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운 최 치원 선생

                                                             문창후 고운 최치원 선생                       이성동 사단법인 합천향토사 연구회장 글

    

 

 

○ 姓名 : 한글 최 치원 한문 崔致遠

○ 本貫 : 경주 ○ 雅號 孤雲(혹은 海雲)

○ 生(출생년도) : 857년 ○ 卒(별세년도) : 미상

 

○ 學行(수학과정 또는 학맥)

 

최치원은 본래 신라의 왕경(지금의 경주)의 사량부(沙梁部) 또는 본피부(本彼部) 사람으로 후기 신라의 진보적 시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견일(肩逸)의 아들로 알려져 있고,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 출신이다. 특히, 최씨가문 가운데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최승로, 최충헌과 함께 3최(崔)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품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최치원은 이 중 가장 먼저 귀국해 당나라에서 쌓은 학문과 경륜을 조국 신라를 위해 펼쳐보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으나 두 사람은 입신양명에 발목을 잡는 골품제에 항거하여 최승우는 서남방면에서 일어난 후백제의 견훤의 진영에 편입했고, 최언위는 송악의 호족 왕건 휘하에 들어가 신라의 조정과 등을 지게 된다.

 

최치원은 857년 <(憲安王 1년), (文聖王 19년)> 왕경인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계에 대하여 <崔致遠 字 孤雲 或 海雲 王京沙梁部人也 史傳泯滅不知其世系>, 『삼국사기』권 46 열전6, 최치원 조,

致遠乃 本彼部人也 今黃龍寺南昧呑寺南有古墟 云是崔候古宅也 殆明矣

(『삼국유사』권1, 혁거세 왕조)

위와 같이 삼국사기에서는 “최치원의 자는 고운 혹은 해운이요, 왕경의 사량부 사람이다. 흔적이 없어져 그 세계를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서는 “치원은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황룡사(皇龍寺)와 매탄사(昧呑寺) 남쪽에 그의 집터가 남아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삼국사기』에는 사량부인으로, 『삼국유사』에는 본피부인으로 상이하게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그의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여 그 공로로 헌강왕으로부터 견일(肩逸)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그 공로가 원성왕을 위해 지은 발원문(發願文)이다. 발원문은 불교에서 수행자가 정진할 때 세운 서원(誓願)이나 시주(施主)의 소원을 적은 글이다.

최치원의 아버지 견일이 숭복사를 창건하는데 관여하고 원성왕의 극락왕생 천도를 위해 발원문까지 지은 것을 보면 상당한 글 솜씨를 지녔음은 물론, 신라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삼국유사'와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에 의하면 "숭복사는 신라 선덕왕 이전에 파진찬(波珍飡)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하여 '곡사(鵠寺)'라 하였는데, 원성왕(재위 785년~798년)이 죽자 이곳에 능을 만들고 지금의 위치로 절을 옮겼다. 또한 이곳에는 최치원(857년~?)이 지은 비문이 발견되었다.

그 뒤 경문왕이 즉위하여 꿈에 원성왕을 보고 이 절을 증축한 뒤 능원수호와 명복을 빌게 하였으며, 헌강왕 때 이 절의 이름을 ‘대숭복사’로 하였다고 하나 그 뒤의 역사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 조각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절은 조선시대까지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어주던 원찰이라는 것과 그곳에 있던 비문을 최치원이 지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최치원의 형제로 그의 형 현준(賢俊)이 있었고 종제(從弟)가 있었는데, 그의 형 현준(賢俊)은 해인사의 승려로 있었다. 종제로는 최서원(崔棲遠)과 최인연(崔仁渷)의 활동이 보인다. 이러한 가계를 가진 그는 6두품 출신이었다.

신라 골품제의 관등은 순수 왕족혈계인 성골(聖骨)과 왕족과 혼열계인 진골(眞骨)이 상위 관등을 차지하여 6두품은 신라 17관등 중 제 6관등 까지 승진이 제한되어 있었다. 이 점은 후에 그의 정치이념과 종교관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 동안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열심히 공부하도록 당부한 것을 보면 그는 신라 골품제에 대한 자신의 신분적 열세를 만회하는 방편으로 당나라 유학을 선택하였다고 보여진다.

 

 

○ 文行(문집목록, 주요 문적 등)

 

최치원은 12세에 당으로 건너가 18세에 급제하여 어려서 침착하고 명민했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열두살이 되자 배편으로 당에 들어가 유학하고자 하였다. 이에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고 가거든 힘써 하여라"라고 하였다. 868년(경문왕 8)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서경(西京:長安)에 체류한 지 6년 만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시(主試)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 뒤 동도(東都:洛陽)에서 시작(詩作)에 몰두했는데, 이때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雜詩賦)〉 30수 1권 등을 지었다. 876년(헌강왕 2) 강남도(江南道) 선주(宣州)의 표수현위(漂水縣尉)로 임명되었다. 당시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이 후에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5권으로 엮어졌다. 877년 현위를 사직하고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입산했으나 서량(書糧)이 떨어져 양양(襄陽) 이위(李蔚)의 도움을 받았고, 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高騈에게 도움을 청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했다. 879년 高騈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황소(黃巢) 토벌에 나설 때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아 표장(表狀)·서계(書啓) 등을 작성했다. 880년 高騈의 천거로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都統巡官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인 881년 黃巢의 반란이 일어나자 朝廷에서 준남절도사 高騈에게 諸道行營兵馬都統을 命하여 난리를 討伐케 했을 때 선생은 황소를 치는 다음과 같은 檄文을 지었으니 『 不惟天下之人皆思顯戮抑亦地中之鬼己議陰주(천하의 모든 사람이 모두 너를 죽여야 한다고 할 뿐만 아니라 저 땅 밑에 있는 귀신들 까지도 너를 죽이기로 議論했으리) 황소는 이 구절을 보고 저도 모르게 床에서 떨어졌다 한다.

이 글로써 선생의 이름은 천하에 떨쳤고 곧 이어 도통순관승무랑시어사내공봉(都統巡官乘務郞侍御史內供奉)으로 陞差되는 한편 26세 때에는 당나라 황제로부터 紫錦魚袋를 하사받았다. 이때 軍務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이 뒤에 〈계원필경 桂苑筆耕〉 20권으로 엮어졌다. 특히 881년에 지은 〈토황격소문(討黃檄巢文)〉은 명문으로 손꼽힌다. <『삼국사기』권 46열전 제6 최치원편>

28세에 본국에 돌아오려고 희종황제에게 장계를 올렸더니 황제는 당이 국서를 가져가는 사신의 자격을 부여해주었으며, 당나라 문사들과 석별의 시를 지었는데 그중 최치원이 어린 나이에 낯선 땅 중국에 유학하여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고운(顧雲)이라는 친구가 시를 지어 송별하였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傍邊一點鷄林碧山孕秀生奇特十二乘船渡海來文章感動中華國十八 橫行戰詞苑一箭射破金門策”

 

내 듣건대 바다 위에 금자라 셋이 있어

머리마다 높고 높은 산을 이었다

그 산위에는 구슬` 자개의 궁궐과 황금 전각이요

산 아래에는 천리 만리 가없는 넓은 바다로다

그 옆에 자리한 한 점 푸른 계림(鷄林)의 땅

자라산의 빼어난 정기 머금어 기이한 인재 태어났도돠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니

그의 문장 온 중국을 감동시켰다

열여덟에 과거장을 휩쓸고 다니더니

청 화살로 금문(金門) 깨고 급제하였다

 

위의 시 '금자라'는 금빛의 큰 자라를 말하는데, 신선이 살고 있는 봉래전(蓬萊殿)을 아래에서 떠받치고 있다 한다. 신선이 살고 있다는 동해의 삼신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32년조 주석 참조할 것)

 

885년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에 의해 시독겸한림학사수병부시랑지서서감(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에 임명되어 외교문서 등의 작성을 담당했다. 이듬해 당나라에서 지은 저술들을 정리하여 왕에게 헌상했으며, 〈대숭복사비명 大崇福寺碑銘〉·〈진감국사비명 眞鑑國師碑銘〉 등을 지었다. 이처럼 문장가로서 능력을 인정받기는 했으나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으로 당나라에서 배운 바를 자신의 뜻대로 펴볼 수가 없었다. 이에 외직을 청하여 대산(大山)·천령(天嶺)·부성(富城)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했다. 당시 신라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하대(下代)에 들어 중앙귀족들의 권력쟁탈과 함께 집권적인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지방세력의 반발과 자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889년(진성왕 3) 재정이 궁핍하여 주군(州郡)에 조세를 독촉한 것이 농민의 봉기로 이어지면서 신라사회는 전면적인 붕괴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891년 양길(梁吉)과 궁예(弓裔)가 동해안의 군현을 공략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다음해에는 견훤(甄萱)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최치원은 부성군 태수로 재직중이던 893년 당나라에 보내는 하정사(賀正使)로 임명되었으나 흉년이 들고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여 가지 못했다. 그 뒤 다시 입조사(入朝使)가 되어 당나라에 다녀왔다. 894년 2월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 조를 올렸다. 그가 올린 시무책의 내용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집권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사회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성왕은 이를 가납(嘉納)하고 그에게 아찬의 관등을 내렸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자체적인 체제정비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이 시무책은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897년 진성여왕의 양위(讓位)로 효공왕이 즉위했는데, 이때 진성여왕의 〈양위표 讓位表〉와 효공왕의 〈사사위표 謝嗣位表〉를 찬술하기도 했다.

그뒤 당나라에 있을 때나 신라에 돌아와서나 모두 난세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는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 바다를 소요자방(逍遙自放)하며 지냈다. 그가 유람했던 곳으로는 경주 남산(南山), 강주(剛州) 빙산(氷山), 합주(陜州) 청량사(淸寺),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 별서(別墅) 등이 있다. 또 함양과 옥구, 부산의 해운대 등에는 그와 관련된 전승이 남아 있다. 만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모형(母兄)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지냈다. 904년(효공왕 8) 무렵 해인사 화엄원(華嚴院)에서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을 지었으며,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지었고 그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흥기할 때 비상한 인물이 반드시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을 알고 "계림(鷄林)은 황엽(黃葉)이요 곡령(鵠嶺)은 청송(靑松)"이라는 글을 보내 문안했다고 한다. 이는 후대의 가작(假作)인 것으로 보이나 신라말에 왕건을 지지한 희랑(希朗)과 교분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때 왕건을 지지한 후광으로 희랑대사는 그의 후원을 받아 고려초 해인사를 크게 중창한 기록이 있다.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불교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비록 왕명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사(禪師)들의 비문을 찬술하기도 했다. 특히 〈봉암사지증대사비문 鳳巖寺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 선종사(禪宗史)를 3시기로 나누어 이해하고 있다. 선종뿐만 아니라 교종인 화엄종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화엄종의 본산인 해인사 승려들과 교류하고 만년에는 그곳에 은거한 사실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도교에도 일정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는데, 〈삼국사기〉에 인용된 〈난랑비서 鸞郞碑序〉에는 유·불·선에 대한 강령적인 이해가 나타나고 있다.

 

한편 문학 방면에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았다. 그의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으며, 시문은 평이근아(平易近雅)했다. 당나라에 있을 때 고운(顧雲)·나은(羅隱) 등의 문인과 교류했으며, 문명을 널리 떨쳐 〈신당서 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사륙집 四六集〉·〈계원필경〉이 소개되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 열전에 그가 입전(立傳)되지 않은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했다.

『신당서』예문지(藝文志)에는 "최치원의『사륙집(四六集』1권과『계원필경』20권이 있다"고 하고 주를 붙여 이르기를 "최치원은 고려 사람으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해 高騈의 종사관이 되었다"라고 했으니, 그의 이름이 중국에 알려진 것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또 그의 문집 30권이 세상에 유통되고 있다.

최치원은 많은 불교 관련 글을 남겼거니와, 그 가운데 『쌍계사진감선사탑비(雙溪寺眞鑑禪師塔碑)』, 『성주사낭해화상탑비(聖住寺朗慧和尙塔碑』, 『봉암사지증대사탑비(鳳岩寺智證大師塔碑)』,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등 이른바 '四山碑銘과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이 저명하다.

빈공과(賓貢科)는 당나라 과거제의 한 과(科)로서, 외국인을 상대로 한 것이다. 다시 신라인들이 많이 응시하여 합격했으며, 한때 그 석차를 둘러싸고 발해와 갈등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 밖의 저술로는 문집 30권,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부석존자전 浮石尊者傳〉·〈석순응전 釋順應傳〉·〈석이정전 釋利貞傳〉과 조선시대에 들어와 진감국사·낭혜화상(朗慧和尙)·지증대사의 비명과 〈대숭복사비명〉을 묶은 〈사산비명 四山碑銘〉이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계원필경〉〈사산비명〉·〈법장화상전〉이 있으며, 〈동문선〉에 실린 시문 몇 편과 후대의 사적기(寺跡記) 등에 그가 지은 글의 편린이 전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1020년(현종 11)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성묘(聖廟:孔子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1023년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태인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제향되었다.

현종이 왕위에 있었을 때, 치원이 은밀히 태조의 창업을 도왔으니 그 공로를 잊을 수 없다 하여 교서를 내려 내사령(內史令)을 추증하고, 14년 태평 2년 임술(1022) 5월에 와서 문창후(文昌候)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최치원은 후일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발만 남긴 채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서 후인들이 ‘유선(儒仙)’으로 불린다.

경상도와 전북 일대에는 지금도 최치원의 행적이 전해진다. 옥구군에 있는 바위에는 최치원이 먹을 갈던 곳과 무릎자국이 남아있다고 하며, 해운대에서는 도술로 바위에 자신의 호를 새겼다고 한다. 유적뿐 아니라 출생설화를 비롯하여 전설도 많이 전해진다.

해운대 유적 최치원의 필적

 

 

○ 기타 참고사항

 

 최치원은 스스로 자신을 ‘유자(儒者)’로 자처하였다고는 하나 그의 사상은 유불선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그는 중국의 儒, 佛, 仙은 한민족의 본래 신교(神敎)가 다시 역수입된 것으로 보았다. 특히 그가 쓴 <난랑비 서문>은 한민족에 면면히 내려왔던 신교의 정신을 확연히 드러내주는데 여기에서 최치원은 신교가 유·불·선의 뿌리임을 밝히고 있다.

 

 國有玄妙之道하니 曰風流라.

 국유현묘지도 / 왈풍류

 設敎之源이 備詳仙史하니 實內包含三敎하야 接化群生

 설교지원 / 비상선사 / 실내포함삼교 / 접화군생

 且如入則孝於家하고 出則忠於國은 魯司寇之旨也오

 차여입즉효어가 / 출즉충어국 / 노사구지지야

 處無爲之事하고 行不言之敎는 周柱史之宗也오

 처무위지사 / 행불언지교 / 주주사지종야

 諸惡莫作하고 諸善奉行은 竺乾太子之化也라.

 제악막작 / 제선봉행 / 축건태자지화야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 난랑비 서문」)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가르침을 베푸는 근원은 선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거니와, 실로 삼교를 포함하여 접하는 모든 생명을 감화시키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보면, 이는 곧 집으로 들어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으로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가 가르쳤던 뜻이요, 매사에 무위로 대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함은 노자의 가르침이며, 악한 일을 하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는 것은 석가모니의 교화니라.”

 

 마지막 화랑, 최치원

 최치원은 문인으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仙人으로서의 구도행 역시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말년에는 시해법의 일종인 ‘가야도인법’을 저술하여 전하였다고 한다.

 

 신라 중기 화랑인 ‘물계자’나 사랑(四郞)의 전설에서 보여지듯, 화랑의 정신은 멋과 풍류였다.1)

 

 『청학집靑鶴集』을 쓴 조여적은 조선 단학의 계보가 광성자(廣成子)-명유(明由)-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문박-영랑-보덕-도선-최치원-위한조-편운자(片運子)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2)

 반면 『해동전도록』에서는 태상노군에서 종리권 여동빈으로 이어지는 중국 도교가 종리권에서 당나라 유학생이었던 최승우를 거쳐 최치원을 통해 우리나라로 흘러 들어와 김시습 등으로 이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최치원은 비록 신라를 다시 부흥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자신이 진정한 풍류객의 길을 걸었고, 뛰어난 필치로 화랑의 정신을 후세에 전했다는 점에서 신라의 마지막 화랑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최치원이 말한 바대로 유불선의 뿌리이며, 우리 민족 문화의 뿌리인 ‘신교’는 수천년 역사의 굴절 속에서도 꿋꿋이 전해져 후대에 최수운의 ‘동학’으로 이어졌으며, 이제 가을의 원시반본(原始返本)의 자연섭리에 의해 상제님의 천지공사 속에서 완성되었다. 이제 후천개벽의 시운을 맞아 그 얼과 혼을 받은 증산도의 초립동이들이 다시 세계 무대의 주인공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밤이 깊어 가매 더욱 흥을 내어 북을 치시며

 시 한 수를 읊어 주시니 이러하니라.

 

 時節花明三月雨요 風流酒洗百年塵이라

 시절화명삼월우 풍류주세백년진

 철 꽃은 내 도덕의 삼월 비에 밝게 피고

 온 세상의 백년 티끌 내 무극대도의 풍류주로

 씻어 내니 우리의 득의지추(得意之秋) 아닐런가.

 

충남 보령시 남포면 월전리 보리섬(麥島) 서쪽에 높이 3m, 너비 1.8m

8개가 병풍처럼 서 있는 곳에 최치원의 한시가 음각되어 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 14호로 지정되었다.

 

○ 기타 참고사항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 145호로 지정되었다.

 

1) < 화랑세기 >에는 “화랑이란 선의 무리(仙徒)이다. … 선도들은 다만 신(神)을 받드는 일을 주로 하여 국공(國公)들이 그들을 따라 나란히 다녔고, 후일에 선도들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면려(勉勵)하였으므로,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이로부터 선발되었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여기에서 나왔으니 화랑의 역사는 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라고 전한다.

 《계림유사(鷄林類事)》를 보면, “단(檀)은 배달(倍達)이고, 국(國)은 나라(那羅)이며, 군(君)은 임검(任儉)이다.(檀倍達 國那羅 君任儉)”라는 기록이 있다. 풍월도(風月道)의 ‘풍(風)’이 옛날에는 ‘발함 풍’이라 하였는데, ‘바람’, ‘배람’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월(月)’은 ‘달 월’이다. 이것을 이두식으로 읽게 되면 ‘발달길’또는 ‘배달(倍達)길’이 된다. 또한 풍류도라 할 때 ‘류(流)’ 자는 ‘흐를 류’ 또는 ‘달아날 류’라 한다. 그렇다면 풍류도 역시 ‘배달길’이 된다고 하겠다. 신라에서는 맨 처음 풍월주(風月主)라 하였다가 뒷날 화랑(花娘, 花郞)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2) 광성자와 명유는 중국정사에서 상고의 신선으로 모셔지는 신비의 인물이다. 그리고 환인은 『환단고기』에서 ‘승유지기(乘遊至氣) 묘계자연(妙契自然)’ 하였다고 전하며, 환웅 역시 주문을 읽고 단을 복용하여 신령한 경지에 다다랐다고 한다. 단군임검 또한 삼국사기에 선인(仙人)왕검이라 칭하고 있다.

 

=== 선(仙)의 맥을 이은 인물들===============

 신채호 선생은 『규원사화』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민족의 선(仙)이 한민족 고유의 것이며 이것이 일제치하 독립운동으로까지 이어지는 ‘낭가사상’이라고 보았다.

 

 이런 선인들은 한민족 건국과정에서 주체로 참여하였으며 국가의 위란 시마다 구국의 투혼을 보여왔다. 배달국의 제세핵랑군에서 시작된 선인의 맥은 고구려의 조의선인, 백제의 무사도, 신라의 화랑, 고려의 국자랑으로 이어지며,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끝으로 은둔의 길을 걷게 된다.

 

 을지문덕, 연개소문, 김유신, 우륵, 의상대사, 원효대사, 강감찬, 김시습, 정북창, 이지함, 곽재우, 권극중 등 낯익은 이름들이 선인의 맥을 이은 인물들이다. 이외에도 무명으로 시해선(尸解仙)이나 천선(天仙)이 된 이들은 수없이 많다. 이들은 세상과 담을 쌓고 풍류로써 자연과 벗하다가도 국가의 위난 시나 대변국기에는 어김없이 세상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함을 꺼리지 않았다.

최치원 역시도 「낭혜화상비문」에서 장생을 구하여 학을 타고 날아다니며 고고함을 구하는 중국 선도를 깎아 내리며, 오히려 중생을 구제하여 세상을 위해 몸을 적시는 진정한 선의 길을 제시하였다.

그에 대한 문헌의 기록은 904년을 끝으로 보이지 않는데 세간에서는 그가 신선이 되어 등천하였다고 전한다.

 

다음은 그가 남기고 떠난 시문 중 해인사 홍류동의 최치원 선생 재실 기둥에 새겨진 <가야산 독서당에서 짓다>라는 시가 있어서 여기에 소개한다.

 

 題伽倻山讀書堂        

崔致遠

 

狂 噴 疊 石 吼 重 巒  광분첩석후중만

겹겹이 바위틈을 미친 듯이 내뿜어 뭇 봉우리를 울리니

 

人 語 難 分 咫 尺 間   인어난분지척간

사람의 말소리를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常 恐 是 非 聲 到 耳   상공시비성도이

늘 옳고 그름을 다투는 소리가 귀에 이를까 두려워

 

故 敎 流 水 盡 籠 山   고교류수진롱산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다 둘러놓았다네.

  세상의 시비소리 물소리 속에 묻히다

 

이 詩는 그가 은거하던 ‘가야산독서당’ 기둥에 부친 작품으로 紅流洞 계곡바위에 새겨져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을 미친 듯이 쏟아져 내리는 산골 물이 기암괴석의 봉우리들과 부딪치며 내지르는 굉음으로 온 산이 울리고 있다.

 

그래서 포말을 그리며 세차게 흐르는 홍류동의 물소리 때문에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말소리조차 알아들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다투는 소리가 물소리 속에 파묻혀 버렸지만 또 다시 是非聲이 들려올까 두렵다고 했다. 그래서 마지막 구절에서 홍류동 계곡 물을 돌려 자신이 사는 곳과 산을 두르게 했다고 한 것이다.

 

대장부란 무릇 뜻을 얻으면 백성들과 함께 하여 경륜을 펴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한다고 하는데, 큰 재주를 가지고도 세상이 용납하지 않으니 물러날 수밖에 없다 하겠다. 광분하는 저 물소리 이면에는 선각자의 분노성이 들려오는 것 같지 않은가?

 

명예도 탐욕도 훨훨 벗어 청산에 씻고, 시끄러운 세상 떠나 홍류동에 외로이 사시더니, 어느 날 바람처럼 어디로 사라졌

 

는가!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지팡이도 또한 살아 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하라”는 유언만 남기고 지금의 홍제암 뒤 진대

 

밭골로 유유히 사라져 갔으니, 지금껏 가야산 산신으로 살고 있는 것인가. 그가 심은 천년 전나무는 오늘도 그쪽을 바라

 

보며 한가로이 그 주인을 기다리고 있건만```

 

一入靑山更不還

崔致遠의 遺言 詩

僧乎莫道靑山好  스님아! 푸른 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라

山好何事更出山  산이 좋은데 무슨 일로 다시 산을 나오는가?

試看他日吾踪跡  시험 삼아 이다음에 나의 종적을 보아라.

一入靑山更不還  한 번 푸른 산에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참고자료>

 『삼국사기』권46(열전 제6) 최치원

 「최치원의 삼교융화사상에 관한 연구」, 하갑룡, 부산대학교

 「고운 최치원 시집1」, 김진영 외역, 민속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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