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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7. 2일/ 이형석 쌍계유적 답사-촬영










최치원은 95세까지 살았다

홍성 보금산 쌍계계곡에 금석문 16점 남겨

 

 

 ( 홍성 보금산 쌍계계곡에 금석문 16점 남겼다는 그 글자가 궁금합니다)



윤여덕(사단법인 현정회 총무이사)


입춘(立春)을 갓지난 지난달 7일 오전 충남 홍성군 장곡면 월계2리 보금산(寶金山, 300여m) 기슭 쌍계계곡 강당지(講堂址)에서는 영하의 추위 속에서 조촐하면서도 유서(由緖) 깊은 제례(祭禮)행사가 베풀어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그 연원조차 정확하게 알 길이 없는 이 마을 제사는 다름 아닌 ‘한국사상의 원류(源流)’를 형성했던 신라 말의 대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선생을 가리는 춘향대제(春享大祭)다.

9부능선상의 천년 古塚

행사 끝에 음복(飮福,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참례자들이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주 몇 잔으로 몸을 녹이고 대보름 명절 기분에 들떠 신명(神明)이 되살아난 마을주민들은 그 길로 쌍계계곡에 흩어져 있는 고운선생의 유적(주로 石刻筆蹟)들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그러나 보금산 정상 부근(9부능선)에 있다는 선생의 묘소(추정)는 워낙 거리가 멀어(마을에서 2km 거리) 10월 시제(時祭)때로 미루고 이날은 찾지 않았다.

경상도 가야산(海印寺)에서 우화등선(羽化登仙, 몸만 남기고, 즉 시해 尸解하고 혼백 魂魄은 神仙으로 化한다는 道家의 말) 하였다는 고운선생의 제사를 어째서 이 구벽진 충청도 산골에서 지내고 있는지 처음에는 그 연유를 알 길이 없었다.

‘어느날 고운(孤雲)이 아침 일찍 집 문을 나선 뒤로는 그가 간 곳을 알지 못했으며 갓과 신만이 숲 속에 남아 있었으니 아마도 신선(神仙)이 되어 갔을 것이다. 그래서 중들이 그 날로 명복을 빌게 되었다’고 적고 있는 고려 명종 때의 학자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기록대로라면 그의 행적은 그가 세상을 등지고 은거했던 가야산에서 44세에 일단 끝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4년후인 904년에 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발(跋, 책끝에 적는 글, 後記)의 내용으로 미루어 48세 때까지 해인사 화암원이라는 암자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우화등선(羽化登仙)의 허(虛)와 실(實)

그가 가야산에서 자취를 감추기 전후의 행적을 보아도 경주 남산을 비롯하여 강주(剛州, 지금의 경북 의성) 합천 청량사, 하동 쌍계사, 창원 별서(別墅), 동래 해운대 등 주로 경상도 일원에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 문화대백과 사전 22권 최치원 항목 집필자 崔柄憲)

가야산 이후 고운선생 연구의 단초를 연 학자는 60~70년대 부여박물관장을 지낸 홍사준(洪思俊)이다. 그의 연구는 조선후기의 백과사전인 이규경(李圭景, 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나오는 문창후 사적 변증설(文昌侯事蹟辨證說) ‘묘는 호서 홍산 극락사 뒤에 있는데 비가 있고 비의 앞글씨는 자필이며 뒷면은 최홍효가 썼다’ (墓在鴻山 現極樂寺后 ... 有碑 公自筆碑額 陰記崔興孝書)과 동시대의 문신학자 서유구(徐有 , 1746~1845)의 교인계원필경서(校印桂苑筆耕序) ‘장사는 호서의 홍산에서 지냈으니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은 망녕된 말이다. 그리고 묘는 홍산에 있는데 이는 가야산 기슭에 있는 한 지맥의 이름이다(葬在湖西之鴻山 謂羽化者妄也 墓在鴻山是 伽倻山 一麓之名)’를 근거로 출발하고 있다.


묘재홍산(墓在鴻山)이 부른 혼란

위의 두 문헌기록을 근거로 해서 홍사준은 실제로 지난 ‘71년 홍산 무량사에 1개월 가량 머물면서 절 뒤 만수산일대를 답사하였으나 소득이 없었다’고 그의 논문 <崔致遠의 一生>에서 밝히고 있다. 홍산이라는 지명이 일치하는데다 ‘극락사 뒤’를 ‘무량사 뒤’로 속단한 것이다.

고려말 최영장군이 왜구를 무찌른 홍산대첩(鴻山大捷)으로 보다 유명한 홍산은 행정 관할상 현재 부여군에 속해 있는데 이것은 일제(日帝)이후 개편된 행정구역이고 그 이전 조선시대에는 홍주부(洪州府)에 배속되어 있었다.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시에 전국을 23부(府)로 개편하면서 부 밑에 군(郡)을 설치하였는데 이때 공주부(公州府)와 홍주부로 분속된 부여지방의 홍산현이 군으로 개편되면서 임천(林川)군과 함께 홍주부 관할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忠南 地域의 文化遺蹟 제3집 扶餘篇, 1989)

홍산은 일찍이 태종 13년의 지방제 정비 과정에서도 행정적으로는 공주목(牧, 전국 12牧의 하나)에 속하면서도 군사적 통속(統屬)관계에 있어서는 홍주 진영(鎭營)으로 편제되는 등 2중 구조로 되어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명목상 공주권에 속하나 사실상은 홍주권 대접을 받은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규경이나 서유구가 장곡면 월계리 보금산에 있는 묘소를 ‘묘재 홍산(墓在鴻山)’이라고 기록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특히 당시 말단지명을 호칭할 때 한 단계 위 단위 지명으로 통용한 것은 우선 알기 쉽고 쓰기 편하다는 이점(利點)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장곡이 홍주목(牧) 관할이기는 하나 이름 없는 기초단위 행정지명을 지금의 광역시쯤 되는 목이나 부 단위로 부를 수는 없기 때문에 홍산현으로 한 단계 낮추어서 불렀을 거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천광역시 관할 강화군내에 있는 면 단위 지명을 인천이라 하지 않고 강화라고 하는 것과 같다.


사제(師弟) 2대에 걸친 연구 결실

홍사준의 직제자인 홍주향토문화연구회 전옥진(田玉鎭, 69)부회장도 ‘고운 최치원선생 묘역고’(孤雲崔致遠先生墓域考)라는 논문에서 홍산(鴻山)의 ‘鴻’자가 홍주(洪州)의 ‘洪’자를 오기(誤記)했을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洪山’이라는 가정하에서 그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걸 보면 이 문제(鴻山의 위치 比定)로 적잖이 고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전씨는 또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가야산 (678m, 경상도 가야산과 이름이 같다)이 광활한 예당(禮唐)평야가 전개되는 이 일대의 주산(主山)으로서 보금산을 그 한 지맥으로 거느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상의 금환(金丸)이라는 이 지역의 또 다른 이름에 주목한다.

신라오기(新羅五技)를 노래한 향악잡영(鄕樂雜詠) 5수(首)중의 금환시(金丸詩)가 쌍계계곡의 빼어난 풍광(風光)과 금환놀이를 동시에 읊은 2중가(重歌)일 수도 있다는 색다른 해석을 내 놓고 있다. 금환은 달을 뜻하는 말이기도 해 유난히 ‘月’자 든 지명이 많은(모두14개) 이곳의 지리적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주장이다.


금환(金丸)은 월계(月溪)의 옛지명

‘한번 들어가면 세상 인연 다 버리고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一入靑山更不還)던 그이기에 신선의 경지를 읊은 이런 시를 남길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것이다. 최치원의 묘소로 추정되고 있는 보금산 고총 아래 산기슭 일대가 ‘절골’이라는 이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이 터가 바로 지난 ‘96년 흥성문화원주관 학술발표회에서 오윤희교수(한서대)가 발표한 논문 ‘호서지방의 최치원 사적’중의 ‘쌍계근방의 극락사’일런지도 모른다는 추리가 가능해진다.

또 최근에는 묘소부근 땅속에서 비석 받침들(臺石, 사방 홈길이 25cm) 1개를 발굴함으로써 이 부근 어딘가에 반드시 비석도 묻혀 있을 거라는 추정을 가능케 해 주었다.

너비 10m 안팎의 쌍계 상류에서 두 갈래 물줄기가 만나는 용소(龍沼)까지 약 3백m 들어간 계곡 석벽에 새겨진 금석문은 모두 16개에 이른다. 그 중에 ‘崔孤雲書’라고 이름을 새긴 ‘雙磎’와 ‘楓嶽’은 가로새긴 두 글자의 길이가 93cm로 하동 쌍계사 입구에 있는 ‘雙磎石門’의 세로길이와 꼭 같다.

이 금석문의 필적을 감정하기 위하여 작년봄 최근영(崔根泳)교수(역사학회회장)가 서예학(書藝學) 전공인 손환일(孫煥一)강사(원광대)와 함께 직접 현지를 답사한 끝에 고운 찬(撰) 서(書)인 진감선사 대공탑(眞鑑禪師大空塔) 비문 탁본 글씨와 비교한 끝에 역시 두 필적이 일치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필적감정으로 친필 확인

이밖에 그가 태수를 두 번씩이나 지낸 부성(富城, 지금의 서산)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富城祠)이 있으며 ‘過仙閣’이라는 고운 친필 동헌(東軒)현판이 유명하다.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 옥병계(玉屛溪)바위에는 경남 하동군 화계면 법왕리 계곡 석벽의 친필 세이암(洗耳 )과 똑같은 세이암 세글자가 세겨져 있다.

‘세상의 시비를 초월한다’는 은둔의 뜻이 짙게 베어 있는 글귀다.

매년 10월에 길일을 택해 지내는 가을시제(時祭)에는 현지의 경주 최씨 문중 후손들은 물론 멀리 경상도 종친들도 벌써 7년째 매년 참례하고 있다.

‘99% 확신한다’고 거의 단정적으로 말하는 문창(文昌)학술연구원이사장 최창규(崔昌圭, 67, 부산)씨는 지난해 영조 때의 선대 필첩 역본(筆帖譯本, 陶渦 崔南復先生 筆跡)을 펴내면서 ‘孤雲先生의 隱遁生活과 詩의 世界’라는 부록을 증편(增編), ‘임종(臨終)의 땅’편을 신설하고 지리산 화개동설과 함께 마지막 은둔 종신지(終身地)로 홍성 장곡설을 내세우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최치원의 출생지를 경주로 지목했는데 몇년전부터는 전북 옥구설(沃溝說)이 새로이 대두되면서 예산, 서산, 홍성, 보령에서 옥구를 잇는 호서(湖西)일대가 바로 최치원이 나서, 자라,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와 활동하다 생을 마친 평생의 무대(舞臺)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호서(湖西)지방은 그의 평생무대

경내에 최치원을 모시는 서원(文昌書院)과 단군전이 있는 옥구 향교(典儀 김정기 72)에는 일제 말(42.43년께) 서해 변에 군산비행장을 닦을 때 철거 직전 옮겨왔다는 자천대(紫泉臺)가 있다. 이 정자가 최치원이 어려서 공부하던 곳이라 하며 군산 외항 바닷가 산기슭에는 역시 최치원이 노닐던 바위굴이 지금은 전설로만 남아 있다.

군산에서 강(금강) 하나만 건너면 곧 만나게 되는 보령 성주사도 그가 어려서 공부했다는 절이며 이처럼 질긴 인연으로 후에 신라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인 낭혜화상탑비문(朗慧和尙塔碑文)을 짓게 되었다는 인과(因果)의 무상(無常)함이 금방 손에 잡힐 듯 다가선다.

일찍이 95세 생존설을 주장한바 있는 이경선교수(한양대)의 한국인물사 고전편에 의한다면 첫 은둔지 가야산 이후 50년 가까이를 더 산 셈이 되는데 그 행적은 고증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이 기나긴 시간 그는 과연 무슨 일을 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아직껏 풀지 못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계림황엽(鷄林黃葉) 곡령청송(鵠嶺靑松)’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국운과 푸른 소나무처럼 일어나는 고려를 비교한 이 한 구절이 이른바 밀찬조국설(密贊肇國說, 은밀히 고려의 건국을 도왔다는 말)을 낳고 자신은 신라조정에서 쫓겨나는 몸이 되었으나 그의 문하제자들에게는 오히려 고려 조정 진출의 길이 되었다고 하는 이율배반(二律背反) 속에서도 그는 끝내 교육을 택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그리 어렵지가 않다.

장곡월계리 강당지와 해미(海美)에 있는 가야산 보원사(普願寺) 강당사비(講堂寺碑, 최치원찬 金生書)가 이를 잘 입증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형석 E 메일 <korealove@paran.com>  019-225-4845.
 

최치원은 공자의 유도로 부터 석가의 불경이니 노자의 도덕경을 엄청나게 연구 한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그의 난낭비 鸞郞碑(환웅, 단군등을 예찬한 비석)序文 만 보아도 알수 있다.

특히 그는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말하는 도덕경을 탐독하고 우리의 전래 사상인 신선도와 융합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것은 그의 천부경 예찬문이 노자의 도덕경 81 장 처럼 81 자로 되어 있고 그 냉용도 결국은 그와 같다

 

 

고운 최치원 선생 (2) - 영정(影幀)





 

 

 

 

 

 

 

제 목 : 고운 최치원 선생 (3) - 필적(筆跡) 글 쓴 이 : 월계자




[영상 자료 출처: http://www.koreandb.net]

 

 

 

 

 

최치원

崔致遠 857(헌안왕 1) ~ ?


신라시대의 학자.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자 고운(孤雲)• 해운(海雲).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에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병(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찬)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보光塔碑)> <사산비(四山碑)> 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궤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있다.

참조: 《최치원설화연구》 한석수 저(계명문화사, 1991) 《최치원의 사상연구》 최영성 저(아세아문화사, 1990) 《최치원의 시 정신연구》 선낙희 저(관동출판사, 1986)



[출처: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제24권 6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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