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선하 정희태이사 촬영]서울강남 야경

 

[사진-매산 김해진이사 촬영]부산영도구 태종대 태종사 전각과 경내주변 풍경

 

 

 

 

 

 

 

 

 

 

 

 

 

 

 

 

 

 

 

 

 

 

 

 

 

 

 

 

 

 

 

 

 

 

 

 

 

 

[가고싶은 산사-행원전재만이사]팔공산 은해사 6월 풍경

 

 

대한불교 천태종 대구 동대사(東大寺)의 화려한 빛깔의 연등(운주 이재구 사진방)

 

 

 

 

 

2015년도 제5회 한국불교영상포교대상 수상작품 공모

  2015년도 제5회 한국불교영상포교대상 수상작품 공모

                                     -사찰홍보, 생태환경, 행사기록, 해외 불교유적기록부문등 4부문

 

한국불교청소년문화진흥원(총재:박용열)산하 단체 영상포교자료원(원장 최평열)은 창립 제34주년을 맞아 아래와 같은 요령으로 제5회 한국불교영상포교대상 수상작품을 공모 시상합니다.

1.행사명:제5회 한국불교영상포교대상

2.주  관:불교영상포교자료원

3.주  최:한국불교청소년문화진흥원

4.공모기간:2015년 5월6일-10월20일

5.공모구분:1)사찰홍보기록부문. 2)생태환경기록부문 3)해외불교유적기록부문 4)불자행사기록부문

6.시상구분:상장(상패)과 원고료

7.원고제출방법:사무국 메일:kbm0747@hanmail.net

8.심사위원:전회 수상자와 영상매체 종사자 등18명으로 구성 심사함

9.제출작품의 활용:저작권은 작가본인에게 주며 우리 단체에서는 작품의 활용권(10년)만 행사함

  수상자 통보시 저작권관리 동의서를 징구할 예정임

10.심사결과 발표:2015년 11월5일

11.기타사항

 1)타 기관의 수상작품으로 판명될 시에는 수상을 취소합니다.

 2)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작품을 응모한 경우는 수상작이 될 수 없습니다

 3)수상작품이 포교목적으로 저작권활용기간중에 이용될 경우 이는 저작권료를 별도 지불하지

   않으며 상업적 목적으로 활용될 시 작가와의 협의를 통해  지불합니다.

4)수상작품의 추천은 누구나 할 수 있으며 건당 사진 4매이상이어야 합니다

 (예-신흥사 방생법회 기록-1. 행사전경, 2.방생하는 아동 3.방생하는 보살님들 4. 물살을 거스르는 고기들)

 

                                                2015년 5월 6일

                     한국불교청소년문화진흥원 총재 초연/이사장 송운

                                  불교영상포교자료원 원장 최평열

 

 

 

 

 

 

 

[가고싶은산사-글과 사진 전재만이사]대구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

2015년6월 6일 찾은 대구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 좌상 입니다.

 갓바위로 알려진 기도처로 유명하여 연중 기도객들이 많이 찾는 팔공산 갓바위

석조여래 좌상 온화한 모습이 정성이 깃든 소원을 다 들어 줄것 같은 모습입니다.

 

약사신앙은 약사여래의 본원(本願)에 의거하여 전개된 대표적인 불보살신앙 가운데 하나이다. 동방의 정유리세계(淨溜璃世界)를 교화하는 부처님인 약사여래는 보살도를 닦을 때 열두가지의 크고 거룩한 원을 세워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구하는 바를 다 이루게 하여 부처님이 되신 분이다.

약사여래의 본원 공덕과 그 이익을 설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약사여래경」을 달마급다가 번역하여 유통시킨 이래 현장 삼장과 의정 삼장 등의 번역본이 이루어졌고, 이 후 동북 아시아 불교권의 중요한 소의경전(所依經典)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이 통일된 후 8세기 무렵부터는 국가적인 외호와 민간 신앙이 함께 어우러지는 신라 사회의 보편적인 신앙으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 당시 크고작은 여러 사찰에서 약사불을 모시는 약사 도량이 개설되고, 왕이나 장군의 무덤에 12지신상을 새긴 지석(支石)을 세우는 등 토속 신앙과 결부시키려는 노력도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경주 분황사 약사전과 김유신(金庾信)묘의 지석 등이다. 이러한 국가적이고 민간의 보편적인 신앙이었던 약사신앙은 현대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곧 선본사의 갓바위 부처님을 찾는 현대 한국 불자들의 한 신앙형태인 것이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되어 국가적으로 공인된 최초의 기록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의 일이다. 이어서 백제 침류왕 원년(384)과 신라 법흥왕 14년(527)에 잇달아 불교가 공인되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모두 국가적으로 불교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삼국의 불교는 급속도로 발전하여 신라의 불교가 들어온 지 채 100년이 넘기전에 이미 우리 나라 불교의 학문적 수준이 중국을 넘어서게 될 정도였으며, 7세기 중엽을 지나면서부터는 우리나라의 스님들이 중국불교에 적지않은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불교학의 발달과 마찬가지로 삼국 시대 불교 신앙의 모습도 변해갔다.

초기에는 국가 중심적인 구복신앙이 주류를 이루게 되고, 중기 이후에는 국가적 상황과 이름난 스님들의 교화 영향에 따라 현실구복과 내세왕생, 국태민안을 주로 하는 관음.정통.미륵신앙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 관음 신앙은 당시의 일부 스님들의 신행 기록이 뚜렷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의상대사의 낙산사(落山寺) 창건 설화는 관음신앙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미타정토신앙은 삼국 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신앙으로 미륵신앙과 함께 유행하여 민간에도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다. 미타신앙에 대해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나 있는 몇가지 기록들이 그 전거(典據)가 된다. 대표적인 것은 원효대사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장엄스님이 원효대사에게 수행법을 배워 정토에 왕생하였다는 것과 원효스님이 머리를 기르고 마을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하였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신라의 미륵신앙은 통일국가를 이루려는 신라 국민 모두의 바람을 미륵 부처님의 가피로 이루려는 것이었다. 곧 자장율사가 경주 황룡사에 금동으로 장육존상을 조성하여 모시고 한편으로는 구층탑을 세워서 통일국가의 민족적 염원을 미륵부처님의 가피로 이루려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신라 국민들과 왕실의 노력으로 통일을 이룬 신라의 불교 신앙은 그 형태에 있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이 다름아닌 약사 신앙인 것이다.
8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약사불의 조성은 당시 신라사회 민중들의 보편적인 신앙형태일 뿐만 아니라 국가 왕실의 중요한 신앙형태이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약사 신앙은 선덕여왕 때 밀본(密本)이라는 스님이 「약사경」을 읽고 왕의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를 통일 신라때 경주에 위치한 대표적인 사찰중의 하나인 분황사에 거대한 크기의 약사여래입상을 모신 것, 그리고 통일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둘러싸고 있는 남산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사방불과 약사여래입상, 또한 신라 왕실이나 장군의 무덤 주변에 새긴 12지신상의 지석(支石)등이 약사 신앙과 관계된 유적이다. 통일 신라의 약사 신앙은 앞에서 살펴본 「약사경」에 나타난 각종 형태의 신앙을 골고루 수용하였다. 약사유리광여래가 보살도를 행할 때 세운 12대원에 근거한 현실구복.제병.멸재의 신앙과 통일을 이룬 국가에서 더 이상 국난이 없을 것을 기원하는 호국신앙.정토신앙 등이 고루 포섭된 약사신앙이 통일신라의 형편에 꼭 들어맞았을 것이기때문이다.
그래서 위에서 열거한 신라 특유의 약사신앙 형태들이 남아 전하는 것이다.

 

 

 

 

 

 

 

 

 

 

팔공산의 남쪽 봉우리 관봉(冠峰)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불 좌상으로서, 전체 높이는 4m에 이른다. 관봉이 곧 우리말로 '갓바위'이므로 흔히 '갓바위부처님'이라고 부른다. 또 머리에 마치 갓같은 판석(板石)이 올려져 있기에 그렇게도 부른다. 관봉은 인봉(印峰).노적봉(露積峰)과 함께 팔공산의 대표적 봉우리로서 해발 850m의 고봉(高峰)이다. 그래서 이 곳에서는 팔공산의 서남쪽이 모두 두루 조망(眺望)된다.

이 부처님은 화강암 한 돌로 만든 것인데, 몸뿐만 아니라 대좌도 역시 한 돌로 되어 있다. 불상의 광배(光背)는 없지만 뒤쪽에 마치 병풍을 친 듯 기다랗게 바위가 둘러져 있어 혹시 이 자연 바위를 광배로 삼았기 때문에 따로 광배를 만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머리는 소발에 육계가 큼직하고 그 위로 두께 15cm정도의 흡사 갓모양을 한 얇은 바위가 얹혀졌다. 바위 아랫면에는 육계에 맞닿는 곳에 둥근 구멍을 파서 육계에 맞도록 하였으며, 웃면 가운데는 같은 식의 둥근 구명을 도드라지게 하고 그주위에 화판(花瓣)을 조각했다. 그래서 어느정도는 인공적 조각임을 느끼게 한다. 얼굴은 양쪽 볼이 두툼하게 되어 있는 등 비교적 둥글고 풍만한 편이다. 입술은 굳게 다물어 대체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이목구비가 조화스럽게 잘 표현되어 있다. 이마 한 가운데는 백호(白毫)가 둥글게 솟았고, 오똑한 코 아래의 인중도 두드러지고 있다. 두 귀는 길게 양쪽 어깨에까지 늘어졌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두 어깨는 반듯하고 넓어 당당한 신체와 잘 어울리고 있다.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아래로 향하고 있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과 비슷한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이 수인은 석굴암(石窟庵) 본존불의 그것과 양식상 흐름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왼손은 결가부좌한 왼쪽 발 부근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해 약합(藥盒)을 올려놓았다.

불상에 표현된 불의(佛衣)는 통견(通肩)인데 두 팔을 거쳐 두 무릎을 덮고 대좌 아래로 흘러내려 있으며, 불의의 옷주름을 표현한 선각(線刻)이 매우 유려하다. 그리고 가슴 앞에는 속옷의 일종인 승가리(僧伽梨) 혹은 군의(裙衣)의 띠매듭이 보인다. 불상의 뒷면에는 옷의 표현이 없고 그냥 평면으로 되어 있다.

대좌는 신체에 비해 작은 편이다. 대좌 윗부분에는 길게 입은 옷의 끝자락이 엎고 있는데 이같은 대좌 형식을 상현좌(裳懸座)라고 한다. 이것은 팔공산 부근에 있는 군위(裙衣) 삼존불 가운데 본존불의 대좌형식과도 유사하다.

이 갓바위 부처님은 절에 전하는 바로는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수제자인 의현대사(義玄大師)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638년(선덕왕 7)에 조성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전체적 양식으로 보아 8~9세기 작품으로 보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정설이다. 현재 보물 제 4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불상의 학술상 정식 명칭은 '관봉석조여래좌상'. 이름에서 굳이 약사불인 것을 밝히지 않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간 이 부처님의 명칭에 대해 미륵불, 아미타불 등 이론(異論)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듯이 왼손에 보면 약합이 있는 것이 뚜렷하다. 또 옛날부터 이 부처님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약사여래로 생각하고 있었다. 단순히 전하는 말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근거 없이 전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리고 어쨌든 손위의 약합이 분명한 이상 앞으로는 약사여래로 부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현재 갓바위 부처님 앞에는 약 80평 가량 널찍하게 터가 닦였고, 바닥에 돌이 깔리고 주위에는 철제 난간이 둘러쳐져 있다. 또 그와 함께 선본사에서 올라오는 길이 좀 더 넓혀지고 계단과 철제 난간이 많이 보완되었다. 그래서 예전에 비해 한결 기도드리기 편하게 되었다.


신자(臣子)가 정성을 쌓으매 구하는 것은 꼭 이루어질 것이며, 부처와 천신께서 약을 주시니 병이 낫지 않음이 없으리다. 이에 붉은 정성을 다하여 가만히 도우심을 바라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태상왕께서 해가 바뀔 때부터 병에 시달리셨다가, 저번에 하늘의 도우심을 받아 잠시 차도가 있었습니다. 건강해질 희망이 있다 하여 놀라운 기쁨이 평시보다 배가 더하였었는데, 나았다 더했다 서로 뒤치니,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나이다. 중생들의 생각은 대개 질병만을 걱정하나이다. 장년(壯年)의 때라도 오히려 위태롭고, 하루를 넘어도 벌써 괴로운데, 하물며 70세의 노쇠기에 다 석 달이 넘는 오랜 병이겠습니까. 좋은 의술이 없음을 탄식하고, 부처님의 함께 의탁하려 합니다.

듣자오니 석가모니께서 경을 설하실 때에 특별히 약사여래의 발원이 깊은 것을 말씀하시되, "맹세코 병고에 신음하는 이를 구제하려고 손바닥에 바리를 들고 다닌다." 하였으니, 부처께서 어찌 헛말을 하시겠습니까. 내가 이에 징험(懲驗)합니다. 이에 스님들을 모아 법회의 자리를 베풉니다. 천명의 합장 정진으로 백억 신(身) 부처님의 돌보심을 얻고자 합니다.

엎으려 원하옵건대, 부처님께서 태상왕이 여러 해 동안 귀의한 간절함을 어여삐 여기시고, 소인이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정성을 생각하시와 큰 자비를 내리어 본래의 서원을 어지기 않으시와, 우리 태상왕으로 하여금 몸이 경쾌하고 기운이 순하여서 모든 병의 뿌리를 갑자기 녹여 없애며, 음식이 맛있고 잠이 편안하여 길이 만년의 수명을 누리게 해 주시옵소서.

-「동문선(東文選)」제113권.
<정릉행태상왕구병약사정근소(貞陵行太上王救病藥師精勤梳)>

조선초기의 대학자 변계랑(卞季良,1369~1430)이 쓴 <정릉에서 태상왕의 병을 구하고자 약사 정근을 거행하는 글>의 내용이다.
숭유억불을 국가의 기본 시책으로 내세운 조선 왕조에서 약사불에게 국왕의 치병과 장수를 기원하는 애틋한 글이다. 유학으로 무장하고 불교를 등한시했던 당시 사람들에게도 약사불은 치병을 위한 귀의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약사불은 동방의 정유리세계(淨流璃世界)에 머물며 중생의 질병고를 치료하는 대의왕불(大醫王佛)이다. 이 부처님은 12가지 커다란 원을 세워 중생들의 온갖 고통을 소멸시킬 것을 맹세하였는데, 특히 중생의 질병에 가장 큰 주안점을 두었다.12가지 대원 가운데는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대승(大乘)의 가르침에 편안히 머물게 하거나 폭군의 악정에서 벗어나 사회적 부조리나 강도(强盜) 등의 해악을 면하게 하고, 기아(飢餓)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등의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여러 발원과 역할은 대승불교의 불보살들에게서 보편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섯 번째의 '일체의 신체장애자로 하여금 그 장애가 완전히 회복되도록 하는 서원'과 일곱 번째의 '온갖 질병을 다 없애고 몸과 마음이 안락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도록 하는 서원'이 약사불을 대표하고, 또 이기능이 생로병사에 시달리는 중생들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약사신앙이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유행하고 있었다. 앞에서 살펴본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밀본법사(密本法師)의 영험담과 함께 다음과 같은 김양도에 관한 일화는 신라 시대의 약사신앙을 잘 보여준다.

승상(丞相) 김양도(金良圖)가 어릴 때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입이 붙어버리고 몸이 뻣뻣해지더니 말도 못하고 몸도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었다. 집안 식구들은 귀한 아들이 석상처럼 굳어진 데 놀라서 야단법석이었다.
그런데 김양도가 가만히 보니 큰 귀신 하나가 작은 부하 귀신들을 거느리고 집안으로 들어와서는음식이란 음식은 다 맛을 보는 게 아닌가. 또 푸닥거리를 하러 온 무당이 굿을 할라치면 귀신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 욕을 해대는 통에 무당들도 쫓기듯 가버리는 것이었다.

김양도가 이런 사실을 알리고 싶어도 입이 붙어 말을 할 수가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김양도의 아버지는 무당굿을 해도 소용이 없자 이번에는 법륜사의 스님을 초청해서 불경을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스님이 경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곧 큰 귀신이 나타나 부하 귀신들에게 쇠방망이로 스님의 머리를 내리치게 하였다. 쇠방망이를 맞은 스님은 피를 토하여 죽고 말았다.

김양도의 아버지는 집에 큰 귀신이 붙은 것을 알고 비로소 밀본법사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사람을 보내 청했더니 곧 오겠다는 전갈이 왔다. 밀본이 오기로했다는 말을 들은 귀신들은 아연질색했다. 부하 귀신들은 겁에 질려 수군거렸다.
"밀본법사가 오면 우리가 불리할텐데 지금이라도 빨리 피하는게 좋지 않을까?"
그러자 큰 귀신이 눈을 부라리며 윽박질렀다.
"밀본이라는 자가 도대체 뭔데 너희들은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느냐? 제 아무리 신통력이 있다해도 내 앞에서는 어림없다."

귀신들이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사방에서 갑옷을 입고 한 손에는 긴 창을 꼬나잡은 대역신(大力神) 여럿이 나타나더니 귀신들을 붙잡아 꽁꽁 묶어 버렸다. 그 뒤를 이어 수많은 천신들이 나와서 공손이 두 손을 모으고 둘러서서 기다리는데 마침내 밀본법사가 도착했다.

김양도는 그 자리에서 병이 나아 붙었던 입이 열리고 굳었던 몸이 풀렸다. 김양도가 그 동안 자기가 본 일을 낱낱이 얘기하자 모두들 놀라며 새삼스럽게 밀본을 우러러 보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김양도는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어 흥륜사에 미륵상과 좌우보살상을 만들고 금색 벽화를 그려넣는 등 일생 동안 부처님 받들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가고싶은 산사-행원 전재만]함월산 기림사전각과 경내주변 풍경

2015년 5월 31일 경주 왕의 길을 걸으면서  지나게 되는 함월산 기림사 풍경입니다.

처름 가본 기림사 사찰이 매우 크고 기림사의 자랑 삼천불전 건물은 웅대한 느낌으로 다가오고

보물로 지정된 대적광전의 고색 찬연한 건물도 매우 큰 느낌이 들었습니다.

 

보물로 지정된 대적광전(보물833호)

 

대적광전은 기림사의 본전으로 신라 선덕여왕때 처음 지어졌으며 그 뒤 8차례나 다시 지어졌다. 1997년 해체공사 때 종도리에서 4종의 묵서가 발견되었다.  

이 묵서에 의하면 1629년에 제5차중수가 있었고, 1755년에 개조중수가 있었고, 1785년에 6차 중창이 있었으며, 1978년에 제7차 중수가 있었다.

최근 1997년에는 정부의 문화재 수리비용으로 제8차 완전 해체 수리가 이루어졌다. 건물은 정면 5칸 , 측면 3칸의 규모이며 배흘림 기둥의 다포식 단층 맞배지붕이 단정하다. 겉모습은 본전 건물다운 웅장함을 갖추었으며, 내부는 넓고 화려하여 장엄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전면에는 모두 화려한 꽃창살 문을 달았는데 색이 바래 화려한 꽃창살 조각의 느낌이 포근히 전해진다.

넓은 전각 안은 장엄한 맞배식 건물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며, 단청이 퇴색하여 느낌이 더 고색 창연하다.

대적광전(大寂光展)은 주불이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이다. 적(寂)은 번뇌를 멸한 고요한 진리의 세계, 니르바나의 세계를 말하며, 광(光)은 그 세계에서 나오는 참된 지혜가 온 우주를 찬란히 비춘다는 것을 말한다

 

삼천불전

 

 석가모니 부처님이 생전에 제자들과 함께 수행했던 승원 중에서 첫 손에 꼽히는 것이 기원정사

와 죽림 정사이다. 특히 기원정사는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23번의 하안거를 보내신 곳이다.

그 기원정사의 숲을 기림(祇林)이라 하니 경주 함월산 기림사는 그런 연유에서 붙인 이름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의 본산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643년(선덕여왕 12) 천축국(天竺國)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 임정사(林井寺)라고 하다가 원효(元曉)가 확장, 중수하고 기림사로 개칭하였다. 1863년(철종 14) 본사(本寺)와 요사(寮舍) 113칸이 불타 없어졌다. 당시 지방관이던 송정화(宋廷和)의 혜시(惠施)로 중건한 것이 현 건물이다. 다행히 《경상도영주제명기(慶尙道營主題名記)》 《동도역세제자기(東都歷世諸子記)》 《부호장선생안(府戶長先生案)》 등의 중요한 문적(文籍)과 근세조선 역대 왕의 어필(御筆) 등이 병화(兵火)를 입지 않고 보관되어 있다.

이 밖에 목탑지(木塔址), 3층석탑, 오백나한상(지방유형문화재 214) 등이 있고, 보물로 대적광전(大寂光殿:보물 833),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보물 415), 삼신불(三神佛:보물 958), 복장유물(보물 959) 등이 있다.

 

약사전

 

 

 

삼천불전

1817년(순조17년)에 초의선사가 기림사 근방에서 나는 옥돌로 천불을 조성해 모셨다가 1818년(순조18년)에 해남 대둔사로 이운을 해서 대둔사 천불전에 모셨다. 현재의 건물은 최근(1990년경)에 지어진 전각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 108평의 거대한 크기이다. 안에는 삼천불이 모셔져 있다. 이는 항상 어디에서나 부처님이 계신다는 사상에서 유래된 것으로 과거 천불, 현재 천불, 미래 천불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삼천불전

 

 

창건 설화

먼 옛날 범마라국 임정사에 오십 년간 수도하면서 천안통과 숙명통 그리고 타심통을 얻은 도인 광유성인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전생이야기를 했으니 "내가 전생의 부처님의 제자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에, 파사익 왕의 세 시녀는 늘 꿀물과 우유로 부처님과 제자들을 공양 올렸다.

제자들 중에는 인물이 출중한 스님이 한 분 계셨는데, 시녀들은 부처님 다음으로 공양하다가 그만 공경이 사랑으로 변해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었다. 스님은 여인들의 유혹을 제도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산 속으로 들어 가 버리셨다.

그러나 스님은 아름답고 상냥한 세 여인을 잊지 못해 번민하다가 결국 도를 이루지 못한 채 입적하고 말았다. 나는 그때 그 스님의 도반으로서 먼저 도를 이루는 사람이 제도키로 약속을 했었다.

내 이제 금생에 인연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도반인 그 스님과 세 시녀를 제도하려 하니 나와 숙세로부터 인연이 있는 이들을 누가 이곳으로 안내하겠느냐?"

그때 승열 스님이 말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스승이시여!"

"오 장하구나, 너는 아라한과를 얻었으니 능히 할 수 있으리라.

그 스님은 금생의'수다라'라는 대국의 왕이고 왕후와 후궁은 전생의 시녀이니라."

"그럼 한 명의 시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곧 왕의 아들로 태어나 스스로 여기로 올 것이니라.

수다라 왕국은 아직도 불법이전해지지 않았으므로 세명을 한번에 모셔오기 어려울 테니 , 먼저 후궁인 월해부인을 인도토록 하여라"

승열 스님이 수다라국에 도착했을 때 ,왕은 마침 500궁녀를 데리고 강가를 거닐다가 숲속에서 잠이 들었다.

산책을 즐기던 궁녀들은 좌선에 든 스님을 발견하고는 이상한 모습에 의아한 눈길을 주고받다가 가까이 다가와서 물었다.

"어디서 오신 누구신지요?"

"나는 범마라국 임정사에서 온 승려입니다."

스님은 궁녀에게 스님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불법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었다.

이때 잠에서 깨어 이를 목격한 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소리쳤다.

"너는 누군데 나의 궁녀를 꼬이느냐? "

왕은 승렬 스님의 목에 칼을 대고는 인생의 참 진리가 무언지 알려주겠다며 불개미 집을 헐어서 스님의 몸에 풀어놓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불개미는 스님의 몸을 물지 않고 모두 흩어져버렸다.

이것을 본 왕은 크게 놀라면서 예사로운 분이 아닌 줄 알고 스님을 궁중으로 정중히 모셨다.

승열 스님은 1년간 궁중에 살면서 왕과 왕비 그리고 후궁들을 교화하였으며 수다라 왕국의 최초의 절 범승사를 세웠다.

그리고는 며칠 후 승열 스님은 왕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임정사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떠날 차비를 하면서 월해부인을 모시러 온 뜻을 밝혔다.

왕은 보내기 아쉬웠으나 월해부인이 선뜻 나서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후 월해부인은 광유성인의 제자가 되어 물긷고 차를 다리며 열심히 정진하였다.

어느 날 광유스님은 승열 비구에게 다시 수다라국에 가서 왕과 왕비를 모셔오도록했다.

승열 스님이 수다라국에 도착하니 , 왕과 왕비는 물론 지난번에 귀의한 십여명의 제자와 신도 및 백성들까지 영접하였다.

"월해부인은 대왕이 오셔서 함께 공부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왕이 도착하기도 전에 도를 얻고 사바의 인연을 마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기가 막힌 듯 슬피 탄식했다.

"오, 참으로 세상은 허망하군요. 대왕이시여! 이 세상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선지식이시여, 저를 깨우쳐 주소서!"

"그것은 일체를 소유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자신을 아는 일이지요."

승열스님은 자상한 설법과 함께 왕의 전생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왕은 참회하면서 왕비인 원앙부인과 함께 광유성인에게 가서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왕위를 태자에게 물려 준 뒤 임정사로 향해 길을 떠났다.

만삭의 몸으로 길을 떠난 원앙부인은 중도에서 지칠대로 지쳐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부인 힘을 내구려. 나와 함께 도를 이루자고 하지 않았소."

"대왕이시여! 저는 전생에 숙업인 듯 하옵니다. 저를 여기서 종으로 팔아 그 대가를 임정사 부처님께 올려 다음 생에 다시 공부하도록 빌어주십시오. 저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죽림국의 한 부자에게 만삭이 된 부인을 팔았다.

"대왕이시여! 아기를 나으면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을까요?"

"아들이거든 안락국이라 하고 딸을 나으면 아량이라 하여주오."

가슴이 터질 듯 아프고 슬픈 마음으로 부인과 작별한 왕은 광유성인의 제자가 되어 차 시봉을 하면서 세속 일을 잊고 정진에 몰두하였다. 그렇게 7년이 되던 어느 날, 임정사로 한 남자아이가 아버지를 찾아왔다. 그는 원앙부인이 낳은 태자 안락국이었으니 바로 전생의 한 시녀이기도 하다. 반갑게 상봉한 부자는 공부하며 함께 지냈다. 수다라 왕이 도를 얻어 열반에 들자 광유스님이 안락국에게 전생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안락국아! 너는 인연 있는 곳을 ?아 가서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거라. 그 인연지는 여기서 이백오십만리 떨어진 해동국으로 그곳에는 문수보살이 부처님의 부촉을 받고 계신 곳이다. 가서는 거북이가 물 마시는 형상을 하고 있는 산을 찾거라. 동해바다의 기운을 들여 마시는 용이 사는 연못이 있고, 탑의 형상을 갖춘 남쪽 돌산에는 '옥정'이라는 우물이 있으니 그 물을 먹으면서 수도하거라. 북쪽에는 설산을 닮은 돌 빛이 흰 산이 있으니 그 산 굴 속에 부처님을 조성하여 모시거라."

그리하여 해동 계림국에 도착한 안락국은 명당을 찾아 조그만 암자를 세워, 이름을 칭하되 '임정사'라 하였다. 절이 창건된지 백오십년 후 신라의 '원효대사'가 절을 확장하고 ,이름을 부처님 당시의 최초의 절인 '기원정사'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기림사'라 개명하였다.

 

 

 

 

관음전

 

삼천불전 부처님

 

옥돌로 조성된 삼천불전 부처님

 

 

 

 

보물로 지정된 소조 대적광전 비로자나 부처님

 

가운데 비로자나불 왼쪽에 노사나불 오른쪽에 석가모니불을 모셔 삼신불(三身佛)을 이루는데, 흙으로 빚은 이 세 불상은 손의 위치와 자세만 다를 뿐 표정과 모양이 거의 같고 옷 주름까지도 비슷하다. 상체는 장대하나 무릎은 빈약하게 느껴지며, 네모난 얼굴은 강인한 표정이 엿보인다. 적절한 두께로 주름을 세겨넣은 옷자락 표현이 장대한 몸체에 잘 어울리는데, 왼쪽 무릎 위로 접어 올린 옷자락이 비로자나불만 살짝 한 겹 더 접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만 삼존불일 경우에는 좌우 부처들이 두 손을 서로 대칭되게 한쪽씩 드는 것이 보통이나 이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은 둘 다 오른손을 들고있는 것이 색다르다.

1740년에 간행된 [기림사 사적]에서는 대적광전 내부에 흙으로 만든 삼세여래상을 봉안하였으며, 이 때의 증사가 은점산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신불의 교리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법신불(法身佛)

비로자나불,순수하고 차별상이 없는 영원불멸의 진리를 형상화한 부처님이다. 일체의 존재는 그것의 나타남이다.

보신불(報身佛)

노사나불, 과거의 수행에 의한 공덕, 모든 미덕을 구비한 이상적인 인격으로서의 부처님이다. 과거 세상에 모든 만행 선근공덕의 보답으로 갖추어지는 부처님의 모습이다.

화신불(化身佛)

중생을 교화 구제하려고 부처님 자신이 중생의 모습으로 변화하여 나타난 것을 말한다. 현세에 인간의 모습으로 출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바로 천백억 화신불이다.

삼신불(三身佛)은 세 부처님이 따로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 부처님의 세 가지 관점을 묘사한 것이다. 형상을 여윈 진리에서의 법신불과 만행공덕의 측면인 보신불과 실제 역사 속에서 이 모든 것을 구현하시고 중생을 구제하신 교화의 관점인 화신불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보물로 지정된 대적광전 노사나불

 

보물로 지정된 대적광전 석가모니불

 

 

약사전

 

 

응진전

 

오백나한상을 모신 건물로 전면 5칸, 측면 2칸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장대석 1단의 얇은 기단 위에 화강석 주초를 놓고 전 후면에는 두리기둥을, 측면에는 각진기둥을 세웠는데 후면의 기둥은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동바리를 하였다. 공포는 내외 2출목이다. 내부 살미의 형태는 주심포에다 교두점 차단과 양봉이 주간포에는 교두점 차단과 삼분도 요두(要頭)를 각각 얹었다. 가구는 5량가이며 대량과 종량위에는 파련대공을 세웠다. 천장은 빗반자를 치고 단청을 하였는데 천장 전체가 빗반자로 된 경우는 드물다. 바닥은 우물 마루를 깔았으며 문비 구성은 전면 각칸에 이분합(二分合)교살문을 달았다. 이러한 형태를 볼 때 관룡사 대웅전의 모양과 흡사한 조선중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2002년 4월 개분불사를 하는 중에 오백나한 복장에서 조성당시에 씌여진 것으로 보이는 발원문이 나왔다. 여기에 보면 조성년도가 옹정7년(擁正七年)이다 서기로는 1729년이고 우리나라 연호로는 영조5년이다. 불상조각에 참여하신 분은 금산사 스님 4분과 본사스님 3분이다.

오백아라한은 정확히 526분의 성자이다. 부처님 당시의 제자들 중에 가장 뛰어난 10대 제자, 16성중(聖衆)과 500성중(聖衆)이다. 모든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간 최고 단계에 있는 사람이다. 아라한에 관한 설명은 다음의 법구경에 나온 게송으로 알 수 있다

 

 

약사전

 

정면 3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약사전은 동방 만월 세계에서 중생 교화를 맡고 계신 약사 여래불을 모신 전각이다. 사람의 병을 고치고 , 번민에서 구제하시는 부처님으로 약사유리광여래불(藥師琉璃光如來佛),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 한다. 보살로서 수행하고 있을 때에 12대원(大願)을 발했다고 한다.

중생의 병을 제거하며, 모든 감각기관을 완비시켜 해탈로 인도하는 능력이 있다. 일광(日光)보살, 월광(月光)보살을 각각 좌우 협시(脇侍)로서 약사삼존(藥師三尊)으로 삼으며, 권속에는 호법신(護法身)으로서의 12신장을 모신다.

 

약사전 부처님

 

응진전

 

응진전 부처님

 

 

범종루

2층의 누각 형태로 지어졌으며 1층은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범종루는 북, 종, 운판(雲版),목어(木魚)등 사물(四物)을 두는 곳이다.

북은 걸어 다니는 축생을 위해 두드린다.

종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친다. 아침 예불시에는 28번, 저녁 예불시에는 33번을 친다 이 종소리를 들으면 지옥 옥졸들이 지옥 중생을 괴롭히다가 잠깐 쉰다고 한다. 목어는 물고기 모양으로 나무의 속을 파서 만들었으며 물 속에 사는 중생들을 위하여 두드린다.  운판은 청동이나 철로 만든 구름 모양의 넓은 판인데 ,날아다니는 중생들이 이 소리를 듣고 해탈하라고 친다.

 

 

 

 

 

기림사 삼층 석탑

대적광전과 진남루 사이 서쪽에 오백나한전이 있고 바로 그 앞에 높이 3m 쯤 되는 아담한 3층석탑이서 있다. 감은사 탑과 같은 돌인 안산암(安山岩)으로만들었는데, 2중의 기단 위에 3층으로 몸체 돌과 지붕돌을 쌓았고 그 위에 노반, 복발, 앙화까지 남아 있다.

아랫기단은 낮은데, 한 면에 3개씩의 기둥모양이 새겨져있고 , 위 기단은 높은데 각 면마다 기둥 셋이 새겨져있다. 몸체 돌에는 층마다 모서리 기둥을 새겼는데, 아래는 굵게, 위는 좁게 나타내는 엔타시스(배흘림) 양식이다. 처마 끝은 4단으로 돼있다. 크기도 작지만 , 기단의 기둥수, 처마 받침의 단수가 줄어들어 ,통일 신라의 일반형이이면서 ,시대 말기 것으로 보인다. 석탑 동쪽의 보리수밑에는 목탑(木塔)터가 남아 있다.

언젠가 목탑이 소실되고 난 뒤 재건하지 못하고 ,대신 자그마한 석탑을 세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관음전 관세음 보살

 

천수 천안 관세음보살님을 모신 전각이다.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과 열 한 개의 얼굴을 하고 있다. 천(千)은 광대무변(廣大無邊)의 뜻을 나타낸다. 수없이 많은 중생의 고통소리를 보아야 하므로 그렇게 많은 눈이 필요하고, 수많은 중생을 손을 내밀어 구제해야 하므로 그렇게 많은 손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징한다.

열 한 개의 얼굴을 한 십일면(十一面)관세음보살은 아수라도에 있는 것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맨 위의 불면(佛面)은 불과(佛果)를 표현한 것이고, 전후좌우 십면은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階位)인 10지(地)를 나타낸다. 이것은 중생의 11품류의 무명번뇌를 끊고 불과를 얻은 뜻을 상징한다

 

 

 

 

 

삼성각

 

명부전

 

명부전

정면 3칸 맞배지붕의 건물로 안에는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모셨다.

지장보살은 도리천에서 석가여래의 부촉을 받고 매일 아침 선정에 들어 중생의 근기를 관찰한다. 석존이 입멸 후부터 미륵불이 출현 할 때까지 몸을 6도에 나타내어 천상에서 지옥까지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대자대비한 보살이다. 석장을 짚은 사문의 모습의 형상을 하고 계시며 지옥에 있는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하고 나서 부처가 되겠다는 거대한 서원을 세운 대비대원(大悲大願)보살이다. 좌우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協侍)하고 있다.

명부시왕은 죽은 자의 영혼이 가는 명계(冥界)를 다스리는 열 분의 왕이다. 시왕은 진광대왕(秦廣大王), 초강대왕(初江大王),송재대왕(宋宰大王), 오관대왕(五官大王), 염라대왕(閻羅大王), 변성대왕(變成大王), 태산대왕(泰山大王), 평등대왕(平等大王), 도시대왕(都市大王), 오도전륜대왕(五道轉輪大王)이다.

 

 

삼성각

명부전 구역에 있는 건물로 정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였다.

삼성각은 나반존자(독성,獨聖),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세분을 한꺼번에 모셔 놓은 전각이다.

나반존자는 남인도 천태산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십이연기(十二緣起)를 깨달은 성자이다. 칠성은 본디 중국에서 유입된 도교신앙의 신으로 한국에 들어와 토착화되었다. 처음에는 약사 신앙과 결합되었다가 조선중기 이후 수명신의 본디 모습이 강조되었다. 산신은 주로 호랑이와 같이 있으며 산을 주재하는 신이다. 불교에 들어와서 호법신중(護法神衆)의 하나로 흡수되었다.

 

 

 

 

 

 

 

기림사에 있는 5종류의 샘물이다.

 

?  명안수(明眼水)

이 물을 마시면 눈이 밝아진다 고한다.

?  장군수(將軍水)

나한전 삼층석탑 아래에 뭍혀있다.이 물을 마시면 천하무적의 장군이 된다고 하는데 ,혹시 반역자가 생길까봐 우물 위에다 석탑을 세웠다한다. 지금도 고요한 밤탑 밑에 귀를 귀울리면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  화정수(華井水)

마실수록 마음이 편안해지고, 대중들이 이물을 마시며 정진하면 서로 화합한다고 한다.

?  감로수(甘露水)

북암에 있는 감로수는 물빛이 우유빛이지만 일단 바가지로 뜨면 무색으로 , 이 물로 차를 끓이면 최고로 맛있는 차가 된다고 한다.

?  오탁수(嗚啄水)

동편 산마루에 있는 오탁수는 물맛이 하도 좋아 까마귀가 쪼아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감로수와 화정수만이 마실 수 있다.

 

 

 

 

[가고싶은산사-사진-석양노을]부산 초읍 천태종 삼광사 전각과 경내 초파일 연등 장엄장면

◈부산진구 대한불교 천태종 삼광사◈  

 

부산진구 초읍동에 위치한 천태종의 제 2 사찰.

삼광사는 1986년 창건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상월원각대조사를 모신 대웅보전을 비롯

1만여명이 동시에 대법회에 함께할 수 있는 불교회관이 건립되어 있다.

다보탑은 1997년에 만든 것으로 전체높이가 30m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석탑으로

티베트, 미얀마, 인도에서 온 부처님의 진신사리 10과가 봉안되어 있다.

 정기 법회를 비롯해서 삼광한글학교, 삼광한문학교, 삼광사 부설 광명유치원,

합창단, 다도회, 원회, 전통 요리 보존회 등 다채로운 문화 강좌와 사진전,

서화전, 초청연극 등 국내 외 문화예술 행사를 개최한다. 절은 24시간 개방한다.

  범어사 해동용궁사와 함께 부산 3대 사찰로 불린다. 본산은 "구인사"

 

[가고싶은산사-사진 김해진이사]경북의성군 금정산 수정사 전각과 경내주변 풍경

 

[가고싶은 산사-행원 전재만이사]경주 감은사지 풍경

2015년 5월 16일 찾은 경주 대왕암 가는 길가의 감은사지 풍경입니다.

감은 사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지어 졌다는 설화가 있는 감은사지

거대한 두개의 탑이 멀리서도 그 모습을 뚜렷이 나타내는 감은사지 풍경

역사의 현장 그곳을 처음 찾아보니

천년이상을 유구이 그 모습을 간직하여 온 선조의 얼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감동이 흐르는 감은사지 탑모습입니다.

감은 사지 금당 밑에까지 바닷물이 흘러 들어와서 죽어서 동해 호국용왕이 되었다는

문무대왕이 바다물을 타고 드나 들게 만들었다는  금당의 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감은 사지

책에서만 본 감은사지를 직접 찾아보니 감동의 물결이 몰려옵니다.

 감은사지 불탑 조화와 균형미가 넘치는 아름다운 탑 모습.안정된 탑모습.

조화와 균형의 안정적이 자태가 천년이상을 변함없이 지탱하여 올 수 있는

동기가 된 아름다운 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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