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촌수 계산법

 

      가족의 촌수 계산법

 1.직계 가족(直系 家族)

 5촌

                   

현조부(玄祖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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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촌


 6촌

고조부(高祖父)

 

종고조(從高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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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촌


 5촌

 

 7촌

증조부(曾祖父)

 

종증조(從曾祖)

 

재종증조(再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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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촌


 4촌

 

 6촌

 

 8촌

조부(祖父)

 

종조(從祖)

 

재종조(再從祖)

 

3종조(三從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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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촌


 3촌

 

 5촌

 

 7촌

 

 9촌

부(父)

 

백숙부(伯叔父)

 

종백숙부(從伯)

 

재종백숙부(再從)

 

3종백숙부(三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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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촌


 2촌

 

 4촌

 

 6촌

 

 8촌

 

10촌

나(己)

 

형,제(兄,弟)

 

종형제(從兄弟)

 

재종형제(再從)

 

3종형제(三從)

 

4종형제(四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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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촌

 

 3촌

 

 5촌

 

 7촌

 

 9촌

 

11촌

아들(子)

질(姪)

종질(從姪)

재종질(再從姪)

3종질(三從姪)

4종질(四從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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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촌

 

 4촌

 

 6촌

 

 8촌

 

10촌

   

손자(孫)

 

종손(從孫)

재종손(再從孫)

3종손(三從孫)

4종손(四從孫)

 

 2.내종간(內從間)

 4촌

               

고조(高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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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촌


 5촌

증조(曾祖)

 

증대고모(曾大姑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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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촌


 4촌

 

 6촌

조(祖)

 

대고모(大姑母)

 

내재종조(內再從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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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촌


 3촌

 

 5촌

 

 7촌

부(父)

 

고모(姑母)

 

내종숙(內從叔)

 

내재종숙(內再從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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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촌


 2촌

 

 4촌

 

 6촌

 

 8촌

나(己)

 

자매(姉妹)

 

내종형제(內從兄弟)

 

내재종형제(內再從)

 

내3종형제(內三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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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촌

 

 3촌

 

 5촌

 

 7촌

 

 9촌

딸(女)

 

생질(甥姪)

 

내종질(內從姪)

 

내재종질(內再從姪)

 

내3종질(內三從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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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촌

 

 4촌

 

 6촌

 

 8촌

 

10촌

손녀(孫女)

 

이손(離孫)

 

내재종손(內再從孫)

 

내3종손(內三從孫)

 

내4종손(內四從孫)

 

 3.외종간(外從間)

 

 4촌

           
 

외고조(外高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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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촌


5촌

 

외증조(外曾祖)

외종증조(外從曾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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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촌


 4촌

 6촌

 

외조 (外祖)

 

외종조(外從祖)

 

외재종조(外再從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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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촌


 1촌


 3촌

 

 5촌

 

 7촌

이모(姨母)

모(母)

외숙(外叔)

외종숙 (外從叔)

외재종숙 (外再從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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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촌

0촌

 4촌

 6촌

 8촌

이종형제 (姨母)

나(己)

외종형제 (外從)

외재종형제 (外再從)

외3종형제(外三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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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촌

 

 5촌

 7촌

 9촌

이종질 (姨從姪)

외종질(外從姪)

외재종질(外再從姪)

외3종질(外三從姪)

 

경주최씨의 시조이신 소벌도리공께서 처음으로 형산으로 내려와 돌산 고허촌의 대인이 되시었는데 이 때에 옛 조선유민이 동해 산곡간에 흩어져 육촌을 이루어 집단으로 살고 있었으니 이를 진한육부라 하였다. 그 당시 임금이 없고 육촌장만 있었으므로 소벌도리께서 제촌장(諸村長)들과 유덕한 임금을 세울 것을 결의한 후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고 있을 때 양산(陽山) 밑 나정(羅井) 곁에 이상한 기운이 땅 위에 서리고 붉은 알 하나가 있으므로 이를 쪼개어 보니 동남(童男)이 알속에서 나왔다 소벌도리께서는 천자의 연생으로 생각하고 동천에 목욕시켜 정성껏 양육하여 십삼세가 되던 (서기전57년) 갑자 여름 사월 병진에 오촌장과 더불어 왕으로 추대하니 곧 신라개국시조왕인 혁거세이시다. 그 후 유리왕 9년(서기32년) 임진에 신라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이어서 사성하였는데 양산부를 양부라하여 그 姓을 이(李)라 하였고 고허부를 사량부라하여 그 姓을 최(崔)라 하였으며 대수부를 점량부라하여 그 姓을 손(孫)이라 하였고 우진부를 본피부라하여 그 姓을 정(鄭)이라 하였으며 가리부를 한지부라하여 그 姓을배(裵)라 하엿고 명활부를 습비부라하여 그 姓을 설(薛)이라 하였다

 사진은 나정입니다.

 

(崔)자의 뜻》崔는 높을 山과 사람 人,흙 土를 두 개 포갠 圭자로 형성된 문자이며 이 규(圭)자는 천자에게 받은 땅을 다스린다는 뜻과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내리던 신표의 뜻으로 위로는 뫼 山,아래로는 사람 人,흙 土를 두 개 합친 최(崔)자는 하늘아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인신 최고의 신분표시였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소벌도리(蘇伐都利)는 정씨(鄭氏)의 조상도 되며 진주 소씨(蘇氏) 시조도 소벌도리라고 밝히고 있고 본피부의 성을 최씨로 명기되어 있습니다.그러나 그 세계(世系)를 구체적으로 밝힐 만한 문헌은 없고 삼국사기와 서거정이 왕명을 받아 성종7년에 완성한 삼국사절요에 보면 삼국사기와 일치함을 알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원문    삼국사기원문1   돌산고허촌장소벌도리비문(이비문은 사단법인경주최씨대종회의 옛명칭인 사

 

 

단법인고운최선생유적보존회에서 경주 금오산 북쪽 산기슭 옛터에 빗돌을 세워 건립했으며 향사일은 매년 음력팔월십칠일입니다)

 

孤雲 崔致遠先生 略史


 先生은 서기 857년 新羅 憲安王 元年에 新羅 首都 沙梁部에서 태어나셨다.

 諱는 致遠, 자는 孤雲, 호는 海雲 또는 海夫라 하셨고, 시호는(고려 현종 14년) 文昌侯이시다.

 12세의 어린나이로 唐나라에 留學 떠날 때 十年不第非吾子라 하신 嚴親의 말씀 받들고 入唐修學하시어 弱冠 18세 되든 해 唐나라 僖宗, 乾符 元年(874)에 과거에 급제하시어 江南道 宣州 漂水縣尉라는 지방관으로 官界에 첫발을 디디셨다.

 바쁜 公務에도 硏究와 저작에 힘을 기울여 先生의 명작이신 中山覆簣集을 完成하신 것도 이 때의 일이다.

 날로 달라지는 先生의 文才는 세인을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관리로서 能力도 비범하시어 얼마가지 않아 承務郞 侍御史 內供奉에 오르셨고 뒤이어 궁궐에 何時라도 出入할 수 있는 紫金魚袋를 皇帝로부터 下賜받기에 이르렀다. 그해 山東에서 黃巢가 난을 일으켜 唐나라 全國土를 휩쓸게 되자 先生은 官軍의 總指揮官인 兵馬都統 高騈의 從事官으로 토벌에 나아가 黃巢 檄文을써서 叛賊黃巢가 놀라 의자에서 떨어 졌다하는 名文은 唐 天下에 文名을 떨쳤으며 이 때에 이룬 공적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으셨다. 

 先生은 서기 884년 고국을 떠나신지 16년만인 28세 때 귀국하시게 되자 憲康王은 侍讀兼翰林學士 守兵部侍郞 知瑞書監이란 요직에 임명하시였다.   귀국한 이듬해 憲康王이 돌아가시고 定康王이 즉위했으나 한 해만에 그도 세상을 떠나고 眞聖女王이 王位에 올랐다.

 이 틈에 新羅 國運은 쇠미해 가고 조정은 群小輩의 난무로 어지럽게 되자 先生은 西學에서 얻은 포부와 이상을 실현하기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시고外職(地方官)을 自請하시어 泰山郡, 天嶺郡, 富城郡의 太守로 계셨다.

 그 후 서기 893년 眞聖女王 7년 遣唐使에 任命되었으나 凶年이 들어 도적이 횡행하여 길을 떠나지 못하셨다. 先生은 그 이듬해인 眞聖女王 8년 2월에 時務十餘條의 國策論을 상소하게 되자 王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阿湌(新羅 17等級의 6位)이란 官職을 내리셨다. 그러나 先生은 계속되는 亂世에 절망하시어 朝路에서 물러나신 후 慶州 金鰲山, 剛州 氷山, 합주 淸凉寺, 智異山 雙溪寺, 金浦의 月影臺, 東萊 海雲臺等地로 두루 다니시며 國運을 한탄 하시다가 마지막에는 伽倻山 海印寺에 들어가시어 世上에 나오시지 않은 채 끝내 仙化 하셨다고 한다.

 新唐書 藝文志에는 崔(致遠)선생의 四六集 1권과 桂苑筆耕 20권과 經學隊仗 등이 있고 그 外에 鳳巖寺 碑文 崇福寺 碑文도 先生이 찬한 글이며 釋順應傳도 유명하다고 한다. 또한 先生께서는 當時 이름난 禪僧인 鳳嚴寺 智澄大師, 雙磎寺의 眞鑑禪師, 聖主寺의 郞慧和尙의 塔碑銘과 初月山 大崇福寺 碑銘을 創述 하셨다. 이 네 개의 碑銘을 四山碑銘이라 하는데 이 業績을 두고서 儒彿仙에 겸통한 知識과 思想을 발휘한 大思想家, 大文章家로 높이 評價 받으셨다. 

                                                         社團法人 慶州崔氏大宗會 事務局 提供

 

 

匡靖公諱鄲派(광정공휘단파)

 

고려말 조선초의 무관

서기 1388(우왕14) 요동정벌때 안동원수로서 이성계 휘하로 출정.

위화도 회군 했으며 창왕 즉위후 경상도 도순문사 박위와 함께 상주에서 왜구를 격파했다.

서기 1390(공양왕2)에 한양윤에 이어 판자혜부사를 지냈다.

1392(태조1년)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원종공신이 되고 앞서 회군의 공으로 3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참봉공종윤파(參奉公宗潤派)

진사공재능파(進士公在能派)

학생공동선파(學生公東先派)

우락제공동보파(憂樂劑公 東輔派)

한천공인파(寒川公認派)

다천공동률파(茶川公東嵂派)

대암공동집파(臺巖公東집派)

향암공동직파(香巖公東직派)

풍계공호파(楓溪公湖派)

사직공식파(司直公湜派)

충의공유파(忠義公洧派)

판서공징파(判書公澄派)

감찰공중연파(監察公仲淵派)

정랑공재원파(正郞成在源派)

청담공원하파(淸淡公元河派)

김해파(金海派)

학생공계연파(學生公季淵派)

 

 

득성

시조

慶州崔氏 蘇伐都利

경주최씨 소벌도리

2세

大伐利

대벌리

3세

小伐利

소벌리

4세

大平

대평

5세

昊彬

호빈

6세

桄允

광윤

7세

8세

9세

10세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殷義

은의

16세

瑞鳳

서봉

17세

惠陽

혜양

18세

太壬

태임

19세

東雄

동웅

20세

亨公

형공

21세

林芬

림분

22세

桂陽聖

계양성

23세

山允

산윤

24세

致遠

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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