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의 농산정을 찾아서
농산정은 신라 말기의 거유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은둔하여 수도하시던 곳
이라고 합니다 원 정자의 창건시기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정자는
후손과 유림에 의하여 중건된 것으로 1990년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정자 건너편에는 치원대 또는 제시석
이라고 하는 석벽이 있는데 고운 최치원 선생의 칠언절구
둔세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정자의 이름도 그 시의
한 귀절을 따서 농산정 이라고 합니다
고운선생은 서기 857년인 문성왕 19년에 사량부에서 탄생하셨고
성은 최요 이름은 치원, 자는 고운, 호는 해운이라고 합니다
고운선생이 탄생하실 때만 해도 신라에는 문자가 없었고
글이 없으니 기록도 할 수 없는 시대였다고 합니다
고운선생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당나라의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우리나라의 최초 문집인 계원필경집을 남겼는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보다도 수백년이 앞선
기록문자가 된다고 합니다
농산정 앞에 세워져 있는 고운최선생둔세지
(孤雲崔先生遯世地)라는 표지석이
개울가에 세워져 있습니다
고운 선생은 중국에서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 이라는
글을 써서 황소에게 보낸 격문이 있습니다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땅 속의
귀신 까지도 이미 너를 죽이려고 의논하였을 것이다 라는
귀절에서 포악무지했던 황소도 놀라 혼비 백산하여
의자에 앉았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최치원의 제시석에 대해 김종직은 제시석을 두고 부서진 돌
사이에 먹물흔적 남았네 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제시석에서 필묵흔적을 느낄 수 있었던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강 정구라는 묵객은 가야산을 유람한 뒤에
유가야산록 이라는 책에서
폭포 곁 돌 표면에 최고운 시 한수를 새긴 것이 있는데
매년 장마의 미친듯한 물살에 씻겨 마멸되어
지금은 다시 알아 볼 수 없다
한 참 손으로 비벼서 만져본 후에 어슴푸레 겨우
한 두 글자를 얻었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제시석은 길에서 조금 높은 곳에 있고
또 그 필 획이 매우 뚜렸하여 김 종직과 한강이
말 하던 제시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시석의 좌측 하단에 우암서(尤菴書)라는 글자를 보면
우암 송시열의 글씨는 아닌 것 같다고 하여
후대에 이 제시석의 글씨가 우암의 것임을 표시하기 위하여
나중에 새겨 넣은 것으로 말하고 있는 학설도 있습니다
동강(東江) 김영한의 급우제집(及禹齊集)에는
가야산 해인사 라는 시의 주에 ......
암벽에 우암이 쓴 최고운의 절구가 있다 고 하여
이를 우암의 글씨로 단언하고 있습니다
농산정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72호로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 입구에 있습니다
회장님! 좋은 답사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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