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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雲 崔致遠先生 略史


 先生은 서기 857년 新羅 憲安王 元年에 新羅 首都 沙梁部에서 태어나셨다.

 諱는 致遠, 자는 孤雲, 호는 海雲 또는 海夫라 하셨고, 시호는(고려 현종 14년) 文昌侯이시다.

 12세의 어린나이로 唐나라에 留學 떠날 때 十年不第非吾子라 하신 嚴親의 말씀 받들고 入唐修學하시어 弱冠 18세 되든 해 唐나라 僖宗, 乾符 元年(874)에 과거에 급제하시어 江南道 宣州 漂水縣尉라는 지방관으로 官界에 첫발을 디디셨다.

 바쁜 公務에도 硏究와 저작에 힘을 기울여 先生의 명작이신 中山覆簣集을 完成하신 것도 이 때의 일이다.

 날로 달라지는 先生의 文才는 세인을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관리로서 能力도 비범하시어 얼마가지 않아 承務郞 侍御史 內供奉에 오르셨고 뒤이어 궁궐에 何時라도 出入할 수 있는 紫金魚袋를 皇帝로부터 下賜받기에 이르렀다. 그해 山東에서 黃巢가 난을 일으켜 唐나라 全國土를 휩쓸게 되자 先生은 官軍의 總指揮官인 兵馬都統 高騈의 從事官으로 토벌에 나아가 黃巢 檄文을써서 叛賊黃巢가 놀라 의자에서 떨어 졌다하는 名文은 唐 天下에 文名을 떨쳤으며 이 때에 이룬 공적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으셨다. 

 先生은 서기 884년 고국을 떠나신지 16년만인 28세 때 귀국하시게 되자 憲康王은 侍讀兼翰林學士 守兵部侍郞 知瑞書監이란 요직에 임명하시였다.   귀국한 이듬해 憲康王이 돌아가시고 定康王이 즉위했으나 한 해만에 그도 세상을 떠나고 眞聖女王이 王位에 올랐다.

 이 틈에 新羅 國運은 쇠미해 가고 조정은 群小輩의 난무로 어지럽게 되자 先生은 西學에서 얻은 포부와 이상을 실현하기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시고外職(地方官)을 自請하시어 泰山郡, 天嶺郡, 富城郡의 太守로 계셨다.

 그 후 서기 893년 眞聖女王 7년 遣唐使에 任命되었으나 凶年이 들어 도적이 횡행하여 길을 떠나지 못하셨다. 先生은 그 이듬해인 眞聖女王 8년 2월에 時務十餘條의 國策論을 상소하게 되자 王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阿湌(新羅 17等級의 6位)이란 官職을 내리셨다. 그러나 先生은 계속되는 亂世에 절망하시어 朝路에서 물러나신 후 慶州 金鰲山, 剛州 氷山, 합주 淸凉寺, 智異山 雙溪寺, 金浦의 月影臺, 東萊 海雲臺等地로 두루 다니시며 國運을 한탄 하시다가 마지막에는 伽倻山 海印寺에 들어가시어 世上에 나오시지 않은 채 끝내 仙化 하셨다고 한다.

 新唐書 藝文志에는 崔(致遠)선생의 四六集 1권과 桂苑筆耕 20권과 經學隊仗 등이 있고 그 外에 鳳巖寺 碑文 崇福寺 碑文도 先生이 찬한 글이며 釋順應傳도 유명하다고 한다. 또한 先生께서는 當時 이름난 禪僧인 鳳嚴寺 智澄大師, 雙磎寺의 眞鑑禪師, 聖主寺의 郞慧和尙의 塔碑銘과 初月山 大崇福寺 碑銘을 創述 하셨다. 이 네 개의 碑銘을 四山碑銘이라 하는데 이 業績을 두고서 儒彿仙에 겸통한 知識과 思想을 발휘한 大思想家, 大文章家로 높이 評價 받으셨다. 

                                                         社團法人 慶州崔氏大宗會 事務局 提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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