경문왕은 이 소리가 싫어 곧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대신 산수유를 심었다. 그랬더니 그 뒤 바람이 불면 "우리 임금님의 귀는 길다네"라고 들렸다. 이 설화가 만들어진 것은 바깥세상 애환의 소리를 임금이 많이 듣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순수한 소망이 묘사된 설화가 아니었을까,

<삼국유사>에 따르면 경문왕은 헌안왕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 헌안왕이 경문왕을 사위로 맞이한 후 그를 후계자로 삼은 것은 그의 품성 때문이었다. 국선(國仙)이었던 경문왕 응렴(膺廉)은 스무살에 헌안왕의 부름으로 궁중 연회에 참석했다. 국선(國仙)은 당시 화랑도의 최고 지도자였다. 화랑도는 그 창설로부터 삼국통일이 완성된 문무왕대에 이르기까지 약 1세기 동안 융성하였으며, 삼국통일과정에 강한 무사도정신으로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통일 후 나라에 태평시대가 계속되면서 쇠퇴하여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9세기에 들어와 왕권이 약해지고 귀족세력이 강해지자 귀족들의 사병 집단으로 변질되어 가면서 화랑이란 말은 쓰지 않고 선랑(仙郞), 국선(國仙) 등으로 불렸다.

궁중연회서 헌안왕과 응렴이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다.

"낭(郎)이 국선으로 국토를 유력(遊歷)하며 어떤 일을 보았는가?"

"좋은 일 세 가지를 보았나이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낮은 사람들보다 겸손하게 사는 이가 첫째요, 큰 부지이면서 겸손하게 옷을 입는 것이 둘째요, 본디 귀하고 힘이 있으면서 그 위세를 쓰지 않는 이가 셋째이옵니다."

헌안왕은 응렴의 얘기에 감동해서 딸과 왕위까지 물려주었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경문왕은 즉위 후 대사면을 실시했다. 대사면의 정책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통치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시혜 정책이다. 대사면의 명분은 화합과 포용이지만,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초기 권력을 안정시키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경문왕의 또 다른 주용 정책은 국학(國學)의 진흥이다. 682년 (신문왕2)에 설치한 통일신라시대의 교육기관인 국학은 신라가 삼국통일 이후 국가 정치제도를 정비함에 따라 지배체제의 효율적인 운영의 필요에 의해 추진된 것이다.

 

경주 박물관 앞뜰에 있는 숭복사 터 귀부

http://www.hamyang.org/choi1.htm

가야산 신선이 된

최치원 선생 (3)

합천향토사연구회장

이 성 동

 

경문왕이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국학진흥에 힘쓴 이면에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 왕조 시대나 현대에 있어서도 자신의 권력을 펼칠 수 있는 수단이 인사권이다. 왕권의 힘은 바로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거나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인사권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제 30대 문무왕 때는 강력한 전제 왕권체제를 구축하여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이 태평시대를 구가하였으나 이후 귀족세력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제 35대 경덕왕 때에 이르러서는 귀족들의 조직적인 반발이 일어나 왕권이 급속도로 약화되기 시작한다.

제 36대 혜공왕 때에는 여섯 차례의 각종 반란과 친위 쿠데타 사건이 잇따르면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친왕파와 반왕파로 나뉘어 치열한 왕권다툼으로 신라는,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혼란기로 치닫게 된다.

경문왕의 왕권회복정책은 6두품 자제들을 많이 입학시켜 졸업과 동시에 곧장 관직에 임명함으로서 가능하면 자신의 수족들을 요소요소에 배치하면서 동시에 반발세력을 잠재우고 왕권을 강화하는 고육책이었다. 국학에는 6두품 자제들이 많이 입학했는데, 이들은 9년 동안 논어(論語), 효경(孝經)을 비롯하여 예기(禮記), 주역(周易), 사서(史書), 모시(毛詩),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선(文選) 등을 배웠다. 결코 이 과정은 상당한 재력은 물론 인내력과 학문에 대한 열정 없이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이 같은 과정은 정실인사를 배제하고 학문연찬(學問硏鑽)과 수신(修身)과정을 거친 자들에게 관직을 부여함으로써 귀족들의 반발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된 것이다.

경문왕의 아버지는 계명(啓明)이며, 어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할아버지는 43대 희강왕이며, 왕비는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헌안왕의 큰 딸인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이고, 헌안왕의 작은 딸도 후에 왕비로 삼았다. 아들은 황(晃 :정강왕), 정(晶 : 헌강왕) 윤(胤)이고 딸은 만(蔓: 진성여왕)이며, 동생으로는 위홍(魏弘)이 있었다. 경문왕은 할아버지가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헌안왕의 사위의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신의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서도 열심히 국사에 전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경문왕 때는 재위 중에 여러 차례 반란이 계속 발생했다. 경문왕 즉위 해인 861년에는 이찬 윤흥(允興)과 숙흥(叔興), 계흥(季興) 등이, 868년에는 이찬 김예(金銳), 김현(金鉉) 등이 874년에는 근종(近宗) 등이 반란을 꽤했다. 이처럼 경문왕은 재위 14년 동안 3차례나 반란이 있었다는 것은 여전히 경문왕의 왕위도 불안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경문왕의 불안했던 통치기간이 최치원으로 하여금 당나라 유학의 길을 선택하게 하는 동기가 된 것이다. 혼돈은 최치원과 같은 육두품 출신들에게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2) 최치원은 왜 당나라에 조기 유학의 길을 택했나?

 

최치원은 6두품의 출신으로서 골품제(骨品制)하에서도 국가 요직에 임명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당나라에 유학의 길을 택한 것은 나이 때문이었다. 최치원의 아버지 견일은 그의 아들이 국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입학연령이 되는 15세가 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수 없었다. 기다린다 해도 국학에의 입학을 또한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라처럼 골품제가 없는 당나라에 가서 높은 관직에 오르면 쉽게 신분상승이 되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한 믿음은 당시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고 당의 교육기관인 국자감에서 공부하여 당의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 때 신라에서 당나라에 유학한 학생들을 숙위학생(宿衛學生)이라고 하였고 이들에게 응시 기회를 준 빈공과(賓貢科)라는 과거제가 있었는데 이 시험에 합격하면 당나라의 관리가 되기도 하였다. 최치원(崔致遠) 최승우(崔承祐), 최언위(崔彦撝) 김운경등이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국내에서 활약했고, 불교계에서는 의상과 원측, 혜초 등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불교진흥에 큰 역할을 했다. 그 외에도 당나라 유학을 다녀 온 사람들이 신라 조정의 높은 직위에 올라 있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견일은 자신이 할 수 없었던 일을 아들을 통해 실현해보려는 강한 의지로 아들 최치원을 당나라에 유학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는 최치원을 당나라에 보내면서 "10년 안에 진사에 급제하지 않으면 내 아들이라 하지 말라, 나 역시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으리라"는 말에서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들 최치원을 당나라에 유학 보내고 난 후 아들이 당나라에서 벼슬하고 금의환향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계원필경>에서 간단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최치원은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불효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최치원의 형제로는 고국에 그의 형 현준(賢俊)이 있었고 종제(從弟)가 있었는데, 그의 형 현준(賢俊)은 해인사의 승려로 있었다. 종제로는 최서원(崔棲遠)과 최인연(崔仁渷)의 활동이 보인다.

 

2. 당나라에서의 활동

1) 당나라로 떠나다

 

최치원은 유학(儒學)적 소양(素養)을 쌓으며 성장했지만 신라의 골품제 하에서는 그의 역량을 소신껏 발휘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해서 입당(入唐)을 결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의 아버지 최견일이 아들을 당나라에 유학 보내기로 결정한 요인도 최치원이 가진 유학적 지식과 자식에 대한 신뢰감이었다. 최견일은 자식 뒷바라지를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자식에게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이다. 최치원은 아버지 최견일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12세에 배편으로 당(唐)나라에 건너갔다. 최치원이 탄 배가 중국 산동의 등주(登州)에 도착했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한반도와의 해상 교통로에 위치한 항구로서 신라인과 신라 선박의 출입이 잦았다. 발해만과 마주하고 있는 등주는 해상을 통해 온 신라 사람들이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가기 위해 처음으로 딛는 중국 땅이다. 여기서 수도 장안까지 가려면 교통수단이 복잡하고 여행 기간도 3개월 정도 소요된다. 최치원이 장안으로 가면서 운하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운하 근처는 물산이 집산하는 곳이고, 짐을 나르기도 편리하였기 때문이다. 최치원이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이 운하는 뒷날 자신의 상관으로 모셨던 고병(高騈 : 중국명 고변)이 다스렸던 관할이었기 때문에 최치원의 당나라 입당에 중요한 의미를 주는 교통로가 되었을지 모른다.

 

2) 최치원이 도착한 장안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지금은 서안(西安)으로 불리는 장안은 한나라 고조 5년 (기원전 202년)에 설치한 현(縣)이었다. 중국 7대 고도(古都) 중 하나인 장안은 서한(西漢), 신(新), 동한(東漢), 서진(西晉), 전조(前趙), 전진(前秦), 후한(後漢),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隨), 당(唐)의 수도였다. 중국 역대 왕조 중 가장 많은 왕조가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사실상 중국 고대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장안에 위치한 위수(渭水) 평원은 중국 고대문명의 젓줄인 셈이다.

장안을 관중(關中)이라 하는 이유는 동쪽으로는 함곡관(函谷關)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무관(武關), 남쪽으로는 산관(散關), 북쪽으로는 소관(蕭關)에 이르고 있어, 네 관문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관(關)이란 골짜기에 성벽을 쌓은 것이니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수(渭水)는 그 분지평야 한 가운데를 흐르는 황하(黃河)의 지류이다.

우리가 흔히 들어온 ‘장안의 화제’는 중국의 고도(古都)인 장안(長安)에서 일어난 큰 얘깃거리를 말한다. 그 만큼 장안은 중국은 물론 한국인에게도 오랜 세월동안 유명한 도시로 기억되고 있다. 최치원이 장안에 도착해서 이곳이 얼마나 위대한 도시인가를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원전 750년 전 “세계의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 했듯이 기원전 200년 전에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블랙홀처럼 모여들었던 곳이 장안이다. 장안에는 최치원처럼 신라에서 온 유학생뿐만 아니라 돌궐, 거란, 위구르 등 각 지역에서 각양 각생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들어와 살고 있었다. 이때 장안에서 탄생한 사상과 예술, 문학, 제도 등은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가야산 신선이 된

최치원 선생 (4)

합천향토사연구회장

이 성 동

 

당나라 장안에 도착한 최치원은 얼마간의 체류기간이 지난 다음, 타국에서 온 다른 유학생과 함께 국자감의 숙위학생이 되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최치원은 이곳에서

인백지기천지(人百之己千之), 즉 남이 백번하면 자기는 천번하는 노력으로 경(經), 사(史), 자(子), 집(集) 등을 두루 섭렵(涉獵)하였다. 經, 史, 子, 集은 중국 남북조 시대에 책을 분류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진 개념인데 경은 주로 사서오경인 '경서(經書), 사(史)는 '역사서'를 자(子)는 '자서(子書)'로 제자서(諸子書)'인데 춘추전국시대에 출현했던 제자백가의 주장을 담은 책으로 책의 이름에 자(子)가 붙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 예컨대『孟子』, 『老子(노자)』, 『한비자(韓非子』 등이 그것이다. 집(集)은 시(詩)나 부(賦), 사(史) 등의 문작작품을 엮은 '문집류'를 일컫는 개념이다.

『계원필경(桂園筆耕)』 의 서문에 의하면 이 시기에 그는 많은 시(詩)와 산문(散文)을 창작하여 뛰어난 시재(詩才)로, 재능있는 문필가로 널리 알려져 중국의 이름난 시인, 문필가들을 경탄시켰다.

그는 서경(西京)에서 스승을 만나 공부한지 6년 만인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시(主試)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 뒤 동도(東都:洛陽)에서는 시작(詩作)에 몰두했는데, 이때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雜詩賦)〉 30수 1권 등을 지었다. 치원이 빈공과에 합격한지 2년 만인 876년(헌강왕 2)에 강남도(江南道) 선주(宣州)의 율수현위(溧水縣尉)로 임명되었다.

최치원의 표현에 따르면 “현위는 그 직급은 낮으나 그 임무는 매우 중해서(其官雖卑 其務甚重) 죄수들을 살펴야 하고 피로한 백성을 위무하니(推詳滯獄 慰撫疲) 동료 공직자는 그 직언을 겁내고 지방수령들도 두려운 마음을 가진다(佐僚能憚 其直聲 宰尹亦懷 其畏色)

사리(事理)를 말하자면 실로 훌륭한 인재에게 맡겨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중요한 자리에 미성년인 만 19세의 외국인을 임명한 것은 당시 당나라로서는 이례적인 우대(최준옥, 사적고, 1982 보연각 265면)였다.

최치원 본인도 “본디 바닷가 출신으로 가문을 빛내게 될 줄 상상도 하지 못했거늘, 더욱이 면 곳 사람으로 한 고을 중책까지 맡았다.”고 회상했다. 이때 “급료가 많고(현위의 연봉은 당시 200~300석이었다고 함, -최완수 ‘신동아’ 2001년 9월호)

일은 한가로와 더욱 배움에 촌음(寸陰)을 헛되이 하지 않아 지은 글 모두 5권”(계원필경 서문에서 중산복궤집 내력 설명)이었다.

최치원은 귀국 후 이를 진성여왕에게 봉정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당나라에서 벼슬하면서도 기울어져가는 고국 신라를 구하고 부모님을 뵙고 싶은 애뜻한 심정을 아래와 같은 詩로 달래기도 하였다.

 

窓外三苦雨 창밖에는 밤이 깊도록 비가 내리고

燈前萬里心 등불 아래 마음은 고국을 달리네

秋風惟苦吟 가을 바람에 시를 읊네

世路少知音 세상에 내마음을 아는 이 없네

 

율수현은 당시 강남서도(江南西都) 선주(宣州) 관할이었다. 현재 강소성 강령부에 속한다.

삼국사기 이병도박사 역주(1983년판과 2000년판 모두)는 “율수현은 지금 강소성 율양현(溧陽縣)”이라고 설명했으나 착오이다. 율수현은 지금도 율수현 그대로 엄존하고 있다. 남경 남쪽 50km 지점에 율양(지금은 市로 되었음)이 있다. 현재 각종 저서와 제종(諸宗) 족보의 70% 이상이 율수(溧水)를 표수(漂水)로 잘못 적고 있다.

2000년 10월 16일 이 현(縣)의 박물관 경내에 선생의 동상이 세워졌다. 2001년 10월에는 경주최씨 후예들이 찾아가 이 동상을 참배했다.

 

3) 학문정진 위해 현위(縣尉 )사직(辭職)

 

최치원은 877년 겨울 현위직을 사임하고 입산수학(入山修學)에 들었다. 공식적인 사임 이유는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 : 관리 선발을 위해 문장 3편을 시험)에 응시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입산했으나 진심은 다음과 같다.

"나는 덩굴풀처럼 누구에게 붙어 사느니, 거미가 줄을 치듯 제힘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자 한다. 수 없이 생각해 봐도 학문하는 것만 못하다(不如學), 평생에 애써 노력한 것이 오히려 헛될까 두려워서(百年勤苦 唯恐失之) 벼슬길의 진흙탕에 다투어 뛰어들지 않고 다만 유교의도를 좇았다(未兢宦途 但遵儒道). 그러므로 처음 벼슬에서도 진토를 싫어하고(莁仕而懷超塵土) 거처할 데를 고르는데 산천을 그리워하니(卜居而貪憶林泉) 속세의 요로와 교통하는 데는 눈길을 준 일이 없고(人間之要路通津 眼無開處) 물외의 청산과 녹수에 돌아갈 때만 꿈꾸었다(物外之靑山綠水 夢有歸時)"(계원필경 재헌계)

 

4) 가난과 난리로 절박한 상황에

 

그러나 혈혈단신 외국청년으로서 공부에 장기간 전념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두 세 해가 지나자 "녹봉은 남은 것이 없고 글 읽을 양식이 모자랐으며"(제2장계) 설상가상으로 난리의 피 바람이 신변을 위협했다. 즉 885년에 반란을 일으킨 황소(黃巢)의 군대가 주변에 가까이에까지 밀어닥쳐 879년 6월 12일에는 율수의 주도(州都)인 선주(宣州)가 함락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생계가 아닌, 생사 자체가 걸린 절체절명의 급박한 상황이었다. "하늘이 높으니 물을 곳이 없고 날이 저무니 어디로 가야할까(天高莫問 日暮何歸)"(여격장서) "어디로 향해야 생을 안돈할 수 있을까(指何門而欲安生計)"(재현계)란 말은 바로 이런 급박함을 웅변해주고 있다.

이때의 심정은 다음 글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집은 멀고 길은 험하다. 한없는 근심이 밤세도록 속을 태우고(窮愁則終夜煎熬) 먼 고향 소식은 해를 지나도록 막혀있다. (遠信則經年阻絶)." (여객장서)

언 베개에 마음이 상하는데 내 짝은 등불에 비치는 외로운 그림자뿐이다(凍枕傷神 孤燈伴影) 멀리서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는 나그네의 마음 두근거리게 하여 편안한 잠 이룰 길 없으니, 천만 갈래의 울적함이 쌓인다. 더구나 집은 멀리 해 솟는 곳에 있고 길은 큰 하늘 못을 격해 있는 몸(家遙日域 路隔天池). 객사(客舍)에 들기가 원수보다 싫구나(投客舍而方甚死)" (재헌계)

전란 와중인 879년 이 해는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란 고사성어가 생긴 해이기도 하다. 이 말은 한 장수의 전공은 만 명의 군사가 싸움터에서 죽은 결과라는 뜻으로, 오직 공이 한 장수에게만 돌아가는 것을 개탄하는 말. 曺松의 <己亥歲>시에 나오는데 이 해가 바로 기해년이다.

 

875년에 발발. 879년 선주를 함락시킨 황소는 880년 황제를 참칭(僭稱 : 자기의 신분에 걸맞지 아니하는 칭호를)하고 881에는 수도인 장안까지 점거했으나 883년 장안을 뺏기고 884년에 피살되었다.

최치원에게는 설상가상으로 또 하나의 이변이 생겼으니 응시하고자 한 박학굉사과 시험이 이해부터 무기 연기되어 버린 것이다(松本明 1975.'鈴木선생고희기념 동양사논총' 409면). 아마 전란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험은 18년 뒤에야 부활되었다.

 

5) 고병(高騈)의 막료로 관직 다시 시작

  이어진다. http://blog.daum.net/6299842/7599852   제1부) 가기

 

3, 고운 최 치원 선생

                                                             문창후 고운 최치원 선생                       이성동 사단법인 합천향토사 연구회장 글

    

 

 

○ 姓名 : 한글 최 치원 한문 崔致遠

○ 本貫 : 경주 ○ 雅號 孤雲(혹은 海雲)

○ 生(출생년도) : 857년 ○ 卒(별세년도) : 미상

 

○ 學行(수학과정 또는 학맥)

 

최치원은 본래 신라의 왕경(지금의 경주)의 사량부(沙梁部) 또는 본피부(本彼部) 사람으로 후기 신라의 진보적 시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견일(肩逸)의 아들로 알려져 있고,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 출신이다. 특히, 최씨가문 가운데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최승로, 최충헌과 함께 3최(崔)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품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최치원은 이 중 가장 먼저 귀국해 당나라에서 쌓은 학문과 경륜을 조국 신라를 위해 펼쳐보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으나 두 사람은 입신양명에 발목을 잡는 골품제에 항거하여 최승우는 서남방면에서 일어난 후백제의 견훤의 진영에 편입했고, 최언위는 송악의 호족 왕건 휘하에 들어가 신라의 조정과 등을 지게 된다.

 

최치원은 857년 <(憲安王 1년), (文聖王 19년)> 왕경인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계에 대하여 <崔致遠 字 孤雲 或 海雲 王京沙梁部人也 史傳泯滅不知其世系>, 『삼국사기』권 46 열전6, 최치원 조,

致遠乃 本彼部人也 今黃龍寺南昧呑寺南有古墟 云是崔候古宅也 殆明矣

(『삼국유사』권1, 혁거세 왕조)

위와 같이 삼국사기에서는 “최치원의 자는 고운 혹은 해운이요, 왕경의 사량부 사람이다. 흔적이 없어져 그 세계를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서는 “치원은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황룡사(皇龍寺)와 매탄사(昧呑寺) 남쪽에 그의 집터가 남아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삼국사기』에는 사량부인으로, 『삼국유사』에는 본피부인으로 상이하게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그의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여 그 공로로 헌강왕으로부터 견일(肩逸)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그 공로가 원성왕을 위해 지은 발원문(發願文)이다. 발원문은 불교에서 수행자가 정진할 때 세운 서원(誓願)이나 시주(施主)의 소원을 적은 글이다.

최치원의 아버지 견일이 숭복사를 창건하는데 관여하고 원성왕의 극락왕생 천도를 위해 발원문까지 지은 것을 보면 상당한 글 솜씨를 지녔음은 물론, 신라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삼국유사'와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에 의하면 "숭복사는 신라 선덕왕 이전에 파진찬(波珍飡)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하여 '곡사(鵠寺)'라 하였는데, 원성왕(재위 785년~798년)이 죽자 이곳에 능을 만들고 지금의 위치로 절을 옮겼다. 또한 이곳에는 최치원(857년~?)이 지은 비문이 발견되었다.

그 뒤 경문왕이 즉위하여 꿈에 원성왕을 보고 이 절을 증축한 뒤 능원수호와 명복을 빌게 하였으며, 헌강왕 때 이 절의 이름을 ‘대숭복사’로 하였다고 하나 그 뒤의 역사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 조각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절은 조선시대까지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어주던 원찰이라는 것과 그곳에 있던 비문을 최치원이 지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최치원의 형제로 그의 형 현준(賢俊)이 있었고 종제(從弟)가 있었는데, 그의 형 현준(賢俊)은 해인사의 승려로 있었다. 종제로는 최서원(崔棲遠)과 최인연(崔仁渷)의 활동이 보인다. 이러한 가계를 가진 그는 6두품 출신이었다.

신라 골품제의 관등은 순수 왕족혈계인 성골(聖骨)과 왕족과 혼열계인 진골(眞骨)이 상위 관등을 차지하여 6두품은 신라 17관등 중 제 6관등 까지 승진이 제한되어 있었다. 이 점은 후에 그의 정치이념과 종교관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 동안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열심히 공부하도록 당부한 것을 보면 그는 신라 골품제에 대한 자신의 신분적 열세를 만회하는 방편으로 당나라 유학을 선택하였다고 보여진다.

 

 

○ 文行(문집목록, 주요 문적 등)

 

최치원은 12세에 당으로 건너가 18세에 급제하여 어려서 침착하고 명민했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열두살이 되자 배편으로 당에 들어가 유학하고자 하였다. 이에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고 가거든 힘써 하여라"라고 하였다. 868년(경문왕 8)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서경(西京:長安)에 체류한 지 6년 만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시(主試)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 뒤 동도(東都:洛陽)에서 시작(詩作)에 몰두했는데, 이때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雜詩賦)〉 30수 1권 등을 지었다. 876년(헌강왕 2) 강남도(江南道) 선주(宣州)의 표수현위(漂水縣尉)로 임명되었다. 당시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이 후에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5권으로 엮어졌다. 877년 현위를 사직하고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입산했으나 서량(書糧)이 떨어져 양양(襄陽) 이위(李蔚)의 도움을 받았고, 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高騈에게 도움을 청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했다. 879년 高騈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황소(黃巢) 토벌에 나설 때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아 표장(表狀)·서계(書啓) 등을 작성했다. 880년 高騈의 천거로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都統巡官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인 881년 黃巢의 반란이 일어나자 朝廷에서 준남절도사 高騈에게 諸道行營兵馬都統을 命하여 난리를 討伐케 했을 때 선생은 황소를 치는 다음과 같은 檄文을 지었으니 『 不惟天下之人皆思顯戮抑亦地中之鬼己議陰주(천하의 모든 사람이 모두 너를 죽여야 한다고 할 뿐만 아니라 저 땅 밑에 있는 귀신들 까지도 너를 죽이기로 議論했으리) 황소는 이 구절을 보고 저도 모르게 床에서 떨어졌다 한다.

이 글로써 선생의 이름은 천하에 떨쳤고 곧 이어 도통순관승무랑시어사내공봉(都統巡官乘務郞侍御史內供奉)으로 陞差되는 한편 26세 때에는 당나라 황제로부터 紫錦魚袋를 하사받았다. 이때 軍務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이 뒤에 〈계원필경 桂苑筆耕〉 20권으로 엮어졌다. 특히 881년에 지은 〈토황격소문(討黃檄巢文)〉은 명문으로 손꼽힌다. <『삼국사기』권 46열전 제6 최치원편>

28세에 본국에 돌아오려고 희종황제에게 장계를 올렸더니 황제는 당이 국서를 가져가는 사신의 자격을 부여해주었으며, 당나라 문사들과 석별의 시를 지었는데 그중 최치원이 어린 나이에 낯선 땅 중국에 유학하여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고운(顧雲)이라는 친구가 시를 지어 송별하였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傍邊一點鷄林碧山孕秀生奇特十二乘船渡海來文章感動中華國十八 橫行戰詞苑一箭射破金門策”

 

내 듣건대 바다 위에 금자라 셋이 있어

머리마다 높고 높은 산을 이었다

그 산위에는 구슬` 자개의 궁궐과 황금 전각이요

산 아래에는 천리 만리 가없는 넓은 바다로다

그 옆에 자리한 한 점 푸른 계림(鷄林)의 땅

자라산의 빼어난 정기 머금어 기이한 인재 태어났도돠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니

그의 문장 온 중국을 감동시켰다

열여덟에 과거장을 휩쓸고 다니더니

청 화살로 금문(金門) 깨고 급제하였다

 

위의 시 '금자라'는 금빛의 큰 자라를 말하는데, 신선이 살고 있는 봉래전(蓬萊殿)을 아래에서 떠받치고 있다 한다. 신선이 살고 있다는 동해의 삼신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32년조 주석 참조할 것)

 

885년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에 의해 시독겸한림학사수병부시랑지서서감(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에 임명되어 외교문서 등의 작성을 담당했다. 이듬해 당나라에서 지은 저술들을 정리하여 왕에게 헌상했으며, 〈대숭복사비명 大崇福寺碑銘〉·〈진감국사비명 眞鑑國師碑銘〉 등을 지었다. 이처럼 문장가로서 능력을 인정받기는 했으나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으로 당나라에서 배운 바를 자신의 뜻대로 펴볼 수가 없었다. 이에 외직을 청하여 대산(大山)·천령(天嶺)·부성(富城)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했다. 당시 신라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하대(下代)에 들어 중앙귀족들의 권력쟁탈과 함께 집권적인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지방세력의 반발과 자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889년(진성왕 3) 재정이 궁핍하여 주군(州郡)에 조세를 독촉한 것이 농민의 봉기로 이어지면서 신라사회는 전면적인 붕괴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891년 양길(梁吉)과 궁예(弓裔)가 동해안의 군현을 공략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다음해에는 견훤(甄萱)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최치원은 부성군 태수로 재직중이던 893년 당나라에 보내는 하정사(賀正使)로 임명되었으나 흉년이 들고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여 가지 못했다. 그 뒤 다시 입조사(入朝使)가 되어 당나라에 다녀왔다. 894년 2월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 조를 올렸다. 그가 올린 시무책의 내용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집권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사회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성왕은 이를 가납(嘉納)하고 그에게 아찬의 관등을 내렸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자체적인 체제정비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이 시무책은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897년 진성여왕의 양위(讓位)로 효공왕이 즉위했는데, 이때 진성여왕의 〈양위표 讓位表〉와 효공왕의 〈사사위표 謝嗣位表〉를 찬술하기도 했다.

그뒤 당나라에 있을 때나 신라에 돌아와서나 모두 난세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는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 바다를 소요자방(逍遙自放)하며 지냈다. 그가 유람했던 곳으로는 경주 남산(南山), 강주(剛州) 빙산(氷山), 합주(陜州) 청량사(淸寺),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 별서(別墅) 등이 있다. 또 함양과 옥구, 부산의 해운대 등에는 그와 관련된 전승이 남아 있다. 만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모형(母兄)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지냈다. 904년(효공왕 8) 무렵 해인사 화엄원(華嚴院)에서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을 지었으며,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지었고 그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흥기할 때 비상한 인물이 반드시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을 알고 "계림(鷄林)은 황엽(黃葉)이요 곡령(鵠嶺)은 청송(靑松)"이라는 글을 보내 문안했다고 한다. 이는 후대의 가작(假作)인 것으로 보이나 신라말에 왕건을 지지한 희랑(希朗)과 교분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때 왕건을 지지한 후광으로 희랑대사는 그의 후원을 받아 고려초 해인사를 크게 중창한 기록이 있다.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불교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비록 왕명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사(禪師)들의 비문을 찬술하기도 했다. 특히 〈봉암사지증대사비문 鳳巖寺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 선종사(禪宗史)를 3시기로 나누어 이해하고 있다. 선종뿐만 아니라 교종인 화엄종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화엄종의 본산인 해인사 승려들과 교류하고 만년에는 그곳에 은거한 사실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도교에도 일정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는데, 〈삼국사기〉에 인용된 〈난랑비서 鸞郞碑序〉에는 유·불·선에 대한 강령적인 이해가 나타나고 있다.

 

한편 문학 방면에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았다. 그의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으며, 시문은 평이근아(平易近雅)했다. 당나라에 있을 때 고운(顧雲)·나은(羅隱) 등의 문인과 교류했으며, 문명을 널리 떨쳐 〈신당서 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사륙집 四六集〉·〈계원필경〉이 소개되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 열전에 그가 입전(立傳)되지 않은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했다.

『신당서』예문지(藝文志)에는 "최치원의『사륙집(四六集』1권과『계원필경』20권이 있다"고 하고 주를 붙여 이르기를 "최치원은 고려 사람으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해 高騈의 종사관이 되었다"라고 했으니, 그의 이름이 중국에 알려진 것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또 그의 문집 30권이 세상에 유통되고 있다.

최치원은 많은 불교 관련 글을 남겼거니와, 그 가운데 『쌍계사진감선사탑비(雙溪寺眞鑑禪師塔碑)』, 『성주사낭해화상탑비(聖住寺朗慧和尙塔碑』, 『봉암사지증대사탑비(鳳岩寺智證大師塔碑)』,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등 이른바 '四山碑銘과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이 저명하다.

빈공과(賓貢科)는 당나라 과거제의 한 과(科)로서, 외국인을 상대로 한 것이다. 다시 신라인들이 많이 응시하여 합격했으며, 한때 그 석차를 둘러싸고 발해와 갈등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 밖의 저술로는 문집 30권,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부석존자전 浮石尊者傳〉·〈석순응전 釋順應傳〉·〈석이정전 釋利貞傳〉과 조선시대에 들어와 진감국사·낭혜화상(朗慧和尙)·지증대사의 비명과 〈대숭복사비명〉을 묶은 〈사산비명 四山碑銘〉이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계원필경〉〈사산비명〉·〈법장화상전〉이 있으며, 〈동문선〉에 실린 시문 몇 편과 후대의 사적기(寺跡記) 등에 그가 지은 글의 편린이 전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1020년(현종 11)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성묘(聖廟:孔子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1023년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태인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제향되었다.

현종이 왕위에 있었을 때, 치원이 은밀히 태조의 창업을 도왔으니 그 공로를 잊을 수 없다 하여 교서를 내려 내사령(內史令)을 추증하고, 14년 태평 2년 임술(1022) 5월에 와서 문창후(文昌候)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최치원은 후일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발만 남긴 채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서 후인들이 ‘유선(儒仙)’으로 불린다.

경상도와 전북 일대에는 지금도 최치원의 행적이 전해진다. 옥구군에 있는 바위에는 최치원이 먹을 갈던 곳과 무릎자국이 남아있다고 하며, 해운대에서는 도술로 바위에 자신의 호를 새겼다고 한다. 유적뿐 아니라 출생설화를 비롯하여 전설도 많이 전해진다.

해운대 유적 최치원의 필적

 

 

○ 기타 참고사항

 

 최치원은 스스로 자신을 ‘유자(儒者)’로 자처하였다고는 하나 그의 사상은 유불선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그는 중국의 儒, 佛, 仙은 한민족의 본래 신교(神敎)가 다시 역수입된 것으로 보았다. 특히 그가 쓴 <난랑비 서문>은 한민족에 면면히 내려왔던 신교의 정신을 확연히 드러내주는데 여기에서 최치원은 신교가 유·불·선의 뿌리임을 밝히고 있다.

 

 國有玄妙之道하니 曰風流라.

 국유현묘지도 / 왈풍류

 設敎之源이 備詳仙史하니 實內包含三敎하야 接化群生

 설교지원 / 비상선사 / 실내포함삼교 / 접화군생

 且如入則孝於家하고 出則忠於國은 魯司寇之旨也오

 차여입즉효어가 / 출즉충어국 / 노사구지지야

 處無爲之事하고 行不言之敎는 周柱史之宗也오

 처무위지사 / 행불언지교 / 주주사지종야

 諸惡莫作하고 諸善奉行은 竺乾太子之化也라.

 제악막작 / 제선봉행 / 축건태자지화야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 난랑비 서문」)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가르침을 베푸는 근원은 선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거니와, 실로 삼교를 포함하여 접하는 모든 생명을 감화시키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보면, 이는 곧 집으로 들어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으로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가 가르쳤던 뜻이요, 매사에 무위로 대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함은 노자의 가르침이며, 악한 일을 하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는 것은 석가모니의 교화니라.”

 

 마지막 화랑, 최치원

 최치원은 문인으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仙人으로서의 구도행 역시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말년에는 시해법의 일종인 ‘가야도인법’을 저술하여 전하였다고 한다.

 

 신라 중기 화랑인 ‘물계자’나 사랑(四郞)의 전설에서 보여지듯, 화랑의 정신은 멋과 풍류였다.1)

 

 『청학집靑鶴集』을 쓴 조여적은 조선 단학의 계보가 광성자(廣成子)-명유(明由)-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문박-영랑-보덕-도선-최치원-위한조-편운자(片運子)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2)

 반면 『해동전도록』에서는 태상노군에서 종리권 여동빈으로 이어지는 중국 도교가 종리권에서 당나라 유학생이었던 최승우를 거쳐 최치원을 통해 우리나라로 흘러 들어와 김시습 등으로 이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최치원은 비록 신라를 다시 부흥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자신이 진정한 풍류객의 길을 걸었고, 뛰어난 필치로 화랑의 정신을 후세에 전했다는 점에서 신라의 마지막 화랑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최치원이 말한 바대로 유불선의 뿌리이며, 우리 민족 문화의 뿌리인 ‘신교’는 수천년 역사의 굴절 속에서도 꿋꿋이 전해져 후대에 최수운의 ‘동학’으로 이어졌으며, 이제 가을의 원시반본(原始返本)의 자연섭리에 의해 상제님의 천지공사 속에서 완성되었다. 이제 후천개벽의 시운을 맞아 그 얼과 혼을 받은 증산도의 초립동이들이 다시 세계 무대의 주인공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밤이 깊어 가매 더욱 흥을 내어 북을 치시며

 시 한 수를 읊어 주시니 이러하니라.

 

 時節花明三月雨요 風流酒洗百年塵이라

 시절화명삼월우 풍류주세백년진

 철 꽃은 내 도덕의 삼월 비에 밝게 피고

 온 세상의 백년 티끌 내 무극대도의 풍류주로

 씻어 내니 우리의 득의지추(得意之秋) 아닐런가.

 

충남 보령시 남포면 월전리 보리섬(麥島) 서쪽에 높이 3m, 너비 1.8m

8개가 병풍처럼 서 있는 곳에 최치원의 한시가 음각되어 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 14호로 지정되었다.

 

○ 기타 참고사항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 145호로 지정되었다.

 

1) < 화랑세기 >에는 “화랑이란 선의 무리(仙徒)이다. … 선도들은 다만 신(神)을 받드는 일을 주로 하여 국공(國公)들이 그들을 따라 나란히 다녔고, 후일에 선도들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면려(勉勵)하였으므로,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이로부터 선발되었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여기에서 나왔으니 화랑의 역사는 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라고 전한다.

 《계림유사(鷄林類事)》를 보면, “단(檀)은 배달(倍達)이고, 국(國)은 나라(那羅)이며, 군(君)은 임검(任儉)이다.(檀倍達 國那羅 君任儉)”라는 기록이 있다. 풍월도(風月道)의 ‘풍(風)’이 옛날에는 ‘발함 풍’이라 하였는데, ‘바람’, ‘배람’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월(月)’은 ‘달 월’이다. 이것을 이두식으로 읽게 되면 ‘발달길’또는 ‘배달(倍達)길’이 된다. 또한 풍류도라 할 때 ‘류(流)’ 자는 ‘흐를 류’ 또는 ‘달아날 류’라 한다. 그렇다면 풍류도 역시 ‘배달길’이 된다고 하겠다. 신라에서는 맨 처음 풍월주(風月主)라 하였다가 뒷날 화랑(花娘, 花郞)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2) 광성자와 명유는 중국정사에서 상고의 신선으로 모셔지는 신비의 인물이다. 그리고 환인은 『환단고기』에서 ‘승유지기(乘遊至氣) 묘계자연(妙契自然)’ 하였다고 전하며, 환웅 역시 주문을 읽고 단을 복용하여 신령한 경지에 다다랐다고 한다. 단군임검 또한 삼국사기에 선인(仙人)왕검이라 칭하고 있다.

 

=== 선(仙)의 맥을 이은 인물들===============

 신채호 선생은 『규원사화』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민족의 선(仙)이 한민족 고유의 것이며 이것이 일제치하 독립운동으로까지 이어지는 ‘낭가사상’이라고 보았다.

 

 이런 선인들은 한민족 건국과정에서 주체로 참여하였으며 국가의 위란 시마다 구국의 투혼을 보여왔다. 배달국의 제세핵랑군에서 시작된 선인의 맥은 고구려의 조의선인, 백제의 무사도, 신라의 화랑, 고려의 국자랑으로 이어지며,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끝으로 은둔의 길을 걷게 된다.

 

 을지문덕, 연개소문, 김유신, 우륵, 의상대사, 원효대사, 강감찬, 김시습, 정북창, 이지함, 곽재우, 권극중 등 낯익은 이름들이 선인의 맥을 이은 인물들이다. 이외에도 무명으로 시해선(尸解仙)이나 천선(天仙)이 된 이들은 수없이 많다. 이들은 세상과 담을 쌓고 풍류로써 자연과 벗하다가도 국가의 위난 시나 대변국기에는 어김없이 세상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함을 꺼리지 않았다.

최치원 역시도 「낭혜화상비문」에서 장생을 구하여 학을 타고 날아다니며 고고함을 구하는 중국 선도를 깎아 내리며, 오히려 중생을 구제하여 세상을 위해 몸을 적시는 진정한 선의 길을 제시하였다.

그에 대한 문헌의 기록은 904년을 끝으로 보이지 않는데 세간에서는 그가 신선이 되어 등천하였다고 전한다.

 

다음은 그가 남기고 떠난 시문 중 해인사 홍류동의 최치원 선생 재실 기둥에 새겨진 <가야산 독서당에서 짓다>라는 시가 있어서 여기에 소개한다.

 

 題伽倻山讀書堂        

崔致遠

 

狂 噴 疊 石 吼 重 巒  광분첩석후중만

겹겹이 바위틈을 미친 듯이 내뿜어 뭇 봉우리를 울리니

 

人 語 難 分 咫 尺 間   인어난분지척간

사람의 말소리를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常 恐 是 非 聲 到 耳   상공시비성도이

늘 옳고 그름을 다투는 소리가 귀에 이를까 두려워

 

故 敎 流 水 盡 籠 山   고교류수진롱산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다 둘러놓았다네.

  세상의 시비소리 물소리 속에 묻히다

 

이 詩는 그가 은거하던 ‘가야산독서당’ 기둥에 부친 작품으로 紅流洞 계곡바위에 새겨져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을 미친 듯이 쏟아져 내리는 산골 물이 기암괴석의 봉우리들과 부딪치며 내지르는 굉음으로 온 산이 울리고 있다.

 

그래서 포말을 그리며 세차게 흐르는 홍류동의 물소리 때문에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말소리조차 알아들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다투는 소리가 물소리 속에 파묻혀 버렸지만 또 다시 是非聲이 들려올까 두렵다고 했다. 그래서 마지막 구절에서 홍류동 계곡 물을 돌려 자신이 사는 곳과 산을 두르게 했다고 한 것이다.

 

대장부란 무릇 뜻을 얻으면 백성들과 함께 하여 경륜을 펴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한다고 하는데, 큰 재주를 가지고도 세상이 용납하지 않으니 물러날 수밖에 없다 하겠다. 광분하는 저 물소리 이면에는 선각자의 분노성이 들려오는 것 같지 않은가?

 

명예도 탐욕도 훨훨 벗어 청산에 씻고, 시끄러운 세상 떠나 홍류동에 외로이 사시더니, 어느 날 바람처럼 어디로 사라졌

 

는가!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지팡이도 또한 살아 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하라”는 유언만 남기고 지금의 홍제암 뒤 진대

 

밭골로 유유히 사라져 갔으니, 지금껏 가야산 산신으로 살고 있는 것인가. 그가 심은 천년 전나무는 오늘도 그쪽을 바라

 

보며 한가로이 그 주인을 기다리고 있건만```

 

一入靑山更不還

崔致遠의 遺言 詩

僧乎莫道靑山好  스님아! 푸른 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라

山好何事更出山  산이 좋은데 무슨 일로 다시 산을 나오는가?

試看他日吾踪跡  시험 삼아 이다음에 나의 종적을 보아라.

一入靑山更不還  한 번 푸른 산에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참고자료>

 『삼국사기』권46(열전 제6) 최치원

 「최치원의 삼교융화사상에 관한 연구」, 하갑룡, 부산대학교

 「고운 최치원 시집1」, 김진영 외역, 민속원, 1997

고운 선조 바로보기

참고 인물사전 최치원

고운선생(孤雲先生) 천령태수편(天嶺太守篇

인산과 고운

삼국사기 권제46(열전 제6) 최치원

삼국사기 최치원전 원역

최치원과 쌍녀분

금관(金冠)과 지증대사비

지증대사적조탑비명

 1대 3최-후백제 견훤이 꽃피운 禪宗예술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君護國城八角燈樓記)

백연서원-최고운묘기

 

중국 양주시 唐城박물관에 있는 최치원 기념관의 고운 선생 흉상 옆에서 김윤수(2005.09.11.일)

거창을 찾았던 명현들

최 치원(崔 致遠:857∼?)

학자이며 경주 최씨의 시조로 호는 고운(孤雲)이다. 신라 경문왕 9년(867) 당나라에 유학 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879년 황건의 난에 종군하여 당시의 표장 (表狀) 서계격문(書啓檄文)등은 모두 그의 손으로 지어 졌으며 특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 文)은 명문으로 알려졌다. 885년에 귀국하여 내직에 있었으나 국정의 문란함을 통탄하여 외직을 자청해서 천령(현 함양) 등의 태수를 지냈다. 진성여왕 7년(893) 시무십조(時務十條) 를 상소하여 시행케하고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후 난세를 비관하여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글씨도 잘 썼으며 그의 난랑비(鸞郞碑) 서문은 신라시대의 화랑도를 해설해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항하는 한편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의 태인의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영평의 고운영당 등에 제향되었고 숭복사비, 진감국사비 등에 그의 글씨가 남아 있고 계월필경 등의 저서가 있다.

그가 천령 태수로 함양에 오가던 때인지 아니면 말년의 유랑 생활에서 가야산에 은둔할 때인지는 모르나 가북의 몽석골에 온 적이 있었다. 지금 가북면 몽석리 내촌 가북저수지 위 수도산록(修道山麓)에 고운정(孤雲亭)이 있으니 일명 송풍대(送風台)라고도 한다. 1887년에 이재완이 문창후 수식송 유지비문을 찬하고 1896년 11월에 비를 세웠고 본래 그 곳에 최 치원이 손수 심었다는 거목이 있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

명환 신라

최치원

致遠 寄海印僧希朗 詩下題 防虜太監 天嶺郡太守 알粲 崔致遠

 

 

 

西厓先生文集卷之十八
 
題東國名臣言行錄 


我國文學之士。自新羅以上。邈矣無可徵。羅末崔文052_357a北學於中國。東還始爲文學之祖。其後相繼迭興者亦不爲少。大抵皆以詞章名世耳。麗季益齋,牧隱遊中國。得聞程朱性理之說。自是東方。始知詞章之外。有儒者之學。於是圃隱首先興起。爲絶學之倡。同時如陽村,陶隱。雖未免於詞華。而亦以道德性命。訓誨後進。故吉注書學於陽村。金司藝學於注書。司藝之子曰佔畢齋。寒暄金公,一蠹鄭公皆出於佔畢齋。趙靜菴又寒暄之徒。其間雖有靑於藍而寒於水。考其淵源所自。則皆有所授受而不可誣也。然則今此名臣中當抽出此一脈以類編之。其他柳觀,黃喜,鄭052_357b光弼諸公。當以相業列於名臣之流。三足以下。又以隱逸附焉。則庶乎各從其類而不紊矣。俟尙論君子求正焉。

 

月汀先生別集卷之四
 漫錄

崔致遠雙溪寺碑及海東名迹秋風唯苦吟字體橫豎之畫瘦勁與算子相似。直致而少姿態。成石璘演福寺碑及都評議使司廳記字體如成字等戈畫中字等直下之畫甚長。絶不與他人字樣相類。每竊怪之。亂後赴京。購得諸法帖。其中歐陽詢所書醴泉觀銘皇甫府君碑字畫瘦勁如算子褚遂良聖敎序戈畫中字等畫甚長。始知崔學歐陽體而成倣褚體也。雖在我東。至於名筆則不敢自作體而動效古人。於047_389c此可見。至於我朝以來。倣之體者。下缺
楊僉知應聘能草書。妙得懷素一作長沙法。又善大字。含飛動意。在嶺東時。謂金剛山絶頂毗盧峯。乃飛來峯。非毗盧也。朿兩苕帚弊者。以兩手執而寫飛字。字畫極大。有活動意。又寫來峯兩字。屢作皆不如意曰。衰謝不可更寫。珍愛其飛字。裝䌙作簇。掛之江陵居舍。坐臥賞玩。其後應聘得罪配延安。一日忽大風雨。風掣其簇。連軸騰空而飛。向東海而去。杳不可尋。竟失之。其後應聘凶訃至江陵。其簇飛去之日。卽應聘觀化之日也。抑靳其至寶。持去天上耶。亦異矣哉。

 

 

武陵雜稿卷之七 原集
 雜著
遊淸涼山錄 


嘉靖甲辰四月初九日丁丑。

有老宿指點煙霧中云。彼金生窟。彼致遠臺。此後有元曉寺。西有義相峯。昔者。四聖人居是山。結爲道友。往027_036d還游息於斯云。余應之曰。元曉。新羅中葉僧。金生,義相。亦皆羅產而異世。最後者崔孤雲。其生在羅末。安得相從。爾無以瞽說罔我。自此釋徒不得發誕厖。諺云。昔有寺僧。欲創是寺。死爲三角牛。輸入供財。其勤殊苦。一日。死于寺下。遂聚石爲墓。試問此。欲針其誣惑。有小衲開口將答。老衲目止之。遂合喙不敢吐。徐曰。有一琴姓生員。命畫三角於寺門。使來者皆知其結緣也。余謂崔孤雲入大唐。檄黃巢。名動天下。遂爲東方文章之祖。至於配食文廟。然其實吾儒之罪人也。昔王夷甫善淸談。誤天下蒼生。使神州陸沈於五027_037a胡。永爲中原百代罪人。若孤雲則反有甚焉。彼其負大名東歸。雖不爲朝廷所容。東人望之若神仙中人其平生所歷一水一石。至今猶稱道不衰。誠使孤雲粗識吾儒之門戶。而昌言排之。則五百年高麗。未必陸沈於佛。若是之酷也。其稱順應曰大德。利貞曰中庸。嗚呼。是二妖僧者。果能爲大德,中庸。孰不爲大德,中庸乎。其助桀爲虐。得罪萬世名敎。可勝言哉。若琴生者。亦孤雲之罪人也。

문창후 고운 최치원 선생 유물 전시관 과 유물..[2] 

[출처] 문창후 고운 최치원 선생 유물 전시관 과 유물..[2]|작성자 천기

양주 당성유지(당나라성 유적지)내 연화각에 전시된 고운 최치원선생의 유물덜 일부만 올립니다. 

문창후 고운 최치원 선생 유물 전시관 과 유물..


양주 당성유지(당나라성 유적지)내 연화각에 전시된 고운 최치원선생의 유물덜 일부만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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