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사진-청산]경주 독락당과 정혜사지 삼층석탑 풍경

1 정혜사지 삼층석탑

 

 

 

 

 

경주 안강읍 옥산서원 지나 독락당을 구경하고 조금더 가면 정혜사지 십삼층 석탑이 나온다.

 

국보로 지정된 보기 드문 독특한 형태의 탑 양식으로 독특한 모양의 석탑이 눈길을 끈다.

 

 

 

 

 

 

 

 

 

 

 

 

 

정혜사(淨惠寺)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하는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동경통지(東京通志)』에는 신라 선덕왕(宣德王) 원년(元年)인 780년 중국 당나라의 백우경(白宇經)이 신라에 망명 와 이곳에 머무르면서 집을 지었는데 후에 이를 고쳐 절로 삼고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이 절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은데, 최근 경주 분황사(芬皇寺) 보광전(普光殿)의 해체·수리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분황사 보광전의 중수를 위하여 경주 인근 6개 사찰에서 시주를 하였는데 그 가운데 정혜사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적어도 조선 중기에는 정혜사가 존재하였음을 알게 되었으나 이후 언제 폐허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나라 탑파사를 통틀어 10층 이상의 다층탑은 매우 드물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북한 묘향산 보현사에 남아 있는 8각13층석탑을 제외한다면 정혜사석탑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원래 10층 이상의 다층탑은 중국적인 탑이다. 『동경통지』의 기록에서도 이 절의 창건에 중국인이 관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실례로 경주에는 또 다른 13층탑이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중국 황실의 안녕을 위해 지은 망덕사(望德寺) 동서 쌍탑이 13층이었는데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13층탑이 오직 중국과 연관이 있는 곳에서만 나타나는 사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탑은 대개 전탑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탑의 구조는 벽돌이라는 재료상의 특성 때문에 지붕의 처마를 길게 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탑신의 체감도 완만하여 다층의 구조를 가지는 소위 밀첨식(密?式) 탑이었다. 그러므로 층수는 대개 10층 이상으로 높아질 수밖에 없어 13층의 탑이 주류를 이루었다. 따라서 정혜사지석탑은 층수에 있어서는 지극히 중국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다층탑과 정혜사지석탑은 층수가 같을 뿐이지 형태나 구조는 중국의 그것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정혜사지십삼층석탑 통일신라, 8세기 중엽, 현재 높이 5.9m, 국보 제40호,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우리나라에서는 묘향산 보현사8각13층석탑을 제외하면 10층 이상의 탑으로는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2층 이상에서는 탑신부가 거의 생략되어 지붕만 겹쳐져 있는 듯한 밀첨식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탑은 당시 일반적으로 유행하던 이중기단을 생략한 채 단층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통일신라 전시기에 걸쳐 유행하던 이중기단 대신에 단층기단을 높게 설정함으로써 탑신부의 세장감과 상승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인데, 정혜사지석탑의 경우는 층수가 다층이므로 기단부를 강조하지 않음으로써 고원(高遠)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나 기단과 탑신받침이 맞닿는 부분은 8세기 중기 이후 유행하던 자연 암석을 깔고 그 위에 탑을 쌓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탑에서 특징적인 것은 1층탑신의 높이를 크게 설정하여 전체적으로 시선이 1층에 머물게 하는 시각적 효과에 맞추었다. 따라서 전체 구성에서 이 탑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1층이 된다. 귀기둥은 따로 제작하여 네 모서리를 지탱하게 하였는데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과 달리 단면(斷面)이 사각형이 아니라 안쪽 내부에 감입되는 석재를 결구하기 위한 단을 두었다. 그 내부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장대석 네 개를 이용하여 문 모양을 만들었는데, 그 돌들 역시 단면이 사각형이 아니라 감춰진 부분은 곡선으로 처리되어 있다. 지붕받침은 3단의 층급받침으로 된 네 매의 돌을 결구하였으며 지붕돌 역시 같은 구조인데 특이하게도 지붕 모서리에 목조 건축에서 볼 수 있는 내림마루[隅棟]를 돋을새김하였다. 이처럼 1층부에서 나타나는 돌을 다루는 기술이나 결구 방식은 당시 석조 기술이 고도로 발달했던 8세기 통일신라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1층부의 전체적인 수법은 신라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특히 귀기둥의 수법이나 1층지붕돌의 처마 곡선은 불국사다보탑과 유사한 기법이라 할 수 있다.

 

 

1층탑신부와 기단부 층수가 다층인 석탑에서는 기단부를 강조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단층기단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불국사석가탑에서 보여지듯이 자연 암석을 깔고 탑을 올려놓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2층부터는 1층과는 매우 다른 방식을 보이고 있다. 1층에 비해 급격한 체감률을 가진 지붕돌을 13층까지 겹겹이 쌓아올렸는데, 지붕돌에 붙여 조각된 탑신부가 거의 생략된 것처럼 낮다. 또한 지붕받침이 매우 낮은 3단으로 되어 있어 지붕의 처마가 길지 못해 마치 탑신이 낮고 지붕 처마가 짧은 중국의 밀첨식 탑을 석재로 소형화시켜 축소해놓은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따라서 이 탑에서 층급받침의 숫자와 낮은 탑신부는 중국식의 밀첨식 탑을 표현하기 위한 의도일 뿐 이것으로 이 탑의 시기를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된다.

이 탑의 전체적인 조형 의도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다층탑을 구현하는 것이었으나 세부적으로 보면 1층에서는 당시 유행하던 고도의 석조 결구 방식에 의하여 조영되었으며, 2층 이상의 부분에서는 석재로 중국식 탑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는 터만 남아 있는 경주 망덕사지십삼층목탑의 모습도 이러한 정혜사지석탑의 모습과 유사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를 이해할 수 있는 13층목탑이 현재 일본 나라(奈良) 단잔진자(談山神社)에 남아 있다.

 

 

 

 

 

 

 

 

2 경주 동락당

 

 

 

var articleno = "8473881";

 

경주 양동 마을을 둘러보고 경주 안강의 옥산리에 있는 고택 독락당을 찾았다.

 

현재도 사람이 살고 있어 집 안채는 볼수 없고 외부에서 불러본 독락당의 모습 고택의 아름다움과 자연과 어울리는 멋진 고택의 모습에 감탄할 뿐이다.

 

자연을 벗하며 한가로운 마음에 절로 마음이 맑아 질 것 같은 분위기의 고택 풍경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에 있는 조선시대 중기의 주택.

 

내용

 

보물 제413호. 이 집은 이언적(李彦迪)을 봉사(奉祀)하고 있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의 안쪽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이언적의 고택 사랑채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단층팔작집으로 서쪽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두고 그 동쪽의 정면 3칸, 측면 2칸에는 전부 우물마루를 깔아 사랑대청으로 하였다.

 

대청의 마루 가운데에는 온돌방의 중앙기둥처럼 네모진 기둥이 서 있고 주선(柱?)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는 이곳도 서쪽의 온돌방처럼 벽체를 만들고 방으로 꾸몄던 것으로 추측된다.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에는 주두(柱頭)를 얹고 쇠서 하나를 내어 초익공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간살은 오량(五樑)으로 앞뒤의 평주(平柱) 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양봉형(樑奉形)의 대공에 소로를 짜넣어 종보를 받치고 있다.

 

종보 위에는 다시 양봉형의 동자기둥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는데, 측면 벽체 위에서는 단순한 동자기둥으로 대공을 만들어 종도리를 받치며 직선재로 된 소슬합장을 두었음이 아산맹씨행단(牙山孟氏杏壇, 사적 제109호)에서의 모습과 흡사하다.

 

온돌방에는 띠살창호를 달았으나, 대청에는 정면 3칸을 창호없이 모두 개방하였고, 뒷면과 측면에는 띠살창호를 달았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