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7.1./월요기획/ 창원 ‘최치원 유적지’를 가다. + 마산 월영대·정선 몰운대…문인의 발자취 따라가 보자

 


임영주 마산문화원장(왼쪽)과 한정호 경남대 교수가 지난 25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운동에 있는 월영대에서 최치원 현양사업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월영대 모습(사진 위)과 현재의 월영대(사진 아래). 지금은 주변이 주택 밀집지인 데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대형건물이 들어서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뿐더러 달빛조차 보기 어렵게 됐다.

우영자(오른쪽) 진해문화원장과 정남식 사무국장이 지난 24일 진해구 가주동 청룡대 입석 앞에서 청룡대의 관리 방안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다. 우측 상단에 보이는 비석은 후손들이 건립한 청룡대비(靑龍臺碑)이다. 좌측 하단 바위(점선)엔 청룡대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청룡대 치원서(靑龍臺 致遠書)’라 음각돼 있는데 일필휘지로 쓴 필체로 보아 최치원의 친필로 추정된다. 작은 사진은 청룡대 치원서 탁본./이종훈 기자/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월영대 모습(왼쪽)과 현재의 월영대(오른쪽). 지금은 주변이 주택 밀집지인 데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대형건물이 들어서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뿐더러 달빛조차 보기 어렵게 됐다.

늙은 나무 기이한 바위 있는 푸른 바닷가에(老樹奇巖碧海堧 노수기암벽해연)

고운(孤雲)의 노닌 자취 모두 연기가 되었구나(孤雲遊跡總成烟 고운유적총성연)

지금은 오직 높은 대(臺) 뜬 달만이 남아(只今唯有高臺月 지금유유고대월)

머물며 얻었던 그 정신(精神) 내게 전해 주누나(留得精神向我傳 유득정신향아전)


조선 중기 문신 퇴계 이황이 신라 말 대문장가 고운 최치원이 향학을 설치해 제자들을 가르쳤던 월영대를 찾아 남긴 한시다.

일찍이 창원은 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숱한 문장가들이 최치원의 학덕과 정신을 흠모해 끊임없이 찾았던 순례지이다. 유명한 학자들이 창원의 월영대(月影臺)와 고운대(孤雲臺)를 직접 방문해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헌시와 창원의 풍광에 찬탄하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특히 최치원이 대(臺)를 쌓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월영대는 ‘봉래학사 노닐던 대’, ‘유선(儒仙)이 읊조리던 축대’, ‘바닷가 축대’, ‘고운이 놀던 자취’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처럼 월영대는 노송과 기암절벽이 조화를 이룬 두척산(무학산)이 병풍처럼 둘렀고, 경치 좋고 잔잔한 바닷가에 비치는 달그림자는 속세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선의 세계였다.


◆월영대 달빛조차 보기 어려워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달 25일 오후 임영주 마산문화원장과 한정호 경남대학교 교수와 함께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운동 월영대를 찾았다. 속칭 댓거리라고 하는 곳, 마산에서 국도로 진주·통영으로 가는 도로변에 위치해 있으며, 주변은 이미 밀집 주택지로 변했다. 1990년 월영대에서 불과 3m 거리의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대형 건물이 세워져 그나마 경관이 좋았던 월영대는 달빛조차 보기 어렵게 됐다.

최치원이 바닷가에 축대를 쌓아 돝섬을 바라보고 발아래 백사장을 거닐며 달구경과 뱃놀이를 즐겼다는 풍광은 완전히 사라지고, 주변의 높은 건물 때문에 정오가 돼야 햇빛을 볼 수 있는 초라한 상태로 위치만 알려주고 있었다.

높이 1.2m 정도의 직사각형 보호 축대로 둘러져 있고, 동편 중앙에는 1691년(숙종 17년) 최위(崔瑋)가 창원도호부로 부임하며 정화하고 세운 유허비(遺墟碑)가, 서편에는 1930년경 최씨 문중에서 추모비를 세워 팔작지붕 비각에 안치했다.

동북쪽에 최치원이 ‘월영대’라고 쓴 3자가 각각 23㎝ 크기의 해서체로 높이 210㎝, 폭 35㎝ 정도의 입석에 새겨져 있다. 입석 측면과 뒷면의 글씨는 마모가 심해 판독하기 힘들다.

박동백 창원문화원장은 “1990년대 초 월영대는 문화재자료로 되어 있어 주변 환경의 보호를 받지 못했으며, 불과 3m를 사이에 두고 5층 빌딩이 들어서 ‘이제 월영대는 달빛조차 볼 수 없게 됐다’는 실태를 경남신문(1990년 3월 16일자)에서 보도한 후에 1993년 1월 8일 도기념물로 지정돼 그나마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임영주 마산문화원장은 “시민들이 접근하기 쉽게 월영대 주변 건물을 수용해 주차장 등을 만들고 공원을 조성하는 등의 정비 사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최치원이 수도하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는 고운대는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창원도호부 ‘산천조’를 보면 고운대는 월영대 북쪽 5리 두척산(무학산)의 동쪽 봉우리에 있으며 매우 높은 절벽이었다고 한다.

청룡대는 최치원이 낚시를 즐기던 곳으로 전한다. 창원시 진해구 웅동면 가주동 용원컨트리클럽 진입로 변에 있다. 지난 24일 우영자 진해문화원장·정남식 사무국장과 함께 현장을 찾았다. 정확한 위치를 모르면 그냥 지나칠 것 같은 곳이었다. 얼핏 약수터 같은 느낌이 든다. 당시에는 조수(潮水)가 드나들었다고 하나 지금은 뭍으로 변했다. 2.4×1.4m 정도 화강암 계통의 자연암석 동남부에 60×35㎝ 정도의 각자부(刻字部)를 마련하고 ‘靑龍臺 致遠書(청룡대 치원서)’라 음각했는데, 일필휘지로 쓴 필체로 보아 최치원의 친필로 여겨지며, 후손들이 이를 기리는 청룡대비(靑龍臺碑)를 건립했다. 1997년 12월 31일 경상남도기념물 제188호로 지정됐다.

강선대는 웅천읍지 ‘산천조’에 의하면 최치원이 월영대와 강선대를 사이에 두고 배에 올라 달빛을 즐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창원시 진해구 비봉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우영자 진해문화원장은 “진해도 군사문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운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좋은 문장을 가슴에 새기는 기회를 만들어야겠다”며 “청룡대가 훼손되지 않도록 보다 세밀한 관심을 가져야 하고, 안내판 등을 만들어 무관심 속에 지나치지 않게 정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왜 최치원인가

창원·마산·진해시가 통합한 지 3년이 됐지만 여전히 시민 속으로부터의 통합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여러 가지 원인과 또 처방이 있겠지만 문화적인 동질성을 고취시키고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다. 이런 매개체로 창원과의 인연이 어느 지역보다 오래 깃든 최치원을 통한 문화 정체성을 확보해 지역 간 문화적 공감대를 형성해 보자는 것이다.

특히 창원이 최치원의 소요지일 뿐만 아니라 생장지이다는 근거도 밝혀져, 그의 현양사업을 통해 통합정신을 되살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최치원은 창원을 소요하면서 학문 전파와 한시 창작에 몰두하며 창원을 배경으로 한시를 많이 남겼다.

‘바람도 산마루 보드라운 구름 차마 못 흩고/ 햇볕도 언덕머리 푹 쌓인 눈 녹이지 못하네/ 홀로 풍경 읊으니 이 마음 아득한데/ 바닷가 갈매기와 쓸쓸히 벗하네’ 최치원의 봄날 풍경이다.

전문가들은 이 시에서 일컫는 바다는 창원의 합포만으로 짐작되고, 백사장은 월포해수욕장을 일컫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월포해수욕장은 서성동~마산세관 부두 일원에 이르는 2㎞의 백사장과 해안을 따라 길게 소나무 숲이 우거져 전국적으로 유명한 해수욕장이었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1935년 신포동 매립공사로 인해 사라졌다.

최치원과 창원의 문학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창원은 그의 학문과 인격을 존중한 고려·조선시대 문장가와 선비들의 순례지가 됐으며, 그들의 작품이 최치원과 창원의 인연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예향 창원의 자랑이다. 마산시립박물관 앞마당에 이들 13인의 시비를 만들어 최치원 선생의 높은 학문과 정신세계를 기리고 있다.

한정호 경남대 교수는 “최근 들어 군산시에서 ‘새만금 최치원 프로젝트’를 제안하며 문화관광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창원의 역사 속에서 가장 큰 자랑인 최치원 현양사업을 창원시가 주축이 돼 선두주자로 나서 창원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011년 10월 열린 최치원 문화심포지엄을 기획한 이광석 창원문예부흥추진 대표는 “조선조 중기의 문신 심의는 대관제몽유록에서 하늘나라에 문장왕국(시인의 나라)을 세웠으되 천자는 최치원이요, 수상에는 을지문덕, 좌상에 이제현, 우상은 이규보로 삼았다고 할 만큼 고운의 학덕을 천하의 명품으로 꼽았다”며 “앞으로 고운대, 서원곡, 강선대, 돝섬 등 고운의 발자취를 체계적으로 복원하는 한편 그의 학덕을 기리는 기념공원, 월영누각 등 친환경적 사업들이 추진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종훈 기자 leejh@knnews.co.kr

 

 

'문학이 흐르는 길'…관광공사, 5곳 선정


신라의 문장가였던 고운 최치원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운동 월영대(月影臺) 앞바다의 아름다움에 반해 후학을 기르며 이곳에 오래도록 머물렀다고 한다. 이후 월영대는 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문장가들의 순례지가 됐다.

시조시인 이은상은 노비산 언덕을 산책하며 마산 앞바다의 아름다움과 고향의 추억을 ‘가고파’에 담았다.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

날씨가 선선해지니 문향(文香)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한국관광공사는 ‘문학이 흐르는 길을 따라’라는 주제 아래 문학기행을 하기에 좋은 5곳을 ‘9월에 가볼 만한 곳’으로 선정했다. 경남 창원 마산합포구, 전북 부안의 신석정문학관, 경기도 양평 황순원문학관, 강원도 정선 몰운대, 경북 칠곡 구상문학관 등이다.

○문학의 고향 마산합포구

마산합포구 문학여행의 시작점은 창원시립마산문학관이다. 문학관은 시조시인 이은상이 산책하던 노비산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이은상의 호 ‘노산’도 이 산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문학관 앞마당에는 창원시에 연고를 둔 시인들의 문학비가 있다. 문학관에서 바다 쪽을 보면 ‘가고파’에 묘사된 ‘그 파란 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용마산 산호공원, 무학산 만날공원에서 문학비를 찾아보는 것도 좋다. 창원시립마산박물관 앞마당에는 최치원이 머무르던 월영대를 찾아 시를 남긴 문장가들의 시비가 있다. 고려시대 정지상 김극기 안축 등과 조선시대 서거정 이황 정문부 등 13명이 남긴 시다. 창원시청 관광진흥과 (055)225-3695

○부안 신석정문학관

호남정맥의 줄기에서 떨어져 나와 바다를 향해 내달리다 우뚝 멈춰 선 변산, 그 산과 맞닿은 고요한 서해, 전나무 숲길이 깊은 그늘을 만드는 내소사와 울금바위를 병풍 삼아 아늑하게 들어앉은 개암사, 켜켜이 쌓인 해식 단애가 신비로운 풍경을 연출하는 격포 채석강, 드넓은 곰소염전과 소박하고 평화로운 갯마을의 서정…….

전북 부안이다. 부안군 선은리에 가면 지난해 건립된 신석정문학관이 있다. 석정의 묘소는 문학관에서 10~15분 거리인 행안면 역리에 있다.

부안 문학기행의 다음 목적지는 매창공원. 매창은 석정이 “박연폭포, 황진이, 서경덕이 송도삼절이라면 부안삼절은 직소폭포, 매창, 유희경”이라 했다는 기생이자 여성시인 이매창이다. 매창이 유희경을 그리며 쓴 이별가의 절창 ‘이화우(梨花雨)’를 새긴 시비가 매창공원에 있다.

○‘소나기’의 양평 황순원문학관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수능리에는 황순원문학관과 소나기마을이 있다. 작가와 특별한 연고가 없는 이곳에 문학관이 들어선 건 소설 ‘소나기’에 “소녀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대목이 있어서다.

문학관 출입구 왼편에 작가 부부의 묘역이 있고, 문학관 내부에는 작가의 집필 공간과 소장품, 작품과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작가의 생전 모습이 전해주는 ‘황순원의 서재’다. 양평군청 문화관광과 (031)770-2066

○벼랑에서 시를 노래하는 정선 몰운대

산이 높고 골이 깊은 정선을 걷다보면 소리 한 자락이 절로 나온다. 정선 소금강의 몰운대에서 시인들은 절벽과 계곡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산길을 따라 300m 남짓 걸으면 길이 끝나는 곳에 바위와 수백년 된 고목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아래는 깎아지른 절벽이다. 황동규 시인은 듬성듬성 솟은 바위에 걸터앉아 ‘몰운대행’을 노래했다. ‘몰운대는 꽃가루 하나가 강물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엿보이는 그런 고요한 절벽이었습니다. 그 끝에서 저녁이 깊어가는 것도 잊고 앉아 있었습니다….’

황동규 외에도 이인평 박정대 등 여러 시인들이 몰운대의 풍경을 시에 담았다. 계곡과 어우러진 몰운대의 비경은 벼랑 아래에서 보면 더욱 윤곽이 선명하다. 정선군청 관광문화과 (033)560-2363

 

○시인 구상을 만나는 칠곡 구상문학관

경북 칠곡에는 시인 구상(1919~2004)의 문학관이 있다. 서울 이화동에서 태어난 시인이 경북 칠곡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53년. 전후 이승만 정부에 대해 반독재 투쟁을 벌였던 그는 1952년 승리일보가 폐간되자 부인이 의원을 차린 칠곡군 왜관으로 내려와 1974년까지 살며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화가 이중섭은 그의 왜관 집에 머물렀는데 이 무렵 그린 그림이 ‘K씨의 가족’이다.

구상문학관은 2002년 부인이 경영하던 의원 자리에 세워졌다. 문학관 뒤편에 시인의 거처였던 관수재(觀水齋)가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자리하고 있다.

유서 깊은 가실성당과 성베네딕도회왜관수도원, 6·25전쟁 때 벌어진 다부동전투를 기념하는 다부동전적기념관과 가산산성도 가볼 만하다. 칠곡군청 새마을문화과 (054)979-6064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월영대

 

종 목 경상남도 기념물 제125호  

지 정 일 1993.01.08

소 재 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운동 8-4

시 대 통일신라

 

신라 말기의 학자인 최치원 선생이 이곳 합포만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최치원은 자가 해운이며, 시호는 문창후이다. 최치원(857∼?)은 가족과 더불어 이곳에 살다가 신라의 멸망을 미리 알고 합천 해인사로 망명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시고 월영대는 그의 학문과 인격을 존경한 고려·조선시대의 문장가·선비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월영대는 높이 1.2m 정도의 직사각형 보호축대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안에 최치원 선생 추모비가 있다. 추모비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동편 중앙에는 1691년(숙종 17) 최위가 창원도호부로 부임하며 정화하고 세운 유허비가 있다. 


동북쪽에 최치원이 〈월영대〉라고 쓴 3자가 각각 23㎝ 크기의 해서체로 높이 210㎝, 폭 35㎝ 정도의 입석에 새겨져 있다. 입석 측면과 뒷면의 글씨는 마모가 심해 판독하기 힘들다. 남쪽에 〈숭정후신미 칠월 일 부사 최위중수〉라고 쓴 보수비가 있어 1691년(숙종 17)에 보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며 안축 · 정지상 · 정이오 · 이황 · 이민구 등 수많은 문신, 선비들이 이곳을 순례하고 남겨놓은 시들이 《동문선》 〈여지승람〉에 남아 있다.

 

 

 

5. 월영대(月影臺) 

종목 : 시도기념물 제145호 (마산시) (통일신라)

지정(등록일) : 1993.01.08

소재지 : 경남 마산시  해운동 8-4

[설명]

신라 말기의 학자인 최치원 선생이 이곳 합포만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최치원은 자가 해운이며, 시호는 문창후이다. 최치원(857∼?)은 가족과 더불어 이곳에 살다가 신라의 멸망을 미리 알고 합천 해인사로 망명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시고 월영대는 그의 학문과 인격을 존경한 고려·조선시대의 문장가·선비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월영대는 보호축대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안에 최치원 선생 추모비가 있다. 추모비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동쪽에 유허비가 있으며, 최치원이 해서체로 ‘월영대’라고 쓴 돌이 동북쪽에 있다.

 

 

최치원 유적 발굴·복원해 창원의 ‘문화 정체성’ 찾자
월영대·청룡대 등 고운의 흔적 전국서 가장 많이 남아 있어
“市, 유적지 복원·기념관 건립·테마공원 조성 등 적극 나서야”
기사입력 : 2013-07-01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니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하더라.'

중국 시진핑 주석이 지난달 27일 정상회담 환영사에서 한국과 중국은 역사가 유구하다면서 인용한 통일신라 시대 학자인 최치원의 한시이다.

중국 주석이 인용할 만큼 최치원은 한국과 중국의 대표적인 대문장가이다.

통합창원시 출범 3주년을 맞아 통합시의 문화적 동질성을 고취시키고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창원에 많은 유허와 유적이 남아 있는 신라시대 대학자이자 문장가였던 고운 최치원(857~?) 선생 현양사업을 확대 발전시켜 나가자는 제안이 제기됐다.

창원·마산·진해문화원 원장은 1일 본지와의 인터뷰와 고운 선생 유적지 동행 탐방을 통해 이같이 제안하고 자료집 발간, 유적지 복원과 보존사업, 최치원 기념관, 테마공원 조성 등에 창원시가 적극 나서 문화도시 창원의 자긍심을 드높이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3개 문화원은 마산문화원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최치원 현양사업을 공동으로 점차 확대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마산문화원은 최근 최치원 설화집을 발간했으며, 올 9월께 '최치원과 창원'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최치원 유적 자료집 발간도 준비하고 있다. 창원·진해문화원은 회원들을 중심으로 최치원 유적지 탐방 등 선양사업을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최치원에 관한 유허와 유적은 전국 곳곳에서 만날 수 있지만, 창원에 가장 많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가 40세 무렵에 관직을 버리고 자연을 벗삼아 은거하면서 만년을 보낸 곳이 창원이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마산 월영대와 고운대, 진해 청룡대·강선대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월영대는 한국 유학의 연원지이며 시문학의 근원지로 창원에서 가장 유서 깊은 문화재이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창원은 그의 학문과 정신을 흠모하는 선비들의 주요 순례지가 됐고, 학맥과 문맥을 떨쳤던 곳으로 창원을 문창(文昌)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연유로 짐작된다.

이와 함께 최치원의 생장지가 창원이라는 새로운 견해도 나왔다. 흔히 최치원의 출생지는 경주로 알려져 있었다.

문헌설화 '최고운전'과 '구비문학대계'에 실린 구전설화를 바탕으로 최치원을 연구하고 있는 한정호 경남대 교수가 밝힌 것이다.

한 교수는 "최치원은 문창이라는 고을에서 출생했다는 설화가 있는데, 예로부터 창원은 문창리·문창고을(지금의 회원동 일원)이라 불렸으며, 구비문학대계에도 그의 출생지로 '마산 문창고을'·'마산 돝섬'에서 태어난 것으로 거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임영주 마산문화원장은 "중국 강소성 양주시가 지난 2006년 최치원 기념관을 개관해 한국 관광객을 끌어 들이고 있으며, 창원보다 최치원의 흔적이 미미한 부산 해운대와 전북 군산, 충남 홍성 등에서 현양사업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실정이다"며 "문창의 고장인 창원을 전국의 최치원 메카로 부상시켜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창원시의 문화예술정책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종훈 기자 leej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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