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천 최평열이가 사랑하는 님들 가다 가다 힘겨울 때, 홍류동 농산정,학사당,가야서당에서 빗물 피해 가시길요, 님-의

어깨가 무거울 때,내 어깨는 늘 이자리 님의 옆에있습니다, 사랑하는 님 ! 무거운 짐 내려놓고 편히쉬어 가시길요 !

 

 

 홍류동천 농산정 찾아주셔 대단히 감사합니다

 

 잠시 쉬어 가시지요 

 道泉 崔平烈 

문창후 고운 최치원 선생 농산정 건물

홍류동천 농산정 

 

 

1988년경 부터 선대에 이어 농산정유계가 논산정에서 문창후 고운 최치원 선생을 기리도록 주선을 해 주고 있는 도천 최평열 

 


도천 최평열은 1970년대 때도 농산정에서 사진

 도천 최평열 은 농산정을 1980년경에도 주인으로서 관리했던 모습

수시로 농산정 마루를 보수도 하고있는 도천 최평열 사진

1989년경 농산정에서 농산정유계가 문창후 고운 최치원 선생을 추모하도 행사준비를 해주는 등 주선한 사진


 농산정 옆 홍류동천

 

가야서당 건물 역시 도천 최평열 소유로 되어 있다

 도천 최평열은 손수 가야서당 등 수시로 보수해 왔다.

 

 

 

유적 소유자 최평열 학사당 유림 춘향행사시



합천군 가희면 야유회 때

합천군 가희면 모산재 재외향우회 등반대회 때



학사당, 농산정, 가야서당, 나대자연농원 대표 (아호:도천道泉) 최평열

   아래 합천(야로면소재)향교 제관 시(1990년경) 道泉 崔平烈

  [통영~소매물도로 가는 중 배위에서 대전에 조양연 부장님 도천 최평열 찍은 작품 사진 

 


도천 최평열이 주인으로서 아들 준영이와 1988년경 학사당 가야서당 등 보수하는 사진 

도천 최평열 학사당 기존마루 철거하고 다시 만드는 1989년경 사진 

학사당 기와가 동파되어 비가 새어 조치를 취하고 있다.

소송을 걸은 위원회(사이비단체)가 장금쇠를 절단하고 침입해서 다시 보수하고 있다. 도천 최평열이 주선으로 하던 유림 학사당유계 및 농산정유계는 사이비단체에 방해받고 중단되어 못하고 있다.

 

학사당 과 홍도문 지붕에 비가 새어 임시 보수하는 도천 최평열 사진

 

학사당안에 물이 없어 참배 때나 방화에 사용할 수 있도로 상수도 설치하는 도천 최평열 사진

 

 위 도천 최평열 상수도 설치에 부인도 돕고 있다.

 경주시 경주최씨종친회가 관광버스11대에 타고 학사당에 방문했다, 도천 최평열 참배하도록 주선해주고 있다.

 

 

 

 

 

 

 충청남도당진서 경주최씨종친회가 도천 최평열의 학사당에 방문참배를 했다.

  道泉 최평열 가족은 열심히 일하며 바르게 살고 있습니다.

 [통영~소매물도로 가는 중 배위에서 대전에 조양연 부장님 도천 최평열 찍은 작품 사진]

 

자연스럽고 행복한 우리 가정을 1994부터 몇몇 최씨들이 사이비단체를 구합하여 형사 민사 소송을 걸어와

이러한 방해를 받고 1997년경부터 부득이 학사당유계, 농산정유계 유림행사가 중단되었고,

그뒤인 1999년말에 대법원 판결에 당사자능력까지 없다는 확정(제1심서 학사당관련 부동산을 취득하거나 그를 관리하지도 안았음이 분명하다, 판결)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유림이 아래와 같이 다시 춘향행사를 하기위한 발위를 하였으나 페소자들이 우리조상 우리가 지낼것이라며 유림은 창견하지마라며 협방해하는 때문에 지금 까지 유림행사를 결국 못하고 있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한 말씀 하시고 떠나시는 뒷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집니다.

 

                 

 


도천 최평열 인터넷 소개

 



최치원선생 혼담은 김영리의 소리

아당 채숙자 20주기 추모공연

"영제시창-시조창 창작 소리극"

 

 

 

0.경주최씨한천공파(동명종친회) 어른들이 학사당에 참배하고 농산정에서08. 8. 26./도천 최평열 

 

★중국 성성원 ( 최치원 선생 기념관)★(2014.11.28.금) (옮긴글)

 

 

농산정(籠山亭) 홍류동학사당(紅流洞學士堂

 

가야산 마애불입상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농산정에 들렸다

농산정 설명은 뒤로하고 감탄에 또 감탄했다

농산정에 앉아 한참이나 그시대를 생각하며 최치원선생이 되어보았다

참 가관이었다

삼촌하고 붙어먹질않나

선덕여왕 진성여왕 역사에 몹쓸짓은 많이도 했다

신라이야기이긴하지만 고관들은 지배불리기에 바빴고

궁은 궁데로 노닥거리고 있었으니 상소문올려봐야 집어사리기 일수고

위국충절로 상소하였으나 먹혀들어가지않차 속세에 연을 끊고 들어온곳이

여기 농산정(籠山亭)이다

최치원선생의 위국충정과 기품,귀품,기풍이 느껴져 왔다

 

해인사를 가면 꼬옥 들릴만한곳으로 추천하고싶다

농산정을 소개합니다 스마트폰사진이라 현장감은 다소 떨어짐니더

이해하시면서 봐주이소

 

 

 

농산정(籠山亭)위치

 해인사매표소홍류문을 통과하여 100M 못갔어

좌측에 계곡건너 농산정이 있고

우측에는 가야서당이 있다

 

 

농산정 문화제 172호 소개

신라말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선생(857∼?)이 지은 정자로, 은거 생활을 하던 당시에 글을 읽거나 바둑을 두며 휴식처로 삼았던 곳이다. 최치원선생은 신라의 유교학자들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다. 당나라로 유학가서 과거에 급제한 후, 중국에서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이라는 글을 써서 이름을 날렸다. 귀국 후 정치개혁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떠나 가야산에 은거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건물을 세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922년 해체해서 원래대로 다시 지은 것을 1936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과 옆면이 모두 2칸씩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문화재 상세 정보
공식명칭 농산정 주소 경남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
종목 문화재자료 172 전화번호 055-930-3757
지정일 1990.01.16
한자명칭
籠山亭
테마 유적건조물,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주차여부

 

 

 

 

 

 

 

 

 

 

 

고운 최선생 둔세지

 

 

 

 

 

 

홍류동석벽제시(紅流洞石壁題詩)

狂奔疊石吼重巒

광분첩석후중만

人語難分咫尺間

인어난분지척간

 

常恐是非聲到耳

상공시비성도이

 

故敎流水盡籠山

고교류수진롱산


    가야면 치인리 홍류동 학농산정 건너편 석벽에 고운선생의 둔세시가 새겨져 있다.
     <미친 물 바위 치며 산을 울리어 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 못 하네.
     행여나 세상 시비 귀에 들릴까? 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감쌌네. 번역: 이은상>
    이 시가 새겨진 돌을 후세 사람들은 치원대 혹은 제시석(題詩石)이라고 불렀다. 이 제시석은 세로 4척 8촌, 가로 2척의 각면에 글자 가로가 5촌 5푼의 초서로 세 줄이 새겨 있다.

 

 

 

 

 

 

 

 

 

 

 

 

학사당입구

홍류동학사당(紅流洞學士堂)

    홍류동 학사당은 농산정 건너편에 있으며 고운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매년 향사하는 곳이다.


문창후유허비

 

 

 

 

 

 

 

 

 

문화재청(청장 김  찬)은 수령이 250여 년 된 ‘합천 해인사 학사대 전나무’(경남 합천군 해인사 경내 소재)를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541호로 지정하였다.
 
  ‘학사대(學士臺)’는 신라시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선생이 해인사 대적광전 주변에 작은 정자를 짓고 선생이 역임한 한림학사(翰林學士, 왕의 자문 구실을 한 신라의 관직)란 벼슬 이름을 따 학사대라고 했으며, 여기서 선생이 가야금을 켜면 학이 날아와 고운 소리를 들었다고 전해진다. 선생이 이곳에 지팡이를 꽂았는데 이 지팡이가 자라 전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이 전나무는 최치원 선생이 심은 전나무의 손자뻘쯤 되는 나무로 역사성과 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고 규모가 커서 천년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사진2-동백섬 해운 최치원선생 유적 풍경2014.2.26.//도천 최평열

 

 

 

 

사진1-동백섬 해운 최치원선생 유적 풍경2014.2.26.//도천 최평열

 

 

 

 

  • 최치원
  • 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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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당|배향지
    사당|배향지
    사당|배향지
    성격
    성별
    본관
    대표 관직
    [정의]
    통일 신라 시대 부성군[현 서산시] 태수를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경주.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최치원(崔致遠)[857~?]의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최견일(崔肩逸)이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활동 사항]
    최치원은 신라 육두품 출신 중 가장 대표적인 학자이다. 868년(경문왕 8) 당나라로 유학하여 874년에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많은 시문을 지었고, 879년 황소(黃巢)의 난 때 종사관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885년 당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되었고, 다음 해에 왕명으로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 등의 명문을 남겼으며,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하여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귀국하여서는 당시 진골 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 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을 자청하여 대산군(大山郡)[전라북도 태인], 천령군(天嶺郡)[경상남도 함양] 등지의 태수를 역임하였다. 887년(진성여왕 1)에 비로소 부성군(富城郡) 태수로 부임하여 893년
    진성여왕이 하정사로 삼아 당에 파견하기 전까지 7년 동안을 재임하였다. 특히 최치원이 오랜 기간 동안 부성군의 지방관으로 머무른 데에는 신라 왕실에서의 특별한 조치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서산 일대는 서해안에 접경하여 당과 교류하는 중요한 거점이었고, 당시 국제적인 인재로 활약했던 최치원의 교량적 역할이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이다.

    서산에는 아직도
    최치원과 관련된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최치원이 치성(治城) 또는 진성(陳城)으로 이용하였다고 전해지는 부성산성(富城山城)과 집무를 보았다고 전해지는 관아 터, 옥터밭[獄地田]이 있다. 또 최치원이 공부를 하였다고 전해지는 서광사(瑞光寺), 가야산 산중 용현리에 강당을 마련하고 학동들에게 글을 가르쳤다는 강당골 등이 그것이다. 한편 그 진위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부성사(富城祠) 내에는 그의 ‘과선각(過仙閣)’ 현판도 보존되어 있다.

    최치원은 부성태수를 마치고 함양태수를 지내고 있던 894년(진성여왕 8)에 시무책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리는 등 당시의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 노력하였으나, 결국 정치적·신분적 한계로 무산되었다. 그리하여 40여 세의 나이로 모든 관직을 버리고 은거한 후, 전국을 방랑하다가 말년에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다고 전한다.

    [학문과 저술]
    최치원의 유(儒)·불(佛)·선(仙) 통합 사상은 고려 시대의 유학과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계원필경』, 『금체시(今體詩)』,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잡시부(雜詩賦)』,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사륙집(四六集)』 등이 있고, 사서(史書)로는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등이 있다. 불교에 관련된 저술로는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석이정전(釋利貞傳)』, 『석순응전(釋順應傳)』, 『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이 있었으나 오늘날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상비명』 뿐이다. 그 외는 『동문선(東文選)』에 시문이 일부 전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1020년(현종 11)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1021년(현종 12)에 문창후(文昌候)에 추시(追諡)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태인의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의 고운영당(孤雲影堂), 대구의 계림사(桂林祠) 등에 제향되었다. 서산 지역에도 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부성사가 건립되었는데, 명칭은 서산의 옛 이름이자 최치원이 태수를 지냈던 유서를 따라 붙여졌다. 또한 최치원을 비롯한 서산의 다섯 인물을 기리기 위한 오현각이 1913년 부성산성 내에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내용 펼치기
    [수정이력]
     
     
    두산백과

    문창공영정

    [ 文昌公影幀 ]
    요약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있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영정.
    • 지정종목

      문화재자료

    • 지정번호

      대구문화재자료 제25호

    • 지정일

      1990년 12월 15일

    • 소장

      경주최씨 구회당 종중

    • 소재지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766-4

    • 시대

      조선

    • 종류/분류

      영정

    1990년 12월 15일 대구광역시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최치원의 후손인 최흥원이 1865년 대구광역시 동구 지저동에 있는 계림사에 봉안하였다가 1912년 도동 766-4번지 문창공영당으로 옮긴 것이다.

    재료는 극채색 견본이며 사용된 색채는 9종으로 홍, 황, 회, 녹, 감, 등(橙), 백, 흑, 담녹이다. 전신좌상으로 신선경을 배경으로 바위 위에 앉아 있고 좌우에 책을 둔 신선도 화풍의 민화이다.

    최치원의 영정은 지리산 쌍계사본과 가야산 해인사본이 있다. 1783년(정조 7)에 쌍계사본은 전라북도 태인면의 무성서원으로 옮겨 고종 때 개모(改模)하였고, 해인사본은 경상북도 청도군 및 대구지방으로 옮겨서 봉안하다가 거의 같은 시기에 개모하였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16호인 청도 계동사의 최치원 영정은 중국풍의 문인상 형식을 취한 민화로 1882년 개모된 것이지만 이 영정은 신선상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청도의 영정보다 20년 정도 먼저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역참조항목
    도평동, 도동

    [네이버 지식백과] 문창공영정 [文昌公影幀] (두산백과)

     

     

    두산백과

    고운영정

    [ 孤雲影幀 ]
    요약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角南面) 일곡리(日谷里) 각남서원 계동사 영정각(影幀閣)에 봉안되어 있는 최치원(崔致遠)의 초상화.
    • 지정종목

      시도유형문화재

    • 지정번호

      경북유형문화재 제166호

    • 지정일

      1983년 06월 20일

    • 소장

      경주최씨 종중

    • 소재지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구곡길 125-1(일곡리 183)

    • 시대

      조선

    • 종류/분류

      회화류

    • 크기

      105㎝×74㎝

    1983년 6월 20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66호로 지정되었다. 크기는 가로 105㎝, 세로 74㎝이다. 최치원의 영정은 지리산 쌍계사본과 가야산 해인사본이 있는데 이것은 해인사본으로 원래 해인사에 있던 것을 구한말에 왜적이 약탈해갈 것을 염려해 당시 최씨문중에서 이 마을로 옮겨 봉안한 것이다.

    최치원 영정의 대부분이 승상(僧像) 형식이지만 이 초상화는 중국풍의 문인상(文人像) 형식이다. 사방모(四方帽)에 평상복을 입은 최치원이 하얀 깃털부채를 쥐고 의자에 앉아 있고, 그 양옆에는 석류를 담은 청자그릇을 받쳐든 동자와 파초선을 든 동녀가 시립해 있다. 화폭의 왼쪽 위에는 ‘신라최선생고운지진영(新羅崔先生孤雲之眞影)’이라는 글이 세로로 씌어 있다.

    고식(古式)을 취하고 있지만, 얼굴 묘사와 옷주름 처리에 사용된 선염법(渲染法:화면에 물을 축이고 마르기 전에 물감을 칠하여 몽롱한 효과를 나타내는 채색 기법의 한 가지)이나 바닥에 깔린 돗자리의 형태 등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본떠서 그린 이모본(移模本)으로 여겨진다.

    최치원은 통일신라시대의 학자로서 869년(경문왕 9)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활약했다. 879년에 그가 지은 《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특히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운영정 [孤雲影幀]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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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치원 영정 *옛날사람들의 영정

     

     

     

    한문학의 비조라고 할 수 있는 최치원

    신라시대 학자, 879년 황소의 난 때 고변의 종사관 으르서 토황소격문 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난랑비서문 은 화랑도 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각종 최치원 영정 가운데 가장 오래된 그림이 발견됐다.

    알려지지 않은 전혀 새로운 작품이 발굴된 것이 아니라, 경주최씨 문중 소장품으로 경남 시도유형문화재 제187호이며 지금은 부산박물관에서 위탁 관리 중인 '운암영당 고운선생영정'을 X선 판독을 통한 정밀 분석한 결과 이런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국립진주박물관(관장 강대규)은 기획특별전 '민족의 영산, 지리산'에 대여한 이 영정을 "안전한 전시를 위해 유물 안정화 작업을 실시하던 중, 여러 차례 덧칠 흔적과 박락된(벗겨진) 안료 밑면 일부에서 다른 형태의 그림선을 육안으로 확인하고는 X-선 투과 촬영조사 등 정밀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 그림이 건륭(乾隆) 58년(1793)에 하동 쌍계사에서 제작됐음을 밝혀주는 화기(畵記.그림의 제작내력)를 확인했다"고 11일 말했다.

    나아가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에 의뢰한 적외선 촬영조사도 병행한 결과 현재는 문방구를 그려놓은 영정 밑바탕에서 각각 동자승으로 추정되는 인물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번에 확인된 화기에서는 이 영정을 그린 화가와 시주자 등과 관련된 내용도 보인다고 박물관은 덧붙였다.

    따라서 이 영정은 "현전하는 최치원 초상화 중에서 제작시기가 가장 이른 것으로 판단된다"고 이 박물관 곽홍인 학예연구사가 말했다.

    원래의 최치원 영정에서 동자승 2명이 확인됨에 따라 이 영정은 신선도(神仙圖)로 기획되어 제작됐음을 추정할 수 있게 됐다.

    최치원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지리산으로 은퇴한 뒤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으며, 이를 근거로 후대에는 최치원이 지리산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광범위하게 생겨났다.

    원래는 신선도 일종인 최치원 영정이 지금처럼 문방구를 갖춘 완연한 유학자 영정으로 바뀌게 된 유래에 대해 박물관 장석욱 학예연구사는 "초상을 쌍계사 밖의 사당과 서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동자승 흔적을 없애고 그 자리에다가 문방구류 등으로 덧칠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조선시대에는 주자성리학이 확고한 지배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음에 따라 불교나 도교적 흔적이 완연한 부분은 지우고 유학의 색채가 나는 제재를 그려넣는 일이 흔했다.

    이 초상은 쌍계사에서 보존하다가 순조 25년(1825) 화개의 금천사로 옮겼고,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으로 하동향교로 옮겨 한동안 보존하다가 이후 광천영당을 거쳐 1924년에 운암영당으로 옮겼으며 현재는 부산박물관이 보관 중이다.

    <<현재의 최치원 영정. 푸른칸 밑에 동자승 확인>>

    <<새로 찾아낸 동자승, 푸른칸 안에 동자승이 보인다>>

    <<최치원 영정에서 화기가 발견된 부분>>

    <<최치원 영정 화기>>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연합뉴스)

     

     

     

     

    최치원 영정 원본서 ‘동자승’ 발견

    국립진주博, 적외선 영상 공개…조선시대 척불 흔적인 듯

     
     
    고운 최치원(857~?)의 영정 원본에 동자승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그려진 것이 확인됐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최근 “최치원 영정 적외선 촬영을 통해 안료 뒷면에 다른 형태의 그림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최치원 영정 원본(사진 왼쪽)과 X선 촬영결과. 동자승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적외선 촬영조사 결과에 따르면, 덧칠된 부분은 오른쪽 중하단에 문방구가 놓인 탁자와 화면 왼쪽 중앙의 초받침 부분이다. 여기에는 중앙의 최치원을 좌우에 동자승으로 보이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또 화기(畵記)에는 초상화가 건륭 58년(1793)에 하동 쌍계사에서 그려졌다고 밝혀, 국내외 최치원의 초상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여겨진다.
     
    박물관 측은 “동자승의 배치로 볼 때 단순한 문인의 초상이 아니라 최치원을 산신도 속의 신선으로 묘사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며 “불교의 지위가 급격하게 낮아진 조선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쌍계사를 떠나 사당과 서원으로 보관처를 옮기는 과정에서 동자승의 흔적을 가리기 위해 문방구류 등 다른 사물로 덧칠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한편, 경남도유형문화재 187호 ‘운암영당 고운선생영정’은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이자 문인인 최치원의 초상화로, 경주최씨 종중의 소유다. 제13교구본사 쌍계사에서 보관해오던 이 초상화는 조선 순조25년(1825)에 화개 금천사로 옮겨졌고, 고종 5년(1868) 내려진 서원철폐령에 따라 하동향교에서 보관됐다. 그 후 광천영당을 거쳐 1924년 운암영당에서 소장하다가 현재 부산박물관에서 보관.관리를 맡고 있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국내외에 전하는 통일신라시대 말기 학자 최치원(857~?)의 각종 영정 가운데 가장 오래된 그림이 발견됐다.

    국립 진주박물관은 "'운암영당 고운선생 영정' 그림이 적외선 찰영 결과 건륭 58년(1793)에 하동 쌍계사에서 제작됐음을 밝혀주는 화기(畵記)를 확인했다"고 11일 밝혔다. "지금까지 알려진 각종 최치원의 초상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여겨진다"며 "이 외에도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름, 시주자 등의 내용도 기록돼 있다"고 전했다.

    국립진주박물관 곽홍인 학예연구사는 "'운암영당 고운선생영정'의 X선 투과 촬영조사를 통해 현재의 그림이 원본 그림 위에 덧칠됐음이 밝혀졌다"며 "덧칠된 그림 부분은 화면 오른쪽 중하단의 문방구가 놓인 탁자와 화면 왼쪽 중앙의 초 받침"이라고 설명했다. "두 부분 모두 동자승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최치원을 중심으로 양쪽에 그려져 있음이 확인됐다." < 관련기사 있음 > realpaper7@newsis.com

    < 저작권자ⓒ '한국언론 뉴스허브'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캡쳐] 신증동국여지승람 합천군 편 해설본 합천군을 알립니다.

     

     

     

     

     

     

     

     

     

     

     

     

     

     

     

     

     

     

     

     

     

     

     

     

     

     

     

     

     

     

     

     

     

     

     

     

    2013.7.1./월요기획/ 창원 ‘최치원 유적지’를 가다. + 마산 월영대·정선 몰운대…문인의 발자취 따라가 보자

     


    임영주 마산문화원장(왼쪽)과 한정호 경남대 교수가 지난 25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운동에 있는 월영대에서 최치원 현양사업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월영대 모습(사진 위)과 현재의 월영대(사진 아래). 지금은 주변이 주택 밀집지인 데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대형건물이 들어서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뿐더러 달빛조차 보기 어렵게 됐다.

    우영자(오른쪽) 진해문화원장과 정남식 사무국장이 지난 24일 진해구 가주동 청룡대 입석 앞에서 청룡대의 관리 방안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다. 우측 상단에 보이는 비석은 후손들이 건립한 청룡대비(靑龍臺碑)이다. 좌측 하단 바위(점선)엔 청룡대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청룡대 치원서(靑龍臺 致遠書)’라 음각돼 있는데 일필휘지로 쓴 필체로 보아 최치원의 친필로 추정된다. 작은 사진은 청룡대 치원서 탁본./이종훈 기자/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월영대 모습(왼쪽)과 현재의 월영대(오른쪽). 지금은 주변이 주택 밀집지인 데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대형건물이 들어서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뿐더러 달빛조차 보기 어렵게 됐다.

    늙은 나무 기이한 바위 있는 푸른 바닷가에(老樹奇巖碧海堧 노수기암벽해연)

    고운(孤雲)의 노닌 자취 모두 연기가 되었구나(孤雲遊跡總成烟 고운유적총성연)

    지금은 오직 높은 대(臺) 뜬 달만이 남아(只今唯有高臺月 지금유유고대월)

    머물며 얻었던 그 정신(精神) 내게 전해 주누나(留得精神向我傳 유득정신향아전)


    조선 중기 문신 퇴계 이황이 신라 말 대문장가 고운 최치원이 향학을 설치해 제자들을 가르쳤던 월영대를 찾아 남긴 한시다.

    일찍이 창원은 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숱한 문장가들이 최치원의 학덕과 정신을 흠모해 끊임없이 찾았던 순례지이다. 유명한 학자들이 창원의 월영대(月影臺)와 고운대(孤雲臺)를 직접 방문해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헌시와 창원의 풍광에 찬탄하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특히 최치원이 대(臺)를 쌓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월영대는 ‘봉래학사 노닐던 대’, ‘유선(儒仙)이 읊조리던 축대’, ‘바닷가 축대’, ‘고운이 놀던 자취’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처럼 월영대는 노송과 기암절벽이 조화를 이룬 두척산(무학산)이 병풍처럼 둘렀고, 경치 좋고 잔잔한 바닷가에 비치는 달그림자는 속세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선의 세계였다.


    ◆월영대 달빛조차 보기 어려워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달 25일 오후 임영주 마산문화원장과 한정호 경남대학교 교수와 함께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운동 월영대를 찾았다. 속칭 댓거리라고 하는 곳, 마산에서 국도로 진주·통영으로 가는 도로변에 위치해 있으며, 주변은 이미 밀집 주택지로 변했다. 1990년 월영대에서 불과 3m 거리의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대형 건물이 세워져 그나마 경관이 좋았던 월영대는 달빛조차 보기 어렵게 됐다.

    최치원이 바닷가에 축대를 쌓아 돝섬을 바라보고 발아래 백사장을 거닐며 달구경과 뱃놀이를 즐겼다는 풍광은 완전히 사라지고, 주변의 높은 건물 때문에 정오가 돼야 햇빛을 볼 수 있는 초라한 상태로 위치만 알려주고 있었다.

    높이 1.2m 정도의 직사각형 보호 축대로 둘러져 있고, 동편 중앙에는 1691년(숙종 17년) 최위(崔瑋)가 창원도호부로 부임하며 정화하고 세운 유허비(遺墟碑)가, 서편에는 1930년경 최씨 문중에서 추모비를 세워 팔작지붕 비각에 안치했다.

    동북쪽에 최치원이 ‘월영대’라고 쓴 3자가 각각 23㎝ 크기의 해서체로 높이 210㎝, 폭 35㎝ 정도의 입석에 새겨져 있다. 입석 측면과 뒷면의 글씨는 마모가 심해 판독하기 힘들다.

    박동백 창원문화원장은 “1990년대 초 월영대는 문화재자료로 되어 있어 주변 환경의 보호를 받지 못했으며, 불과 3m를 사이에 두고 5층 빌딩이 들어서 ‘이제 월영대는 달빛조차 볼 수 없게 됐다’는 실태를 경남신문(1990년 3월 16일자)에서 보도한 후에 1993년 1월 8일 도기념물로 지정돼 그나마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임영주 마산문화원장은 “시민들이 접근하기 쉽게 월영대 주변 건물을 수용해 주차장 등을 만들고 공원을 조성하는 등의 정비 사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최치원이 수도하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는 고운대는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창원도호부 ‘산천조’를 보면 고운대는 월영대 북쪽 5리 두척산(무학산)의 동쪽 봉우리에 있으며 매우 높은 절벽이었다고 한다.

    청룡대는 최치원이 낚시를 즐기던 곳으로 전한다. 창원시 진해구 웅동면 가주동 용원컨트리클럽 진입로 변에 있다. 지난 24일 우영자 진해문화원장·정남식 사무국장과 함께 현장을 찾았다. 정확한 위치를 모르면 그냥 지나칠 것 같은 곳이었다. 얼핏 약수터 같은 느낌이 든다. 당시에는 조수(潮水)가 드나들었다고 하나 지금은 뭍으로 변했다. 2.4×1.4m 정도 화강암 계통의 자연암석 동남부에 60×35㎝ 정도의 각자부(刻字部)를 마련하고 ‘靑龍臺 致遠書(청룡대 치원서)’라 음각했는데, 일필휘지로 쓴 필체로 보아 최치원의 친필로 여겨지며, 후손들이 이를 기리는 청룡대비(靑龍臺碑)를 건립했다. 1997년 12월 31일 경상남도기념물 제188호로 지정됐다.

    강선대는 웅천읍지 ‘산천조’에 의하면 최치원이 월영대와 강선대를 사이에 두고 배에 올라 달빛을 즐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창원시 진해구 비봉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우영자 진해문화원장은 “진해도 군사문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운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좋은 문장을 가슴에 새기는 기회를 만들어야겠다”며 “청룡대가 훼손되지 않도록 보다 세밀한 관심을 가져야 하고, 안내판 등을 만들어 무관심 속에 지나치지 않게 정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왜 최치원인가

    창원·마산·진해시가 통합한 지 3년이 됐지만 여전히 시민 속으로부터의 통합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여러 가지 원인과 또 처방이 있겠지만 문화적인 동질성을 고취시키고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다. 이런 매개체로 창원과의 인연이 어느 지역보다 오래 깃든 최치원을 통한 문화 정체성을 확보해 지역 간 문화적 공감대를 형성해 보자는 것이다.

    특히 창원이 최치원의 소요지일 뿐만 아니라 생장지이다는 근거도 밝혀져, 그의 현양사업을 통해 통합정신을 되살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최치원은 창원을 소요하면서 학문 전파와 한시 창작에 몰두하며 창원을 배경으로 한시를 많이 남겼다.

    ‘바람도 산마루 보드라운 구름 차마 못 흩고/ 햇볕도 언덕머리 푹 쌓인 눈 녹이지 못하네/ 홀로 풍경 읊으니 이 마음 아득한데/ 바닷가 갈매기와 쓸쓸히 벗하네’ 최치원의 봄날 풍경이다.

    전문가들은 이 시에서 일컫는 바다는 창원의 합포만으로 짐작되고, 백사장은 월포해수욕장을 일컫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월포해수욕장은 서성동~마산세관 부두 일원에 이르는 2㎞의 백사장과 해안을 따라 길게 소나무 숲이 우거져 전국적으로 유명한 해수욕장이었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1935년 신포동 매립공사로 인해 사라졌다.

    최치원과 창원의 문학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창원은 그의 학문과 인격을 존중한 고려·조선시대 문장가와 선비들의 순례지가 됐으며, 그들의 작품이 최치원과 창원의 인연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예향 창원의 자랑이다. 마산시립박물관 앞마당에 이들 13인의 시비를 만들어 최치원 선생의 높은 학문과 정신세계를 기리고 있다.

    한정호 경남대 교수는 “최근 들어 군산시에서 ‘새만금 최치원 프로젝트’를 제안하며 문화관광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창원의 역사 속에서 가장 큰 자랑인 최치원 현양사업을 창원시가 주축이 돼 선두주자로 나서 창원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011년 10월 열린 최치원 문화심포지엄을 기획한 이광석 창원문예부흥추진 대표는 “조선조 중기의 문신 심의는 대관제몽유록에서 하늘나라에 문장왕국(시인의 나라)을 세웠으되 천자는 최치원이요, 수상에는 을지문덕, 좌상에 이제현, 우상은 이규보로 삼았다고 할 만큼 고운의 학덕을 천하의 명품으로 꼽았다”며 “앞으로 고운대, 서원곡, 강선대, 돝섬 등 고운의 발자취를 체계적으로 복원하는 한편 그의 학덕을 기리는 기념공원, 월영누각 등 친환경적 사업들이 추진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종훈 기자 leejh@knnews.co.kr

     

     

    '문학이 흐르는 길'…관광공사, 5곳 선정


    신라의 문장가였던 고운 최치원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운동 월영대(月影臺) 앞바다의 아름다움에 반해 후학을 기르며 이곳에 오래도록 머물렀다고 한다. 이후 월영대는 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문장가들의 순례지가 됐다.

    시조시인 이은상은 노비산 언덕을 산책하며 마산 앞바다의 아름다움과 고향의 추억을 ‘가고파’에 담았다.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

    날씨가 선선해지니 문향(文香)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한국관광공사는 ‘문학이 흐르는 길을 따라’라는 주제 아래 문학기행을 하기에 좋은 5곳을 ‘9월에 가볼 만한 곳’으로 선정했다. 경남 창원 마산합포구, 전북 부안의 신석정문학관, 경기도 양평 황순원문학관, 강원도 정선 몰운대, 경북 칠곡 구상문학관 등이다.

    ○문학의 고향 마산합포구

    마산합포구 문학여행의 시작점은 창원시립마산문학관이다. 문학관은 시조시인 이은상이 산책하던 노비산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이은상의 호 ‘노산’도 이 산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문학관 앞마당에는 창원시에 연고를 둔 시인들의 문학비가 있다. 문학관에서 바다 쪽을 보면 ‘가고파’에 묘사된 ‘그 파란 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용마산 산호공원, 무학산 만날공원에서 문학비를 찾아보는 것도 좋다. 창원시립마산박물관 앞마당에는 최치원이 머무르던 월영대를 찾아 시를 남긴 문장가들의 시비가 있다. 고려시대 정지상 김극기 안축 등과 조선시대 서거정 이황 정문부 등 13명이 남긴 시다. 창원시청 관광진흥과 (055)225-3695

    ○부안 신석정문학관

    호남정맥의 줄기에서 떨어져 나와 바다를 향해 내달리다 우뚝 멈춰 선 변산, 그 산과 맞닿은 고요한 서해, 전나무 숲길이 깊은 그늘을 만드는 내소사와 울금바위를 병풍 삼아 아늑하게 들어앉은 개암사, 켜켜이 쌓인 해식 단애가 신비로운 풍경을 연출하는 격포 채석강, 드넓은 곰소염전과 소박하고 평화로운 갯마을의 서정…….

    전북 부안이다. 부안군 선은리에 가면 지난해 건립된 신석정문학관이 있다. 석정의 묘소는 문학관에서 10~15분 거리인 행안면 역리에 있다.

    부안 문학기행의 다음 목적지는 매창공원. 매창은 석정이 “박연폭포, 황진이, 서경덕이 송도삼절이라면 부안삼절은 직소폭포, 매창, 유희경”이라 했다는 기생이자 여성시인 이매창이다. 매창이 유희경을 그리며 쓴 이별가의 절창 ‘이화우(梨花雨)’를 새긴 시비가 매창공원에 있다.

    ○‘소나기’의 양평 황순원문학관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수능리에는 황순원문학관과 소나기마을이 있다. 작가와 특별한 연고가 없는 이곳에 문학관이 들어선 건 소설 ‘소나기’에 “소녀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대목이 있어서다.

    문학관 출입구 왼편에 작가 부부의 묘역이 있고, 문학관 내부에는 작가의 집필 공간과 소장품, 작품과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작가의 생전 모습이 전해주는 ‘황순원의 서재’다. 양평군청 문화관광과 (031)770-2066

    ○벼랑에서 시를 노래하는 정선 몰운대

    산이 높고 골이 깊은 정선을 걷다보면 소리 한 자락이 절로 나온다. 정선 소금강의 몰운대에서 시인들은 절벽과 계곡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산길을 따라 300m 남짓 걸으면 길이 끝나는 곳에 바위와 수백년 된 고목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아래는 깎아지른 절벽이다. 황동규 시인은 듬성듬성 솟은 바위에 걸터앉아 ‘몰운대행’을 노래했다. ‘몰운대는 꽃가루 하나가 강물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엿보이는 그런 고요한 절벽이었습니다. 그 끝에서 저녁이 깊어가는 것도 잊고 앉아 있었습니다….’

    황동규 외에도 이인평 박정대 등 여러 시인들이 몰운대의 풍경을 시에 담았다. 계곡과 어우러진 몰운대의 비경은 벼랑 아래에서 보면 더욱 윤곽이 선명하다. 정선군청 관광문화과 (033)560-2363

     

    ○시인 구상을 만나는 칠곡 구상문학관

    경북 칠곡에는 시인 구상(1919~2004)의 문학관이 있다. 서울 이화동에서 태어난 시인이 경북 칠곡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53년. 전후 이승만 정부에 대해 반독재 투쟁을 벌였던 그는 1952년 승리일보가 폐간되자 부인이 의원을 차린 칠곡군 왜관으로 내려와 1974년까지 살며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화가 이중섭은 그의 왜관 집에 머물렀는데 이 무렵 그린 그림이 ‘K씨의 가족’이다.

    구상문학관은 2002년 부인이 경영하던 의원 자리에 세워졌다. 문학관 뒤편에 시인의 거처였던 관수재(觀水齋)가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자리하고 있다.

    유서 깊은 가실성당과 성베네딕도회왜관수도원, 6·25전쟁 때 벌어진 다부동전투를 기념하는 다부동전적기념관과 가산산성도 가볼 만하다. 칠곡군청 새마을문화과 (054)979-6064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월영대

     

    종 목 경상남도 기념물 제125호  

    지 정 일 1993.01.08

    소 재 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운동 8-4

    시 대 통일신라

     

    신라 말기의 학자인 최치원 선생이 이곳 합포만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최치원은 자가 해운이며, 시호는 문창후이다. 최치원(857∼?)은 가족과 더불어 이곳에 살다가 신라의 멸망을 미리 알고 합천 해인사로 망명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시고 월영대는 그의 학문과 인격을 존경한 고려·조선시대의 문장가·선비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월영대는 높이 1.2m 정도의 직사각형 보호축대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안에 최치원 선생 추모비가 있다. 추모비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동편 중앙에는 1691년(숙종 17) 최위가 창원도호부로 부임하며 정화하고 세운 유허비가 있다. 


    동북쪽에 최치원이 〈월영대〉라고 쓴 3자가 각각 23㎝ 크기의 해서체로 높이 210㎝, 폭 35㎝ 정도의 입석에 새겨져 있다. 입석 측면과 뒷면의 글씨는 마모가 심해 판독하기 힘들다. 남쪽에 〈숭정후신미 칠월 일 부사 최위중수〉라고 쓴 보수비가 있어 1691년(숙종 17)에 보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며 안축 · 정지상 · 정이오 · 이황 · 이민구 등 수많은 문신, 선비들이 이곳을 순례하고 남겨놓은 시들이 《동문선》 〈여지승람〉에 남아 있다.

     

     

     

    5. 월영대(月影臺) 

    종목 : 시도기념물 제145호 (마산시) (통일신라)

    지정(등록일) : 1993.01.08

    소재지 : 경남 마산시  해운동 8-4

    [설명]

    신라 말기의 학자인 최치원 선생이 이곳 합포만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최치원은 자가 해운이며, 시호는 문창후이다. 최치원(857∼?)은 가족과 더불어 이곳에 살다가 신라의 멸망을 미리 알고 합천 해인사로 망명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시고 월영대는 그의 학문과 인격을 존경한 고려·조선시대의 문장가·선비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월영대는 보호축대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안에 최치원 선생 추모비가 있다. 추모비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동쪽에 유허비가 있으며, 최치원이 해서체로 ‘월영대’라고 쓴 돌이 동북쪽에 있다.

     

     

    최치원 유적 발굴·복원해 창원의 ‘문화 정체성’ 찾자
    월영대·청룡대 등 고운의 흔적 전국서 가장 많이 남아 있어
    “市, 유적지 복원·기념관 건립·테마공원 조성 등 적극 나서야”
    기사입력 : 2013-07-01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니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하더라.'

    중국 시진핑 주석이 지난달 27일 정상회담 환영사에서 한국과 중국은 역사가 유구하다면서 인용한 통일신라 시대 학자인 최치원의 한시이다.

    중국 주석이 인용할 만큼 최치원은 한국과 중국의 대표적인 대문장가이다.

    통합창원시 출범 3주년을 맞아 통합시의 문화적 동질성을 고취시키고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창원에 많은 유허와 유적이 남아 있는 신라시대 대학자이자 문장가였던 고운 최치원(857~?) 선생 현양사업을 확대 발전시켜 나가자는 제안이 제기됐다.

    창원·마산·진해문화원 원장은 1일 본지와의 인터뷰와 고운 선생 유적지 동행 탐방을 통해 이같이 제안하고 자료집 발간, 유적지 복원과 보존사업, 최치원 기념관, 테마공원 조성 등에 창원시가 적극 나서 문화도시 창원의 자긍심을 드높이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3개 문화원은 마산문화원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최치원 현양사업을 공동으로 점차 확대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마산문화원은 최근 최치원 설화집을 발간했으며, 올 9월께 '최치원과 창원'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최치원 유적 자료집 발간도 준비하고 있다. 창원·진해문화원은 회원들을 중심으로 최치원 유적지 탐방 등 선양사업을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최치원에 관한 유허와 유적은 전국 곳곳에서 만날 수 있지만, 창원에 가장 많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가 40세 무렵에 관직을 버리고 자연을 벗삼아 은거하면서 만년을 보낸 곳이 창원이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마산 월영대와 고운대, 진해 청룡대·강선대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월영대는 한국 유학의 연원지이며 시문학의 근원지로 창원에서 가장 유서 깊은 문화재이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창원은 그의 학문과 정신을 흠모하는 선비들의 주요 순례지가 됐고, 학맥과 문맥을 떨쳤던 곳으로 창원을 문창(文昌)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연유로 짐작된다.

    이와 함께 최치원의 생장지가 창원이라는 새로운 견해도 나왔다. 흔히 최치원의 출생지는 경주로 알려져 있었다.

    문헌설화 '최고운전'과 '구비문학대계'에 실린 구전설화를 바탕으로 최치원을 연구하고 있는 한정호 경남대 교수가 밝힌 것이다.

    한 교수는 "최치원은 문창이라는 고을에서 출생했다는 설화가 있는데, 예로부터 창원은 문창리·문창고을(지금의 회원동 일원)이라 불렸으며, 구비문학대계에도 그의 출생지로 '마산 문창고을'·'마산 돝섬'에서 태어난 것으로 거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임영주 마산문화원장은 "중국 강소성 양주시가 지난 2006년 최치원 기념관을 개관해 한국 관광객을 끌어 들이고 있으며, 창원보다 최치원의 흔적이 미미한 부산 해운대와 전북 군산, 충남 홍성 등에서 현양사업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실정이다"며 "문창의 고장인 창원을 전국의 최치원 메카로 부상시켜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창원시의 문화예술정책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종훈 기자 leej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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