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버린 남자 /?

 

  사랑이 야속하더라 가는 당신이 무정하더라

  잡지도 못하고 막지도 못하고 어쩔수가 없더라

  여자이기 때문에 날 두고 떠나가면

  떠나 버리면 정 때문에 나는 어떡해

  날울린 남자 날버린 남자 사랑한게 잘못이더라

  사랑한게 잘못 이더라 ~~


  사랑이 야속하더라 가는 당신이 무정하더라

  잡지도 못하고 막지도 못하고 어쩔수가 없더라

  여자이기 때문에 날 두고 떠나가면

  떠나 버리면 정 때문에 나는 어떡해

  날울린 남자 날버린 남자 사랑한게 잘못이더라

  사랑한게 잘못 이더라~~

 

 

 
 

 

 

 

출처 : 산 울 림
글쓴이 : 산 울 림 원글보기
메모 :

트롯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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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창후 고운 최치원 선생과 합천

합천군 향토사학회(문화유산해설서) 정기철 선생께서 보내준 글에서

 

신라(新羅) 말기의 대학자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다.

서라벌(徐羅伐)에서 본피부인(本彼部人)인 견일(肩逸)의 아들로 857년(문성왕:文聖王19년)에 태어났다. 골품제(骨品制)의 6두품(頭品)으로 신라의 유교(儒敎)를 대표할 만한 학자들을 배출한 최(崔)씨 가문 출신이다. 특히 최씨 가문 가운데서도 이른바 "신라말기 3최"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품 출신의 지식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후세 사람들에 의해 동방학자지종(東邦學者之宗). 동국문학지조(東國文學之租)라 일컬어졌다.

 

#최치원(崔致遠)이 경문왕(景文王) 8년(868년)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唐)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바지 견일(肩逸)은 그에게 "10년 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격려하였다.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 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이후 2년 동안  락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등 많은 작품을 남기는 것을 시초로,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졌다. 특히 문명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879년 황소(黃巢)의 란을 토벌한 제도행영병마절도사(諸道行營兵馬節道使) 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문명을 날렸다. 88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간 당나라에 머물고 있는 동안 고운(顧雲). 나은(羅隱) 당나라의 문호(文豪)들과 사귀어 그의 글제주는 더욱 빛나게 되었다.

 

#29세 때(885년) 귀국하여 헌강왕(憲康王)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에 임명되었으나 그 직위는 매우 낮은 것이어서 처음부터 당나라에서 터득한 지식과 경륜을 실체 정치무대에 펼치기는 어려웠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세습(世習)신분이 6두품 이었던 데서 오는 제약(制約)이었다. 바로 여기에 최치원이라는 한 인간이 고민과 그 정치적 시회적인 활동의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문한(文翰)을 담당하는 직책상 고도의 문장력과 뛰어난 국제감각(國際感覺)이 요구되는 대당 외교문서(對唐外交文書)를 가위 도맡아 작성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 신라(新羅)의 정치를 주도하고 있던 진골(眞骨) 귀족세력은 문한기관(文翰機關)에서 활동하고 있던 최치원(崔致遠)과 같은 6두품(頭品) 출신자를 시기하여 용납하지 않았다. 어러한 상황아래 그는 중앙관부(中央官府)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외관(外官)으로 밀려나서 890년(眞聖女王 4년)에 대산군(大山:현 泰仁) 태수가 되고, 이어 부성군(富城:현 瑞山) 태수가 되었다. 그 후 당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가기도 했다.

  38세 때(894년), 망국의 징조가 쌓여가자 나라를 구하고자 진성여왕(眞聖女王)에게 시무책(時務策) 십여조(十餘條)를 올리니 여왕이 가납하고 아찬(阿澯: 정6품)의 벼슬을 내렸으나, 그의 개혁안은 진골정권에 의해 채택되지 않았으며, 도리어 시기와 비난 속에서 소외감과 좌절감만 맛보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천령군(天嶺: 현 함양) 태수로 밀려나게 되었다. 마침내 898년(孝恭王 2년)11월에 어떤 사건으로 면직되었다. 이것이 당시 신라사회(新羅社會)의 모순된 골품제(骨品制下)에 있어서 그에게 주어진 한계점(限界点)이 었다.

  모든 일이 어지러워 뜻을 펼 수 없음을 스스로 한탄하였다. 벼슬은 그만 두고, 강해변(江海邊)을 소요하면서 누대정사(樓臺精舍)를 지어 송죽(松竹)을 심어 놓고, 글씨 쓰기와 사서공부에 힘쓰는 한편, 풍월(風月)을 옲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니, 경주의 남산. 강주(剛州: 현 의성義城)의 빙산(氷山). 지리산의 쌍계사. 마산의 별서(別墅). 합천의 청량사(淸凉寺)와 해인사(海印寺)는 그의 놀던 곳이다. 이런 곳들은 대부분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승지(名勝地)가 되어있어, 지금도 고운(孤雲)을 숭모하는 정각과 고결한 인격과 높은 학문에 관한 전설이 풍성하다.

 "신당서예문지(新唐書藝文志)" 에 말하기를 최치원(崔致遠)의 "사육집(四六集)" 1권과 "계원경필(桂苑耕筆: 자신의 문집)"  20권이 있다. 하였고, 그 주(註)에 말하기를 최치원은 신라 사람으로 빈공 (賓貢) 급제(及第)하여 그 이름이 상국(上國) 즉, 당(唐)나라에 널리 알려졌으며 문집 30권이 있어 세상에 남아있다 하였다.

 

#세상의 시비와 시끄러움을 피하여, 마침내 899년(효공왕:孝恭王 3년) 에 동북형 현준(賢俊)을 의지하여 가야산(伽倻山)을 은둔처(隱遁處)로 삼고 "솔처자입가야산: 率妻子入伽倻山"한 최치원은 결국 여기서 평온한 안착지(安着地)가 될 수 없음을 느꼈다. 당시해인사에는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의 복전(福田)이 되어 있던 관혜(觀蕙)와, 왕건(王建)의 복전이 된 희랑(希朗)이라는 두 화엄사종(華嚴司宗)이 있어서 가기 파당을 형성하여 서로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싸움은 단순한 종문(宗門) 내의 파벌싸움이 아니라, 견훤과 왕건 같은 정치세력과 연결된 정치싸움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이때 그는 평소에 다가올 새 사대의 역사를 이끌어갈 인물로서 주시(注視)하고 있던 왕건의 복전이 된 희랑과는 서로 지기(志氣)가 통하는 각별한 사이였다. 그러기에 그는 고려 태조(高麗太粗)의 연호인 천수(天授)를 따라 희랑에게 시(詩)를 지어주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이상 찾아갈 곳 없는 절박한 막다른 골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는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숲 속에 관과 신발을 벗어 둔 채 어디론가 가버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신선(神仙)이 되어 가버렸다고 하나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고, 아마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 것만 같다. 그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으나, 그가 지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 의 모두에 천우(天祐) 5년(1090년) 10월이란 연대가 나오는 것을 보면 908년(효공왕: 孝恭王 12년) 10월까지는 생존해 있었다는 것이분명하고 또 그가 희랑에게 주는 시를 고려태종 연호인 천우[天授)를 따서 지은 것이라 본다면 918년(고려태조 1년) 까지는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 그의 묘가 충청도(忠淸道) 홍산(鴻山) 에 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또 홍산(鴻山)은 가야산(伽倻山) 한 기슭의 이름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확실성이 없다.

  끝으로 여기서 崔致遠이라는 한 인간을 통해 新羅말 후삼국(後三國)의 전환기에 처하여 역사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끝없이 고민하면서 자신의 모든것을 가야산중(伽倻山中) 에 묻어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을 수 없었던, 당대 최고의 한 지성인(知性人) 의 고뇌(苦惱) 에 찬 불행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高麗建國 후, 崔致遠의 문인들이 조정에 들어가서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들이 많았다. 1020년(현종:顯宗 11년) 崔致遠은 우리 나라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문묘(文廟) 에 배향(配享) 되었다. 高麗建國 애 밀찬(密贊) 한 공을 가히 잊지 못할 것이다. 하여 내사령(內司令 : 종 1품) 에 중직하고, 13년는 문창후(文昌侯) 로 추봉하였다. 

  우리 합천군 가야면 일대에는 고운(孤雲) 이 처음 거주한 매화산(梅花山) 절경 아래의 청랑사(淸凉寺) 와, 해인사(海印寺) 에 이르는 이른바 홍유동(紅流洞) 10리 계곡에는 고운(孤雲) 이 이름지었다고 전해지는 자필암(물맑을자筆巖). 취적봉(吹笛峰). 광풍뢰(光風瀨). 제월담(霽月潭). 첨석대(疊石臺). 낙화담(落花潭). 분옥폭(噴玉瀑). 학사대(學士臺) 등에는, 고운(孤雲)을 추모하는 감회(感懷) 깊은 많은 유적들이 곳곳에 산제해 있다.

  최근  中國에서는, 羅. 唐 역사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 孤雲이, 자존심 강한 중화사회(中華社會)에서 1100년을 뛰어넘어 재조명 재평가되고 있다. 그 배경에는 "한. 중 경제협력(韓. 中經濟協力)" 이라는 실리적 동기가 자리잡고 있다. 1100년 이전에 고운(孤雲)이 唐나라에서 17년간 머무 도시 중 중심부였던 장쑤성 양주어시(江蘇省楊州市) 는 최근 들어 그의 흔적들을 빠짐없이 문화. 관광상품(文化. 觀光商品)으로 만드는 중이며, 현지 학자들은 체계적인 연구로 힘을 보태고 있다.

  말당(末唐) 시기에 신라(新羅)와의 문화교류에 앞장섰던 고운(孤雲)이 현대에 들어서 한. 중경협(韓. 中經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는 현실은 지난해에 양주어시에서 열린 [2001년 중. 한 경제문화 교류주간] 의 각종행사에서 극명히 들으나있다. 이 기간에 개최된 [최치원 학술토회 : 崔致遠 學術硏討會] 에는 양국 崔致遠 연구학자 47명이 참가해 다양한 연구결과와 주장들을 쏜아냈다. 이곳 건물 중 하나로 孤雲이 집무를 봤던 연화각(延和閣) 에는 그의 [각종유물을 전시한 紀念館] 이 입주해 있다. 뿐만 아니고 孤雲의 영정을 모신 7층 영수탑과 그 옆에 [崔致遠 동상] 이 서 있다.

  孤雲과 中國人 자매 혼령이 사랑을 나눴다는 애릇한 전설을 전하는 "쌍년분 : (쌍女墳)" 역시 눈길을 끄는 유적지이다. 시 당국에서는 이 고분을 돌보는 전담사무소까지 두고, 문화 관광지로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고 한다. 양저우(楊州)시 당성기념관내에는 고국인 우리나라에도 없는 [최치원 사료관 : 崔致遠 史料館] 이 있다.

  이러 듯 中國현지에서는 崔致遠을 재조명하고, 다시 평가하는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고 한다. 孤雲이 唐나라 유학시절 주름잡았던 中國 장쑤성(江蘇省) 양주어(楊州) 시 일대가 그 진원지이다. 韓. 中 임물학자등의 공동관심사로 떠오른  孤雲에 대한 역구 열풍과 관련 유적이다. 전설을 발굴하여, 이를 文化 및 觀光商品化 하는 현지의 노력은 대단한 붐을 이러키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합천군(陜川郡)의 현실은 어떤가? 한 마디로 무관심 그대로다. 국내에서도 가야산(伽倻面)의 청량사(淸凉寺) 및 홍유동(紅流洞) 계곡(溪谷)과 해인사(海印寺) 일대가 崔致遠의 최대 유적지로 손꼽을만함에도,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름난 석벽제시(石璧題詩) 에 안내문조차 없다. 관관객들도 해인사 가기 바빠 이는지 모르는지 그냥 통과해버리는 게 지금의 실정이다. 과거 군 문화원에서 간행한 "가야산십구명소(伽倻山十九名所)" 도 바로 잡아야 한다. 터무니없는 내용으로 학계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것을 왜 모르느가? 그렇다고 대단한 예산이 소요되는 일도 아닌데, 귀중한 관광자료(觀光資料)  를 지니고도그 가치를 모르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다. 타처에서 이만한 관광자료가 있으면 그냥 두겠는가?

 예를 들자면, 국내에서도 부산(釜山) 해운대(海雲臺) 에는 동상(銅像) 이 있고, 충남(忠南) 서산시(瑞山市)에는 중심로를 "고운로"(孤雲路) 라 이름짓고, 이웃 함양군(咸陽郡) 에서는 상림(上林) 일대를 정화하여 함양역사 인물공원(咸陽歷史 人物公園) 을 조성해서 최상위에 고운(孤雲)의 흉상(胸像) 을 모시고 있다.

  홍유동구(紅流洞口) 의 [둔세비 : 遁世碑] 를 비롯해서, 치인리(緇仁里) 에는 孤雲 이 터에서 살랐다는 [고운선생구저은일지지 : 孤雲先生構邸隱逸之地] 라고 새긴비석이 있고, 기타 수많은 유적과, 입전서사물(口傳敍事物) 에 관한 연구도 시급하다. 역사적(歷史的) 사실에 근거하여 생성되고 전송되면서 꾸며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진실성과 민중(民衆) 의 역사관(歷史觀)과 세계관도 투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전하는 구비전승물(口碑傳承物)을 연구 대상으로 하여 그 구조와 의미를 천착(穿鑿) 할 필요가 있다.

  합천군(陜川郡)에서도 이렇게 소중한 사적이나 기념물을 사장시키지 말고, 사적지인 농산정. 학사당, 가야서당 등 부동산 등기소유주와 협력하여 작은 규모라도 유(有). 무형(無形) 간에 전수(傳授) 되어 온 귀중하고 풍부한 역사적(歷史的) 인 자료를 수집해서, 홍유동구(紅流洞口) 에 종합적인 사료관(史料館)을 건립하고, 해인사(海人寺)와 함께 관광자료(觀光資料) 로 개발 상품화할 수 있는 방안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기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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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당 2009년 기축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태국방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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