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작품-곽영석 글, 김해진 사진]동시-황매산 강아지 바위
황매산 강아지 바위
곽영석
경남 합천 황매산 산신할머니
봄이면 산기슭에
진달래 철쭉 꽃불
빨갛게 밝히시고
구름위에 누워 낮잠 주무시나보다.
산마루에 늙은 강아지 바위
할머니 기다리다
초여름 땡볕아래 콜콜 낮잠을 자고
연두 빛 나무들만 이슬 젖은
앞치마 속치마
햇살에 말리고 있다.
[수필산책-정판순]단수필-문은 두드려야 열린다
문은 두드려야 열린다
정 판 순
나는 경남 합천군 가야면의 작은 농촌에서 태어나 자랐다. 2남2녀 중 셋째이다. 위로 오빠, 언니 아래는 4살 차이의 남동생이 있다. 아버지는 보수적이고 말수가 적은 분이셨다. 평소에 아버지 말씀은 법으로 생각하며 자랐다. 그때만 해도 우리 집에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남아선호 사상이 매우 강했다. 부모님은 남동생 대학 진학을 위해 나에게는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라고 하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내가 고등학교 진학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울음으로 몇 날을 지샜다. 밥도 먹히지 않았다. 매일 눈물로 지새다 보니 눈이 퉁퉁 부어올랐다. 아버지를 설득해 보기로 했다. 대추방망이 같았던 아버지 고집을 꺾기가 쉽지 않았다. 큰 돈 들이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실업계고등학교에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경비는 내가 알아서 충당하겠다고 했다. 어린 마음인데도 어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하는 행위가 가상했던지 아버지의 마음을 겨우겨우 돌릴 수 있었다. 지극정성이 하늘에 닿은 것이리라.
다른 친구들은 야학에 가거나 진학을 포기하기도 했지만 나는 어엿한 여고생이 되었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합천 가야에서 거창으로 가서 자취생활을 해야 했다.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한 방을 친구와 둘이서 쓰기로 했다. 열심히 공부했다. 실업학교이기에 소위 말하는 국어, 영어, 수학 교과목 시간은 매우 적었다. 나중에 공무원 시험을 보기 위해선 그런 과목들의 공부를 많이 해야 했다. 주경야독했다. 모르는 것들은 이튿날 선생님에게 물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반드시 알아내고야 마는 그런 극성스러움이 있었다.
학교에서 늦은 시각까지 공부하고 집에 돌아오면 연탄불이 꺼져 있어 냉방에서 자는 날도 많았다. 그래도 이를 악물었다. 열심히 공부했다. 주판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래도 그 때의 어려움은 고생인 줄 몰랐다. 어린 나이였지만 지금 고향의 부모님은 나를 위해 이른 시각부터 늦은 시각까지 들에서 고생을 하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하자고 자신을 채찍 했다.
그런 덕분인지 고등학교 3년 동안 줄곧 성적이 좋았다. 졸업 때에는 더 좋은 성적이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졸업과 동시에 서울에 있는 취직자리를 소개해 주었다.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더구나 촌놈이 서울로 간다.’ 는 기쁜 마음으로 집에 와 부모께 말씀 드렸다. 아버지는 내 생각과는 달리 “접시와 딸아이는 밖으로 돌리면 안 된다. 밥은 먹여 줄 테니 조금 있다 시집을 가든지 직장생활을 꼭 하고 싶다면 집에서 다닐 수 있는 곳으로 다니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서울 생활의 기회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말씀대로 집에 있기로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꼭 직장생활을 해야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그래서 공무원 시험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 그 당시 집에서 다닐 수 있는 곳은 면사무소, 우체국, 농협 등이 고작이었다. 그 중의 한 곳을 택해 시험을 보아야만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인근 면사무소, 우체국, 농협은 학연, 지연, 인맥 등으로 많이 입사해 근무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입사하려면 공채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반드시 공채에 합격하리라 다짐을 하며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집에서 아버지가 시키는 심부름을 하면서도, 소에게 풀을 뜯기면서도 나는 공채에 대한 생각을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다 큰 처녀가 실성했나 보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땅만 바라보고 무엇인가 골똘히 들여다 보고만 있었으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했다.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늦은 시간까지 시험공부를 했다. 학교 시험은 과목과 범위가 정해져 있다. 하지만 공무원 시험은 과목은 공개되지만 범위는 없다. 망망대해 같다. 국어, 영어, 수학 외에 일반상식, 그리고 주판 연습도 틈틈이 했다. 어느 곳에 근무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막힘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노력했다.
늦게까지 공부하다 다음날 일어나면 베개와 이불에 붉은 색으로 지도를 그린 날도 많았다. 그런 날은 부모께 들킬까봐 일찍 일어나 베갯잇과 이불깃을 세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아저씨가 내가 들에서 풀을 베는 모습을 보더니 “너 공부 잘 했잖아. 이번에 농협에 시험이 있다고 하든데 한 번 응시 해 보렴. 오늘까지 접수한다더라.” 이 말을 들은 나는 농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낭패였다. 마침 토요일이라 접수 마감 시각은 다 되어 가는데 지나가는 버스도 없었다. 알려 주실려면 좀 일찍 알려주시지. 아저씨에 대한 원망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 나왔다.
다행히도 근처에 도자기 공장이 많아 고령토 광산에서 고령토를 실은 화물차는 많이 왕래했다.
접수는 해야겠고 시간은 다 되어 가고 내 얼굴은 정말 사색이 되어갔다. 염치불구하고 지나가는 화물차를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도로 한 가운데에서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불렀다.
그랬더니 화물차 기사 아저씨가 차를 세우고 내려오더니 화난 목소리로 “너 죽고 싶으냐? 죽으려면 너 혼자나 죽지 왜 죄 없는 나까지 죽이려고 하니?” 하면서 한 대 후려 칠 기세였다. 기사 아저씨 입장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죽고 싶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신 있게 농협 공채 서류를 주머니에서 꺼내 보여드리며 사정 말씀을 드렸다.
아저씨는 조금은 화가 풀렸는지 “알았다. 잔소리 말고 빨리 타기나 해.”
하며 태워 주었다.
아저씨 덕분에 무사히 도착해 접수를 마쳤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성도 이름도 모르는 아저씨가 고맙기만 했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 시험을 본단다. 또 낭패였다. 체계적인 공부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였다. 시간이 절대 부족하였다. 그 날이 1986년 8월 3일 한여름이었다. 코피를 쏟는 날이 계속 되었다.
시험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무더운 날씨였지만 몸은 하늘을 날 것 같았다. 다행히 아는 문제들이 많이 나왔다. 하늘도 나??도와주시는 것 같았다. 주판 문제는 평소에 갈고 닦은 실력으로 모두 맞힐 수 있었다.
며칠 후 발표회장에서 나는 모두에게 축하를 받았다. 꿈만 같았다. 합격, 그것도 수석 합격이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 세상이 모두 내 것인 것 같았다. 몸은 둥둥 하늘로 풍선이 되어 날았다. 성취했다는 묘한 기분에 며칠 밥을 안 먹어도 될 성싶었다.
이런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더구나 살면서 세상문은 누가 열어 놓고 “너 어서 오너라.” 하고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내 스스로 도전의 문을 두드리면 열린다는 것도 깨달았다.
세상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란 속담처럼 그 때의 어려움을 참고 열릴 때 까지 두들겼더니 농협 입사의 문이 열렸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난은 좀 불편했을 뿐이지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부모님 덕분에 이렇게 독립심까지 키웠다. 어릴 때는 부유한 친구가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부모님이 오히려 더 감사하다.
시간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지금 순간순간의 시간을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제일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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